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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 율리시즈 Jun 14. 2018

아인슈타인과 인종차별

런던 에세이

알프레드 드레퓌스 상. 파리의 유대인 박물관 뜰

1894년 갑오경장.

한때 달달 외웠던 역사연대기 중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는 해다. ‘경장’이란 말로 조선이 근대 국가로 개혁을 하려던 해였다. 후진 조선이 근대국가의 체계가 잡힌 선진 서유럽을 따라잡으려던 해였다. 그런데 근대국가의 선봉에 이미 우뚝 서있던 프랑스에선 1894년 바로 똑같은 그 해에 ‘국가수치’로 기록되는 ‘드레퓌스 사건(l'affaire Dreyfus)’이 일어났다.


그 사건의 요점은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알프레드 드레퓌스(Alfred Dreyfus)’라는 프랑스 유대인이 독일 첩자로 몰렸던 것이다. 물론 이 사건은 반유대주의 인종차별에 의한 순전한 날조였다. 그가 유대인이 아니었더라면 이런 날조도 덮어씌워지지 않았으리라. 당시 유럽인들의 사고엔 이방인 유대인이고, 떠돌이 유대인이었으며 또 절대 믿을 수없는 유대인이란 편견으로 가득차 있었다. 많은 이들은 이 편견을 그대로 믿었고 따랐다. 1906년에 이 수치스런 사건이 종결되기까지 장장 12년의 세월을 프랑스는 이 파와 저 파로 갈라져 국가 내분을 일으켰다. 프랑스 사회 어디에고 편견은 이렇게 술술 작동하고 있었다. 거기엔 항상 기름치며 편견의 작동을 원할히 하는 자들도 많았다. 이 사건으로  정의실현엔 항상 고통이 동반함을 프랑스인들에게 일깨웠다. 개념있던 당대의 문학인들과 예술인들도 ‘부정의(injustice)’를 깨트리는 이 거룩한 투쟁에 양심과 정의의 망치를 함께 쥐고 기꺼이 동참했다.


이 고통을 굳건히 이겨낸 유대인 드레퓌스의 조각상이 파리 시내 ‘유대인 박물관’ 뜰 중앙에 서있었다(퐁피두 센터 뒤쪽 마레 지구). 보통 사람 키보다 몇배 높은 이 동상은 자랑스런 프랑스 군인이자 유대인이었던 드레퓌스가 프랑스 군복차림 그대로 하늘을 향해 정의의 총칼을 들고 서있었다. 프랑스 역사의 ‘수치’지만 이젠 ‘정의’ 상징으로서 말이다. 당시는 물론이고 지금도 유대인뿐만 아니라 모든 방문객들은 드레퓌스의 상을 올려보며 지난 부정의의 역사를 되새길 필요가 있을것이다.


이 드레퓌스 사건이 종결된 지 16년이 지난 1922년 어느 머리 똑똑한 독일 유대인이 아시아를 1923년까지 여행했다. 우선 이집트를 들러 지나면서 이 여행객은 여행객들을 상대로 물건을 팔러 우르르 몰려드는 이집트 사람들을 얕잡아 보며 한마디 했고 아름다운 섬나라이자 ‘실론’이라는 신비스런 이름을 가진 스리랑카를 방문하며 인종차별적인 말을 해댔다. 그는 그의 감상을 그의 번쩍번쩍 명석한 머리속에 두지않고 과학자답게 이를 여행기에 적었다. 그런 그가 일본을 방문했을 때는 그나마 약간의 칭찬도 곁들였지만 인종차별적 관점을 여전히 첨가했고 중국방문시에는 인종차별의 극에 달한 말을 적었다. 몇년 전 한국 신문에 그가 일본방문 후 중국가기 전 조선을 거쳤으리라 하는 보도도 있었다. 갑오경장이 실패하고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버린 후진 조선을 지나면서 그는 어떤 실례되는, 또 오만방자한 인종차별적인 말을 했을까? 아니 그의 명석한(?) 머릿속에 되뇌었을까? 벌써부터 기분나빠진다.


그는 역사상 빼어난 과학자의 한사람이자 전세계인들이 누구나 다 아는 ‘아인슈타인’이다. 그렇다... ‘상대성 이론(the theory of relativity)'란 말이 동일시 튀어나는 바로 그 인물. 희한하게도 그는 ‘드레퓌스’와 똑같은 유럽의 핍박받고 차별받던 유대인 ‘아인슈타인’이다. 그래서 그 후 한창 때에 미국에서 민권(civil rights) 옹호자로 인종차별은 “백인들의 질병(a disease of white people)"이라며 인종차별을 혐오했던 인물로 그는 그렇게 세계에 알려졌다. 그런 그가 이런 인종차별적인 관점을 가지고 여행하며 이를 여행기에 적었다니…


아인슈타인이 동아시아를 여행한 뒤 약 20년이 흐른 후에 유럽에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누구나 다 알고있다. 독일나치에 의해 6백만명의 유대인들이 가스실에서 죽어나간 끔찍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는가? 아인슈타인은 분명히 동족 유대인들이 당시 유럽인들에게 차별받았음을 알고 있었고 또 드레퓌스 사건도 잘 알고 있었으리라. 그런 그가 또다른 인종을 멸시하고 차별하는 관점을 가졌다는 것에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래서, 우린 꼭 심리학이 필요한가? 차별받았음에 그 열등감으로 똑같은 차별을 무자비하게 다른 이에게 되돌려주는…


역사적으로 수많은 인종차별을 경험했던 유대인들이 였다. 파리의 유대인 박물관은 그 차별의 역사를 그대로 전시해 놓고 있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날 보았던 인종차별의 희생양, 정의의 상징 드레퓌스는 똑같은 이름의 유대인 알프레드의 인종차별을  어떻게 볼까?


만약 아인슈타인의 아시아 여행기가 사실이라면, 그 후로 그가 떠벌린 인권옹호는 새빨간 거짓말이 되고 그는 위선자가 된다. 다시한번 명석한 두뇌와 윤리는 분명 별개의 것이다. 과학만을 신봉하고 윤리를 도외시 한다면 어떤일이 일어날지 명약관화하다. 무섭다… 그의 ‘상대성 이론’이 핵폭탄 개발을 도왔다면 그의 인종차별은 핵폭탄만큼이나 끔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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