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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 율리시즈 Aug 01. 2018

둘 사이엔 과연 무슨 일이 있었을까?

런던 율리시즈- 독일 화가 막스 베크만의 더블 초상화

"살다보면 결코 대면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이유있게 싫은 사람, 또 이유없이 싫어지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마냥 피할 수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다 그런 사람을 어느날 갑자기 우연히 마주친다면?"


세계 2차 대전이 일어나기 딱 1년전인 1938년 독일 화가 막스 베크만(Max Beckmann)은 런던의 '뉴 벌링톤 갤러리(the New Burlington Gallery)'에서 강의하는 중 지나가듯 이렇게 말했다.


 “아마 다들 아시다시피 인생은 고달프지요(life is difficult, as perhaps everyone knows by now).”

(참조 1)


인생을 고달프다고 정의한 그는 이를 직접적으로 체험했다. 나찌 독일의 가공할 공포와 불안을 예감한 예술인들의 절망적 감성은, 특히 독일화가들은, 그들의 심리적 상태를 솔직하게 자신들의 작품에 표현하였다. 그래서 그들 작품들을 보면 그들의 불안정한 내면이 묻어나온다. 무명이었지만 한때 화가였던 히틀러는 퇴폐적이라며 이들을 무시하고 조롱하였다. 오직 독일민족의 영광만을 보여주고 절망과 실패는 퇴폐로 간주되어 숨기고 불살라졌다. 막스 베크만도 그들 희생자들 중 한명이었다. 그는 독일 표현주의파로 구분되지만 자신은 이를 거부하였고 나중에 '신 즉물주의(The New Objectivity. neue sachlichkeit)'에 참여하였다. 이 운동은 사실적 묘사가 드문 표현주의에서 좀더 사실주의로 돌아가자는 운동이었다. 고달픈 현실을 좀더 깊이있고 뚜렷이 보자는 자각이었을까?


위의 그림은 베크만이 실토한 바와같이 삶의 무거운 무게를 보여주는 초상화다. 사실, 그냥 보기엔 아무렇지도 않게 보이지만 조용히 앉아있는 두 여인의 관계를 안다면 이 그림은 복잡미묘해진다. 그것은 물리적이고 외적인 정치와 사회관계를 떠나 아주 내적인 개인적인 인간관계를 이 그림에서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로 가까이 앉아있는 이 두 여인은 서로 엇비슷해보이지만 사실 대양만큼이나 넓은 간격이 그 사이에 존재한다. 보이지 않는... 다른 꿈과 현실을 가진 두 여인이다. 동상이몽이라 할까?


원래 이 그림은 베크만이 그의 친구인 '게오르그 스바르젠스키(Georg Swarzenski)'의 부인을 그리려 했다. 그러나 베크만은 엉큼하게 그리고 용기있게 스바르젠스키의 내연녀인 카롤라 네터(Carola Netter)도 이 그림 속에 그려넣었다. 물론 그들의 애매하고 불편한 관계를 생각해서 따로 만나 서로 다른 시간대에 각 모델을 앉혀 놓고 그린 것이다. 그래서 이 그림은 '더블 초상화'가 되어버렸다. 물론 이 그림이 완성되자 당시 독일문화계의 권력자로 프랑크푸르트의 스태델 박물관(갤러리) 관장이었던 스바르젠스키 자신은 이 그림을 세상에 안보여주려 애썼다. 특히 아내의 눈에 들어가지 못하게 기를 썼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답은 뻔하다. 전쟁을 피하려는 전쟁 원인제공자의 평화을 위한 몸부림이었을까? 또 그의 아내는 마침내 이 그림을 보았을까?


"내 목적은 현실을 화폭에 옮겨 놓는 것이다-가시적인 것을 비-가시적으로의 전환은 현실을 통해서 온다. 내 생각으론 예술에서 중요한 것은... 존재의 깊은 신비로부터 발생하는 그 느낌으로부터 온다. 자기-각성은 객관적 정신의 욕망이다. 이것이 내 삶과 예술에서 찾고 있는 바로 그 자아이다.(My aim is to transfer this reality into painting - to make the visible invisible through reality. In my opinion all important things in art...have always originated from the deepest feeling about the mystery of Being. Self-realization is the urge of all objective spirits. It is this self that I am searching in my life and in my art …)"


베크만은 나찌에 의해 핍박받고 미국으로 건너 갔다. 인간성의 물리적, 그리고 정신적 파괴는 비록 2차 세계대전같은 전쟁뿐 아니라 인간존재의 신비를 망각하는데서 오는 것이라 그는 믿었다. 그의 이런 각성은 2차대전을 생생히 목격하며 인간세계의 선과 악을 톡톡히 경험했기 때문이었으리라.


“...일체 그 자체이신 하느님은 위대하고 영원히 변화하는 인간세계의 드라마를 끊임없이 창조하시는 분이며 이 분을 난 본다(... I see God as a unity creating again and again a great and eternally changing terrestrial drama).”(참조 2)


무거운 삶의 짐에서 오는 무시못할 감정의 소용돌이를 베크만은 담담히 이 두 여인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한 사람은 '정실'이요 다른 이는 숨겨둔 '정부'이다. 한 여인은 외적으로 드러내 보이는 본처이고 다른 여인은 꼭꼭 숨겨두고 드러내지 않으려는 내연녀다. 한 여인은 합법적이고 다른 여인은 윤리적으로 불법이다. 한 남자를 사이에 두고 벌어지는 TV 연속극같은 막장 인생드라마를 이 이중의 초상화에 베크만은 담았다. 그 주연 남우는 이 초상화에 없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그 남자주연 때문에 이 두 여인은 여기 나란히(끌려와?) 앉아있다. 더블(Double), 즉 이중은 이 두 여인의 이중이 아니라 눈으로 안보이는 그 불편함의 원인제공자를 암시하며 비가시적이지만 충분히 가시적인, 베크만의 친한 친구이자 갤러리의 영향력있는 문화인이고 사회저명인사인 스바르젠스키이다. '이중(double)'은 바로 스바르젠스키의 이중적 자아(The Self)이며 이 두 여인을 통해 표현되고 있다. 베크만의 말처럼 현실에 존재하고 영향을 미치지만(가시적), 그 주인공은 여기 없다(비-가시적). 이중적인 남자, 권력자, 지배자, 위선자의 모습인 이 비-가시적 인물은 가시적인 두 여인을 통해 드러난다. 스바르젠스키는 물론 이 두 여인 모두에게 '사랑해'를 달콤하게 속삭였을 것이다. 이 두 여인의 비슷하면서도 서로 다른 모습. 그 속내를 몰래 훔쳐보면 질투와 분노, 배신과 증오, 사랑과 연민이 속속들이 다 보인다. 감추어둔 내면의 폭탄이 방아쇠만 당기면 금방 폭발해 화약고로 변할 것이다. 그래서 남녀관계와 인간관계에서 올수 있는 모든 가능성이 이 그림안에 도사리고 있으며 썩어 고인 물처럼 슬슬 베어나오기에 이중이 아닐까? 질투와 분노, 믿음과 배신으로 전쟁이란 참사가 두 사람사이에서 시작될수 있다는 암시라 떠올리면 언뜻 공포의 전율이 몰려와 그림에서 눈을 떼게 된다. 옛날 한국의 남편이 몰래 첩을 둔것이 발각되자, 어린 아이는 등에 업고 큰 아이는 걷게하며 못된 첩의 집에 들이 내리닥쳤던 그런 분노의 본처가 아니다. 대면하지 말아야 할 두 여인이 대면해 서로의 머리카락을 붙잡고 싸우는 붉은 혈기도 여긴 없다. 다만 두 여인의 뺨위로 흐르는 붉은 기가  이들의 속내를 그대로 대변해줄 뿐이다. 대체로 그림속의 두 유럽 여인은 그저 조용히 침묵하며 앉아있기에 관람를 더 불편하게 한다. 소리라도 꽥꽥 지르지 하는 생각도 든다. 베크만은 두 여인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tension)은 숨겨두었다, 숨겨둔 내연녀처럼. 다시 이중적이다. 양과 음이 아닌 조화될 수 없는 존재의 긴장감을 화가는 의도적으로 창조해 그려넣은 것이다. 이는 숨어있던 내연녀를 그림속에 등장시킴으로 긴장을 촉발시킨 것이다. 화가가 그 범인이다. 그가 말한데로 이젠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적으로 만들어 놓았다. 우리 모두가 가진 보편적 인간성이란 본연의 측면에서 이 더블 초상화를 다시 보자. 혹시 여기 베크만 자신의, 이 초상화를 창조한 화가의, 이중성의 긴장을,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중성의 긴장을 여기 대입해 볼수 있는게 아닐까? 그래서 우린 이 그림을 보며 이해는 하지만 잔뜩 불편해지는 건 아닐까? 그 긴장은 폭발하기전의 긴장이며 이는 이 두 여인의 홍조띤 얼굴과 꼭 다문 입을 통해 보여지는 결연한 의지에서 우리는 우리 삶의 '잔혹한 인간관계의 현실적 증거(a testament to the cruel realities of human relationship)'를 여기서 읽을 수 있다.


그래서 막스 베크만이 생각하는 화가임을 이 더블 초상화에서 발견한다. 끊임없이 그는 '나는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같은 답이없는 질문을 자신에게 던졌을 것이다. 그런 철학적 질문은 끊임없이 그를 괴롭혔고 고통을 주었다. 그래서 그가 그린 많은 이들의 초상화에선 바로 이 '답없는 골치아픈 질문들'을 던지기에 우리 자신의 고뇌를 거울처럼 볼수 있다. 이 더블 초상화는 바로 우리들의 자화상인 것이다. 어슬프고 짧은 윤리란 '잣대'로 잰다면 이 그림은 제대로 감상할 수 없다. 거울을 봐도 '페르소나(마스크)'를 뒤집어 쓴 모습만 보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림:

Max Beckmann (German, 1884 - 1950)

Double Portrait of Frau Swarzenski and Carola Netter 1923

oil on canvas 80.3 x 65 cm

Städel Museum, Frankfurt, Germany


참조: Herschel B. Chipp, Theories of Modern Art: A Source Book by Artists and Critics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68), 188-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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