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풍처럼 에워산 산 중앙에 성당이 세워졌다. 순례자들이, 특히 쿠바인들이 가장 많이 찾는 성지이다. 이 성당에 3명의 교황님들이 방문했으니 그 중요성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다음 날 우리는 일찍 호텔을 출발해 이 도시에서 그리 멀지않은 쿠바인에게는 가장 성스러운 성지로 갔다. 쿠바의 수호성인인 ‘자선의 성모님(Our Lady of Charity), 또는 코브레 성모님(Our Lady of Cobre)’을 모신 성당은 주위의 산(Sierra Maestra mountains)이 병풍처럼 펼쳐진 중앙들판의 언덕위에 서있었다. 풍수를 전혀 모르지만 이 성당언덕의 위치는 풍수상 최고의 위치라고 생각됐다. 성당은 은은한 아이보리 색깔이었고 성당 꼭대기는 빨간색 돔으로 장식되어서 멀리서 바라보면 중앙의 성당과 병풍처럼 에워산 배경의 산들이 뚜렷이 구별되며 조화를 이뤘다. 이 멋진 풍경이 가장 잘보이는 곳에서 코치는 멈췄고 가이드가 일러준 말에따라 우리 순례자들은 해바라기를 비롯해 노란 꽃으로 장식한 화환을 성당에 봉헌하기 위해 샀다. 이곳에선 성모님께 노란꽃을 바치는 풍습이 있다고했다. 영국에서 이 멀리까지 찾아온 순례자들은 화환을 쥐고 모두들 환한 미소를 짓고 놓칠수 없는 이 풍경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이 자선의 성모님은 쿠바의 주보성인이시다. 내려오는 전통에 의하면 두명의 아메리칸 인디언 노동자와 10살 정도되는 한명의 아프리카 노예 소년이 배를 타고 소금을 찾으러 바닷가 해안을 뒤적일 때 갑자기 거센 풍랑을 만났다고 한다. 몇시간 동안 죽을 힘을 다해 배를 저어 뭍으로 나오려했지만 헛수고였다. 그때 이들은 성모님께 도와달라 기도를 올렸고 잠시후 기적처럼 풍랑이 멎고 바다는 잠잠해졌다. 정신을 차리고 눈을 돌려 사방을 보니 저 멀리 뭔가 둥둥 떠있는 물체가 보였다. 노를 저어 가까이 가보니 이 성모상이 있었던 것이다. 이 사건이 1614년에 일어났으니 이 성모상은 400년도 넘은 것이다. 가톨릭 교회에서 성모상을 자세히 조사를 해보니 ‘나는 자선의 성모이다(I am the Virgin of Charity.)’라 새겨져 있었다. 발견될 당시 성모상의 옷은 하나도 젖지 않아 이 두명의 인디오와 아프리카 소년은 놀랐다고 전해진다. 이후 이 ‘자선의 성모님’은 쿠바의 주보성인으로 공표되어 쿠바인들의 사랑을 아직까지도 받고있는 것이다.
계단을 오르자 성당 정문이 나왔다.
여기 오기전에 유튜브를 통해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이곳 방문을 보았는데 스크린 속에서 교황님을 안내하시던 바로 그 낯익은(?) 신부님이 성당 문앞에 바로계셨다. 설마? 내가왔다고 서계실까? 잠시 착각도 했다. 인사를 드리고 예약한 미사시간을 알아보니 이 성당에선 이미 예약이 되어있어 가까운 신학교 성당에서 미사를 할 수 있다고 했다. 400년을 넘긴 성당 제대 뒤 높은 곳에 안치된 성모상은 팔에 아기예수를 안고있는 모습(그래서 성 모자상도 된다)이었고 겨우 35cm정도밖에 되지 않은 작은 성상이었다. 그러나 이 유리 상자안에 모셔진 성모상은 쿠바인들이 가장 많이 찾고 기도를 올리는 곳이다. 이미 제대앞에는 순례자들이 봉헌한 많은 노란 화환과 꽃들이 플라스틱 양동이 가득 담겨 놓여있었다. 금색의 로얄 가운을 걸치고 아기예수를 안으신 자선의 성모상은 발아래 초승달을 밟고 계셨다. 1954년에 노벨 문학상을 탄, 쿠바와 연관이 많고 여기서 오래 산, 미국작가 헤밍웨이가 노벨 문학상 메달을 쿠바인들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이 성모상 앞에 바쳤다고 한다. 그가 쓴 걸작 ‘노인과 바다’에서 노인은 물론 쿠바인 어부이다. 1998년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금관을 성모상위에 봉헌했고 그의 후임 베네딕트 16세도 2012년에 400주년 기념을 위해 이곳을 찾았다. 물론 최근에 그의 후임인 프란치스코 교황도 여길 찾았다. 그러니 최근 삼대 교황이 모두 여길 방문한 것이다. 그만큼 중요한 성지이고 쿠바의 주보성인인 이 성모님은 쿠바의 상징이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공산주의의 추운 겨울도 거의 이겨냈으니 쿠바인들의 성모신심 신앙은 어떤 환경에도 결코 약해지지 않은 것같다.
성당을 둘러보고 시간이 되어 신학교로 갔다. 가까운 거리지만 노인 신자분들이 계서서 우리는 코치를 타고 도착했는데 코치에 내려 정원을 지나자 두 신부님이 벤치에 앉아계시다가 나와 우리 신자들을 보자 반가히 맞아 주셨다. 한 분은 쿠바 신부님이고 다른 분은 스페인 신부님이셨다. 언제 준비를 하셨는지 거의 80세 고령의 신부님이 오래된 카메라를 꺼내시곤 같이 사진을 찍자고 하셨다. 우리는 신학교를 배경삼아 활짝 웃으며 사진을 찍었다. 이런 산속에서 사시니 다들 순수한 마음을 간직하신가 보다. 미사를 신학교에서 마치고 다시 성당으로 오니 성당안에선 미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성당안은 순례자들로 꽉찼고 가만히 보니 신학교에서 보았던 두 신부님이 미사를 집전하고 계셨다. 영어를 두분 다 못하셔서 듣고싶었던 쿠바와 가톨릭 교회의 실정을 들을 수 없었어 안타까웠다. 대신에 가이드로부터 여러 이야기들을 들었다. 수많은 순례자들이 노란꽃 화환을 들고 성당앞 계단을 올라오고 있었다. 공산주의도 인간본성(Human Nature)의 한 축인 인간이 ‘영성적 존재(Spiritual Being)’라는 사실을 말살시킬수는 없었는가 보다.
한편으로 인간은 영성적 존재인 동시에 ‘생물학적 존재(Biological Being)’이다. 해가 중천에 이글거리며 성당과 주위의 산을 태울 무렵 우리 순례자들은 자연히 배가 고팠다. 코치를 타고서 산티아고 시내로 들어왔다. 제 2의 도시인만큼 여느 큰 도시처럼 시내는 복잡했다. 더구나 옛 시가지는 도로가 도로가 아닌 골목이라 부를 만큼 우리나라 일차선 정도로 좁았다. 그러나 오래된 도시인 만큼 매력적인 면이 곳곳에 숨어있었다. 우리는 시내 대성당 광장에 갔다. 여긴 혁명의 이야기와 전설이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곳이라고 했다. 불행히 대성당은 보수중이라 안에 들어가질 못했다. 성당 왼편에 유명한 호텔이 아직도 문을 열고 있었고 광장을 가로질러 보면 거기에 조그만 베란다가 위층에 튀어나와 있었다. 바로 거기서 피델 카스트로가 으레 그 군복을 입고 서서 광장에 모여 환호하는 군중들에게 답례했다고 가이드는 설명했다. 한낮의 뙤약볕 밑이라, 혁명이고 뭐고 모두들 배도 고프고 목도 말랐다. 다시 코치에 올라 예약해둔 레스토랑으로 이동했다. 이동 중에 영국에서 잘 알려진 ‘바카르디’라는 술이 여기에서 탄생했고 옛 주인의 집과 증류장이라고 가이드가 설명했지만 안중에도 없었다. 레스토랑은 또다른 광장의 한 구석에 있었다. 이름은 ‘산티아고 클럽’이었고 한쪽 벽 전체를 산티아고 출신 음악가들의 이름과 사진을 도배해 놓았다. 쿠바인들은 음악이 일상생활인 것 같았다. 어디에고 음악소리가 들려왔다. 레스토랑 바로 앞 광장 나무 그늘에선 대여섯명의 거리 음악사들이 기타반주에 노래를 부르며 지나는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고 있었다.아, 인간은 또 예술적 존재이지! 쿠바는 이렇게 인간을 다각도로 조명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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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교 안 정원
성당 내부
신학교 소성당
산티아고 광장 뮤지션들. 항상 흥겨움을 선사했다. 동전 몇잎 땅그랑으로 이런 즐거움을 얻는 것은 여행의 별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