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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 율리시즈 Aug 21. 2019

내 눈에서 허영의 비늘이 떨어지는 그 날...

속물들의 삶과 멘탈리티 :  런던 에세이-아침

'허영의 시장'


우리는 모두 '허영'이란 시장에서 살고 있을까?

답은 그렇다 이다.

알고나면 껍데기 뿐인 허영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며 아둥바둥 복작대는 인간들을 그린 소설이 있다.

'허영의 시장(Vanity Fair)'은 영국 작가 윌리엄 새커리(William Makepeace Thackeray)가 1847년과 1848년 사이 연재한 소설이다. 제목이 그대로 말해주듯 인간군상들이 이 허영(Vanity) 가득세계에서 살아가는 것을 풍자한 소설이다. 원  제목은 '천로역정'의 순례자가 거치는 장소의 이름에서 따왔다. 정확히는, 허영을 허영으로 깨닫지 못하고, 허영으로 치장하며, 허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다룬 것이다. 비록 소설배경은 한 세대 전인 나폴레옹 전쟁 전지만 당시 영국 빅토리아시대의 사회를 통렬하게 풍자한 소설이기도 하다. 소설 집필당시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의 중심에서 살아가는 영국 사람들이지만 이 세계속에서 아둥바둥 뜬구름같은 허영(Vanity)을 망하고 이를 잡기위해 고군분투하는 속물들을 소설가는 현실감있게 그려내었다. 한가지 중요한 것은 성인군자나 도덕군자는 이 소설엔 없다. 주인공들을 비롯해 많은 등장인물 중 누구 하나 허물없는 사람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척"하는 사람들은 있다.

그래서 이 소설의 부제목이 '영웅없는 소설(A Novel without a Hero)'이라고 까지 붙였을까? 심지어 그 중에 그래도 선하다고 여겨지는 등장인물 중 한 사람인 도빈(Dobbin)까지도 아멜리아에 대한 그의 집착 오히려 허영으로 비춰진다. 물론 주인공인 베키 샤프의 물질적 부에 대한 집착과 상류사회로의 진출, 그리고 그 계층과 그룹에 어울리며 속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 끈질긴 노력을 하는, 그래서 오히려 불쌍하고 부질없어 보이는 그녀의 애착과 집념이 덧없는 '허영'임을 이 소설 분명히 독자들에게 인식시킨다. 하긴 요즘같은 세상에선 이 허영에 대한 집착은 오히려 장려되고 칭찬받으며, 성공하고 나면 지나쳐 온 그 과정이 비록 속물적이더라도 칭송받는 시대가 되었다. 그래서 지금 세상이 소설보다 더 허영의 시장이 되었다. 최대 호황이었며 세계를 주도한, 그래서 영국의 전성기였던 빅토리아 시대 때, 날카로운 풍자의 칼로 현실을 난도질하던, 곧 사라질 아지랭이같은 '허영'을 쫒으며 살아가는 인간군상을 한껏 비웃어버린 새커리의 고도의 풍자술은 다시금 우리 사회를 돌아보게 만든다.

그럼 과연 허영의 시장에 등장하는 '허영'이란 무엇일까? 옥스퍼드 사전에선 여러가지 형태의 허영을 말해준다. 물질적 부만 허영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도 물론 포함다. 일반적으로 '어떤 것에 대한 지나친 집착(the form of excessive love)'이 허영이다. 도넘은 재물욕, 명예욕 그리고 권력욕 등은 허영의 대표적인 형태이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과시욕, 특히 학벌욕도 허영의 한 부류이다. 이 허영의 본질은 덧없고 허무하며 어느날 연기처럼 사라지는(ephemeral) 오묘한 것이다. 문제는 이 사라질 허상을 허영으로 직시 못하고 이 허상을 좇아 따라 다니는 인간들이다. '허영의 시장' 소설속 인간들처럼 말이다. 허파에 바람이 찬것보다 더 병적인, 마음에 허영이 가득찬 그래서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어떻게 보면 다들 눈떤 장님들이고, 소설 첫머리에 나오듯, 허영의 헛바람이 들어 대중인 관객에겐 보이지 않는 줄로 움직여지는 무대의 꼭두각시들이다. 진리(Truth)를 보지 못하는 눈떤 장님들이 아둥바둥하는 곳 바로 곳이 바로 허영의 시장이다.

'사도 바오로'가 다마스커스로 가는 도중 우수수 눈에서 떨어져 내렸던 비늘도 다름아닌 이 '허영'이었다. 자신이 믿었던, 또 그게 진리라 철저하게 믿고 따르고 실천했던 그만의 '정의'가 이렇게 가을날  낙엽처럼 떨어지고 말았다. 자연의 순리이다. 선이 악을 이기는 '순리'고 순풍이 불면 떨어지는 낙엽의 '순리'다. 그의 삶의 여정에서 묻었던 더러운 때와 먼지가 파워샤워기의 힘찬 정화의 물로 씻겨 내려가는 경험을 그는 치렀다. 육체만이 아닌 영혼의 씻김굿이었다. 이 허영을 씻어 낸, 즉 정화의 세례를 치른 후 남은 건 인간 본연의 모습 그대로 였다. '하느님의 모상'이 거기 사막위에 서있었다. 제 2의 탄생이며 거듭남이었다. 허영을 벗어버린… 그 순간, 이 허영의 비늘이 눈에서 떨어지는 순간, 그는 진리를 바로 직시할 수 있었다. 이제 진리를 관통할 수 있는 시력이 그에게 주어졌기에 그는 육백만불의 사나이보다 더 선명하고 더 멀리 내다보는 초롱초롱한 내면의 ''을 지닌, 이제는 사울이 아닌, 사도 바오로가 되었다. 이름뿐 아니라 마음까지 개과천선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 세상 어디라도 갈 용기를 지니게 된 그였다. 그 전엔 그도 이 '종교적 허영'이란 비늘로 눈이 가려져 헛것을 자주 보았고 심지어 사람죽이는 일(성 스테파노의 순교)까지 거들었던 죄인이었다. 종교적 허영은 아무 의미없는(inevitably worthless things) 허무로 공중에 사라져 버렸다. 이젠 과거라고 당당히 밝히는 심자가 된 사도 바오로였다. 허영의 비늘을 벗겨낸 사도 바오로는 자신의 과거가 "헛되고 헛되다(Vanity of vanities)는 사실을 성지 예루살렘이 아닌 메마른 사막에서 깨달았다.

구약성서의 전도서는 더 직설적이다. 아예 첫구절부터 모두가 헛되다고, 그것도 히브리 강조법으로 말한다.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게 헛되도다!
Vanity of vanities! All is vanity. 전도서 1: 2".

가끔 "살면 얼마나 산다고…" 우리는 토로한다. 지나고 나면 온통 허물인 것을 깨닫는 '사토리(각성)'의 순간이기도 하다. 한편, " 세상에 허물없는 이가 그 누가 있으리요" 하며 자조하기도 한다. "털어 먼지나지 않는 사람 있을까?"  같은 말도 상대방을 이해배려하기보다 사실 자신 스스로 위로하기 위한 말이다. 새커리의 '허영의 시장'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처럼 허물을 우리 모두는 입고 있다. 그러나 그 허물의 두께와 접착정도엔 엄연히 차이가 있고 등급도 있다. 스마트폰의 두께가 얇은 것을 고집하듯 허물의 두께도 얇은 것이 좋겠다. 허영의 비늘이 강력접착제로 다닥다닥 우리 눈에 붙어 있는 한 진리를 보기란 힘들다. 그래서 집착이 강하면 강할 수록 그 허영이란 허물도 두꺼워 진다. 불교적이다. 그래서 집착을 없애라고 불교는 매번 강조하지 않는가?

나라가 온통 시끄럽다. 멀리 이곳까지 허영의 시장에서 인간군상들이 피워 올리는 소란은 크게 들려온다. 소음으로… 경제정의니 사회정의를 외치던 허영으로 가득찬 거짓 예언자들 외치는 소리는 바로 이 소음이었다. 귀를 멍멍하게 하는 소음이고 코를 감싸쥐게 만드는 공해다. 그게 소음인걸 깨달은 뒤엔 허탈감과 공허함이 밀려온다. 허영을 좆아 이리저리 헤메며 방향감각을 잃은 시장사람들의 고함소리, 그 공허한 외침들… 법무장관 지명자의 이중적이고 허영을 두루감은 삶은 이 허영의 시장통 중심에서 그 소음을 한층 더 확대증폭시킨다. 누군지도 몰랐던 이 시장광대가 학문이니 학벌이니 정의니 개혁이니 하며 신문의 헤드라인에 가끔 등장하더니 이젠 세상사람들이 다 아는 인물이 되어버렸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신문이 친절하게 다 알려주는 그의 학벌이나 지체높은 직함도 사실 허영의 산물다. 이 사라질 허영을 그에게 둘러 입혀 교묘히 공중부양 시켜준 것은 허영의 시장에서 여론을 주도하는 메스콤이었다. 대중들 또한 이 공중부양된 속물의 허영을 우러러 쳐다보았다. 심지어 많은 이들은 이 허상을 졸졸졸 따르며 더 높이 더 화려한 허영으로 장식하고 치장해 버렸다. 거기에다 '허영의 시장' 소설처럼 이 허영에 사로잡혀  서로 '허영의 연줄(networking)'부여잡기위해 얼마나 아우성을 쳐댔을까? 단테의 지옥편이 슬슬 떠오른다. 속으로는 이 연줄에 목을 메자식에 대한 집착을 부모사랑으로 슬쩍 바꿔치기해대는 수법하며, '허영의 연줄'을 교묘히 이용 얼마나 속물의 삶을 살았을까? 자식의 미래라는 허영 그 미명아래... 가련하다 해야할까? 한심하다 해야 할까?겉으로는 사회정의니, 경제정의니, 개혁이니 하며 허영의 솜사탕을 부풀리는 바람을 날려댔을까?그 솜사탕을 사먹은 시장의 대중들은 또다시 텅빈 공허한 가슴으로 남겨졌다. 속빈강정들인 '속물'들은 이 소설속 뿐 아니라 우리 사회에 많다. 그 속물들은 허영으로 장식한 자신의 이력에다 또 다른 허상에 집착하여 심지어 사회의 세력권 중심으로 허영의 연줄을 거미줄처럼 만들었다. 이렇게 허영은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고 진화하며 이 허영의 욕망이란 무한정(limitless)것이다. 사회적 정의니 경제적 정의니 하는 사탕발림으로 대중들의 입맛을 버려놓은 것도 사실 이 속물들의 허영이었다. 솜사탕의 맛에 취하면 미셸린 스타 레스토랑의 음식맛을 제대로 못본다. 굳어진 혀 때문이고 일차원적인 단맛때문이다. 이걸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마르쿠제는 지독히 염려했다.


허영의 본질이 헛것, 즉 허상이니 이 허상이 사라지는 어느날 잠복된 진리는 드러나게 마련이다. 성서에서도 진리가 온전한 백성을 자유롭게 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또 성서에선 진짜 예언자와 가짜 예언자를 구분하라고 말한다. 요리조리 말한 번드러지게하는 거짓 예언자들은 성서의 세계에도 많이 있었다. 물론 우리 사는 세상에도 많다. 우리는 그 중 몇명을 최근에 본 것이다. 허영의 시장 군중들은 이 번드러러한 말솜씨에 유혹된다. 그것은 그만큼 정의에 목말라하기 때문이다. 결국 어느날 군중들이 이게 허영이었구나 깨달았을 땐 심리적 허탈감과 더불어 정서적 공허함까지 감당해야 한다. 억과 억 오고가는, 변명과 또다른 변명이 교차하는, 법과 위법을 교묘히 왕래하는, 보이는 부동산과 숨겨놓은 주식과 채권이 맞교환되는 이 허영의 시장에서 그동안 군중들이 보지못했던 더 크고 더 화려, 대한민국 푸른 하늘높이 공중부양된 실로 파괴적인 허영의 폭발에 귀가 먹먹해 환호성이 아닌 좌절과 허탈감이 화산재가 되어 대중들 가슴에 내리 쌓였다. 이게 허영의 본질이고 결말이다. 속물들은 왜 그걸 모를까? 헛되고 헛된 허영의 결말은 이렇듯 툭툭 땅에 떨어진 허영의 껍데기를 슬프게 내려다 보는 일이다. 이브를 속였던 뱀의 허물처럼 벗겨진 껍데기는 한때 군중들이 우러러보던 공중부양된 "환상(fantasy)"이었다.

이 새커리의 소설에서 놓치지 말아야하는 또다른 중요한 관점은 죽음(Death)이다. 헛된 허영에 매몰돼 살아가다 결국 죽음을 맞게되는 것이다. 새커리는 마틸다(Matilda)의 재산과 그녀의 육체적 병을 잘 대비시킨다. 그녀의 재산 즉 허영으로 은유되는 물질적 부는 이제 그녀의 관을 덮는 천(pall)이 된다. 영국의 장례식에서 관 위를 덮거나 관 위에 올리는 것을 'Pall' 이라고 한다. 또 그리스도인의 장례식엔 상징적으로 십자가를 올려놓는다. 죽음 뒤 허무한 관위에 무엇을 올리든 그게 무슨 대수일까마는 이를 삶과 대비해 봄으로, 살아있는 동안 곧 바람에 흩어질 뜬구름을 쫓아가며 허비하는 삶은 바로 이 허영에서 비롯됨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살면 얼마나 산다고…' '천년만년 살것도 아닌데...' 하는 말은 결코 자조적이고 허무주의적인 말이 아니다. 잘못 살다가는 죽어서도 신문지상에 결코 좋지않은 일로 오르게 된다. 혹은 잘못 가르친 자식들땜에 죽은 뒤에도 메스콤에 이름석자 올리게 될지 모른다. 어렵다. 결코 남일이 아니다. 정신차리고 이게 헛된 허영인지 아닌지, 곧 사라질 허상인지 아닌지, 진실된 속인지 공허한 껍데기인지 구별하는 지혜가 필요하지 않을까? 물론 이 소설이 꼭 교훈적이고 윤리적인 걸 지향한 건 아니지만 이 지혜는 새커리의 소설에 등장하는 속물들의 재산이나 신분계층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또 썩은 속물들이 지향하는 교묘하게 획득한 허영의 학벌, 남이 우러러보는 명함속 직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억억'으로 발음되는 교묘히 숨겨둔 허영의 재산에서 나오는 것은 더더구나 아니다. 사도 바오로의 체험에서 처럼 이 허영의 비늘이 속물들의 눈에서 우수수 떨어지는 어느 가을날, 인생을 마감하는 어느 선선한 계절에, 그들은 세상을 다시 보게 될 것이다. 허영이 아닌 진리를…

혹시 그땐 너무 늦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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