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광장의 마차. 서서 기다리는 말에게 좀 앉아라고 했다. 말이 통할 리 없었다. 눈만 끔뻑이고 있었다. 착해 보였다.
산티아고 데 쿠바(Santiago de Cuba)에서 수도 하바나(Havana)로 가는 국내선을 타기위해 우리 일행은 간단한 빵으로 점심을 대신해 때우고 혹시나 싶어 안달이 나 정확히 오후 1시 즉 무려 비행기 출발 4시간 전에 공항에 도착했다. 산티아고 공항은 공항이라기 보다 우리나라 지방도시 고속버스 터미널 같았다. 무사히 체크인을 끝내고 검사대를 통과하기 위해 줄을 섰다. 줄이라고해야 한 50여명이 체크인하는 같은 대합실 안 다른쪽 문을 향해서 서 있었다. 그러나 30분이 지나도 줄은 별 줄어들지 않았다. 설마 그렇게 많지않은 인원인데 하며 또 30분이 시간이 지났다. 드디어 승객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웅성거렸지만 긴 줄은 빨리 줄어들지 않았다. 그러기를 또 삼십분이 지났다. 가끔식 열리는 문을 통해보니 짐을 검사하는 안전검사대가 딱 한대 뿐이었다. 문앞의 스테프는 열심히 왔다갔다 하였지만 줄은 별 줄지 않고 줄의 꼬리는 조금씩 늘어만 갔다. 우리 옆에는 프랑스인 가족들이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혹시하고 표를 비교해보니 그들은 오후 4시 비행기였고 우리는 5시 비행기였다. 지금 시간은 3시 40분. 알고보니 우리 뒤에는 대부분이 오후 4시 비행기 표였다. 다급했다. 사람들은 이제 큰 소리로 공항 직원들에게 사실을 호소했다 서너명의 제복을 입은 직원이 나와서 일을 거들었다. 4시 비행기표를 가진 이들을 우선 앞에 서게하고 우리 일행은 뒤에 섰다. 사실 우린 45명의 인원이기에 늦더라도 작은 비행기가 설마 뜨진 않겠지하는 베짱이 있었다. 이 공항의 시스템은 참으로 구식이고 효율적이지 못했다. 하기야 짐을 X-ray로 검사하는 기계가 한대뿐이니 오죽하겠는가. 그럼에도 공항직원들은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줬다(정말 미안할 만큼). 땀흘리며 왔다갔다를 반복했지만 검사대 한대로 뭘 어떻게 하겠는가. 겨우 검사대를 통과하고 웨이팅 룸에 바로 있는, A, B, C, D로 나누어진 몇 안되는 탑승 게이트를 보며 탑승을 기다렸다. 겨우 게이트 문이 열렸고 공항의 시멘트 바닥을 걸어 나가니 붉은 석양이 비행기 뒤로 지고 있었다.
하바나에 도착하니 늦은 저녁이었다. 비행기에 내려 우리 일행이 대합실로 가려는데 갑자기 문이 잠겼다. 일행중의 한명이 끙끙이며 문을 열었다. 공항 직원은 아무도 없었다. 짐을 찾는 콘베이어 벨트도 한대 밖에 없었다. 벌써 많은 이들이 앞서와 짐을 기다리며 웅성대고 있었다. 우리가 단체로 들이닥치자 작은 공간이 더욱 좁아졌다. 캐나다 단체 여행객이라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말했다. 할배 할매들이 많았다. 서너시간 전에 도착했어야 할 그들은 우리 바로 전에 도착했다고 한다. 모두들 지친 표정이었다. 그러나 누구하나 불평하거나 큰소리 내는 사람들이 없었다. 대부분 연세가 지긋한 분이셨는데도 웃고 떠들며 이것도 여행의 한 부분이라며 즐거운 분위기였다. 여유로왔다. 그 중의 한분이 나에게 캐나다의 상징인 빨간 ‘단풍(메이폴)’이 새겨운 뱃지를 자기 모자에서 빼 나의 가슴에 주었다. 그 모자에는 크고작은 수십개의 캐나다 국기 뱃지가 주렁주렁 매달려있었다. 쿠바에서 가장 많은 관광객인 그들은 다른 나라에 여행할 때와 마찬가지로 꼭 미국인이 아님을 여러가지 기묘한 방법을 동원해 표시한다. 억양도 비슷한 영어를 쓰는 이들이 미국에서 왔냐고 하면 약간 불쾌해 한다. 아예 모자나 베낭에는 캐나다 국기를 달고 ‘난 미국인이 아니야’를 표시낸다. 유럽 베낭여행을 하는 캐나다 젊은이들 대부분이 그렇다. 애국심일까? 아님 감당하기 힘든 덩치 큰 이웃을 둔 사이즈는 커지만 존재감없는 이웃의 자존심일까? 우리는 젊은 새 캐나다 수상, ‘트뤼도’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 기와 끼가 넘치는 수상이 캐나다를 더이상 부유하지만 ‘지루한(Boring)’ 나라가 아닌 새나라로 만들수 있을까 즉석 찬반 투표를했다. 반반이었다. 내가 보기엔 캐나다가 꼭 이런면만 지닌건 아니다. 몬트리올에 갔을때 그들은 캐나다의 용기를 두고두고 얘기했다. 그건 미국의 눈치에도 불구하고 쿠바와 관계를 유지한 이야기였다. 이들 캐나다인들은 이웃의 눈치에도 아랑곳않고 여기 피서를 와주었고 잘은 모르지만 그들이 쓴 돈은 쿠바 경제에 도움이 되었으리라. 그 돈으로 북한처럼 미사일 만들고 핵만들고 하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다. 물론 60년대 ‘쿠바 미사일 위기’를 빼곤 말이다.
그날 늦은 밤에야 하바나의 호텔에 겨우 도착했다. 모두들 지치고 피곤했다. 건데 잠은 이 오래된 호텔에서 자고 저녁식사는 약 100미터 걸어가야하는 다른 호텔로 예약이 되있어서 지친 몸을 끌고 그래도 여행중엔 잘먹어야 된다며 꾸역꾸역 그리로 저녁을 먹으로 갔다. 저녁뒤에 발견한 더 큰 문제는 한 15층되는 호텔에 엘리베이터가 달랑 두 대뿐이라는 사실이었고 더구나 한 대는 고장이 나 있었다. 자신이 제대로 끌수도 없을 만큼 짐을 많이 갖고다니시는 할매 신자들은 호텔 짐꾼들이 친절하게 일일이 위층으로 올려다 주었다. 기다리다 지쳐 호텔로비 소파에서 잠든 일행들도 있었다. 이래저래 호텔방으로 올라만 가는데만 30여분이 훌쩍지나갔다. 방에 다다르자 또 전기불이 켜지지 않았다. 가동중인 한 대뿐인 엘리베이트는 아직도 짐을 옮기는 직원들에 의해 ‘비상’상태로 되있었다. 13층이나 되는 계단을 내려가 리셉션에 불이 안들어 온다고 알렸다. 올라가서 기다리라고 했다. 계단을 올라갔다. ‘파김치’가 무슨 맛인지 알았다. 몸에는 땀냄새가 진동했다. 한 15분뒤에 직원이 방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방을 열고 열쇠에 달린 두꺼운 플라스틱 카드를 벽 스위치 뒤에 넣었더니 짜잔 불이 켜졌다. 아!... 이런줄 모르고. 13층까지 올라온 직원에게 미안해서 어쩔줄 몰랐다. 거저 고맙다고 했더니 항상 미소를 띠는 쿠바인답게 미소를 띠며 괜찮다고했다. 여기서 배운 놀라운 사실은 내색도 않고 땀흘리며 일하는 쿠바 사람들이었다. 시스템이 제대로 안 갖추어져 거기에 몇 십년을 맞추어 살다보니 저런 여유도 가졌다고 가이드는 설명했다. 급하고 뭔가 제대로 굴러가지 않으면 쉽게 짜증내고 안달하는 ‘나’를 이들은 제대로 교육시키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13층의 호텔에서 창밖으로 하바나의 아침을 감상했다. 호텔 위치때문인지 전망은 그렇게 좋은건 아니었다. 멀리 성당의 종탑이 여럿 보이고 쿠바에서 가장 높다는 우리나라의 주상복합 아파트처럼 너무도 어글리(ugly)한 빌딩도 보였다. 왜 우리나라는 보기에 밋밋한 성냥갑처럼 보링(boring)한 건물을 쌓아올리는지, 또 뭐가 좋다고 그 높은 곳에 살려하는지 이해가 안된다. 100미터를 걸어 다른 호텔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구역인 하바나의 구시가지에 있는 다섯개의 광장 중 하나인 ‘성당 광장(Plaza de la Catedral)’에 갔다. 아직 이른 아침이었다. 하바나의 바닷가에 인접한 곳이라 하바나 만 건너로 옛 성채도 보였다. 큰 도시인만큼 해안 도로도 길었고 운치도 있었다. 옛 선착장과 부두라고 특별히 펜스(Fence)를 친곳이 몇군데 있었다. 우리는 오래된 성당광장으로 걸어 들어갔다. 입구 오른쪽으로 바로크 식의 성당이 보였고 성당 양옆에는 종탑이 서있었다. 특이한 것은 두 종탑의 사이즈가 달랐다. 그래서 미학적으로 더 아름다웠다.
광장 주변은 옛 부유층의 집들이 빼곡 둘러서 있었고 지금은 호텔, 레스토랑, 카페등으로 변했다. 영화 ‘미션(Mission)’에서 로버트 드니로가 자기 동생과 칼싸움하던 그 집과 광장을 기억하는가. 그 영화속 배경과 무척이나 닮았다. 하기야 스페인식 건축과 광장 디자인이니 그럴수밖에. 그리 크지않은 광장이었지만 몇 백년된 건물로 둘러싸여 볼만했고 또 이를 보려 관광객들이 서서히 몰려들고 있었다. 이 광장은 원래 늪지대였으나 물을 다 빼내 매우고 광장을 만들고 주변에 건물들도 세웠다한다.
이 광장의 이름이 된 광장의 대성당은 예수회 선교사들이 오래된 성당터에 다시 1748년에 바로크 스타일로 이 성당(La Catedral de la Virgen María de la Concepción Inmaculada. 무염시태 성모님 대성당)을 재건축해 1777년에 완공했으며 쿠바의 11개 주교좌 성당중의 하나라고 한다. 아침 이른 시간이라 아직 계단위 성당문은 큰 열쇠로 굳게 잠겨있었다. 하지만 미사 예약을 했는데 지금쯤 신부님이나 사크리스탄(Sacristan)이 문을 열 시간임에도 한 20분이 지나갔다. 가이드는 쿠바타임이라고 했다. 약간 안달이 났다. 여기서 미사를 끝내고 둘러볼때도 많이 예약돼 있기 때문이다. 가이드는 이리저리 전화를 했고 성당 오른쪽 종탑을 지나 어디론가 사라졌다 한 오분후에 다시 나타나 모두들 그쪽으로 오라고 손짓을 했다. 우리는 우루루 해안도로쪽에 나있는 다른 문으로 해서 성당안으로 들어갔다. 거기에 경상도 말로 ‘난닝구(웃 속옷. 사실은 Running Shirts의 일본식 말)’만 걸친 60대 정도의 배가 불룩나온 쿠바 신부님이 우리를 환영했다. 난닝구만 걸친 소탈한 신부님을 보자 무례하다기 보다 웃음이 나왔다. 한여름에 집안에서 편안하게 입고 다녔던 그 난닝구를... 여기서 보다니. 가족들과 편안하게 난닝구만 걸치고 거실 바닥에 앉아 수박을 쪼개먹던 즐거운 기억이 떠올랐다. 갑자기 시원한 수박을 한입 깨문것처럼 성당안이 시원해졌다. 영어를 못하시지만 가이드의 통역으로 신부님으로부터 성당 역사를 들을 수 있었다. 역대 교황님들이 이 성당을 다녀가신 이야기도 빼놓지 않았다. 아직도 성당의 정문은 닫혀있어서 우리는 비교적 조용하게 성당안을 구경할수 있어서 좋았다. 나는 본 성당 옆에 딸려있는 채플에서 우리 그룹과 함께 미사를 드렸다.
이 성당의 왼편으로 난 길을 따라 조금만 가면 헤밍웨이 가 자주 들른 ‘선술집’이 나온다. 이름도 긴 ‘라 보데기타 델 메디오(La Bodeguita del Medio)란 이름의 선술집은 아침이라 문은 닫혀있었고 다만 외벽에 사람들이 빼곡하게(지저분하게) 쓴 낙서(graffiti)들이 보였다. 이곳에서 헤밍웨이는 ‘모히토(mojito)’라는 민트 잎과 레몬 한 조각을 얹은 술을 몇잔이고 마시며 취하곤 했다한다. 잠긴 문을 통해 안을 조사했다. 다른 바와 별 다름이 없었다. 취한 상태에서 헤밍웨이는 ‘무기여 잘있거라’나 ‘노인과 바다’를 구상했을까? 여기에서 소설의 아이디어가 나왔을까? 가까운 성당에 고백성사하러 가진 않았을까? 아침인데도 별 이상한 의문이 다 들었다. 술이 아니라 진한 쿠바 커피때문이라 위로했다. 하지만 이곳에서 모히또를 한잔만 마셔보고 싶었는데 ‘정말 정말’ 아쉬웠다. ‘다시 여기 와야지.’ ‘그때는 신자들 말고 혼자 몰래 와서 모지토 마셔봐야지’ 응큼한 상상도 했다. 여기 이 술집앞에서 헤밍웨이의 기운을 받아서 내 상상력이 제대로 발동되었나 보다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우린 다음 행선지인 ‘국립 회화 박물관(Museo Nacional de Bellas Artes)’으로 이동했다. 이 현대식 건물은 쿠바와 카리브해의 예술가뿐 아니라 많지는 않지만 세계의 다른 예술가들의 작품들도 함께 전시해 놓았다. 일주일 남짓 쿠바를 방문하고 있지만 항상 느끼는 것은 쿠바인들의 예술적 감각이 뛰어나다는 것이다. 물론 쿠바가 음악으로 유명하지만 소도시 ‘까마게이(Kamaguei)’에 갔을때 보았던 조각품들을 보며 이들의 천부적 미술적 감각을 조금이나 느낄수 있었다. 이 박물관에 전시된 쿠바 예술가들의 작품은 유럽 미술사조의 영향을 많이 받은 작품들이었고 찬절하게 어느 사조로부터 영향을 받았는지도 적어놓았다. 흥미를 끈 것은 이 유럽의 영향뿐 아니라 쿠바의 독특한 “섞임”의 문화적 상황을 반영한 작품들이었다. 사실 대부분의 쿠바 작품들이 그런것 같았고, 특히, 개인적으로, 흥미로왔던 것은 쿠바의 중국계 화가인 ‘위프레도 람(Wifredo Lam. 1902-1982)’의 작품들이었다.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화가의 이름이었다. 그러나 쿠바에선 거의 국민화가였다. 그는 아버지가 중국인이었고 어머니는 아프리카 콩고에서 온 노예와 뮬라토의 혼혈인이었다. 그는 쿠바의 유산, 특히 아프리카 전통과 쿠바 토종 그리고 유럽 전통을 섞은 약간은 어지러운 작품들을 그렸다. 마드리드와 파리에서 공부하고 그림을 그렸으며 미술사적으로 가장 활발했던 시기에 여러 미술사조에 영향을 받았으며 당대의 내노라하는 화가들, 달리, 피카소 부루통 등과도 교류했다고 한다. 또 이 나라의 유명한 화가인지라 방 전체를 그의 작품에 할애했다. 시간이 다 되어 다시 일층으로 내려왔다. 일층(Ground Floor)엔 악명 높은 쿠바 간첩단 사건의 인물들인 ‘쿠바 5인조(The Cuban Five)’를 기리기위해 한쪽에 미국 독방 감옥을 만들어 놓고 관람자들이 직접 독방을 체험해 보도록 하는 설치미술이 있었다. 관람자는 직접 죄수복을 입고 독방에 갇힐수 있다. 감옥 옆에는 쿠바 스파이 5인조에 대한 설명을 적은 안내서들과 의자들이 놓여있었다. 그 앞 벽에는 이 쿠바 간첩들과 카스트로가 같이 찍은 사진을 확대 전시해 놓았다. 미국에 대한 간첩행위로 마이에미에서 잡힌 이들은 정당한 재판을 못받았다고 전해지며 그들의 부인들이 미국에 입국하려했으나 비자발급을 해주지 않는 등 미국의 방해공작에 대한 글들을 영국에서 읽은 기억이 났다.
다음에 간 곳은 ‘샌 프란시스코 바실리카와 수도원(The basilica and the monastery of San Francisco de Asis)’이였다. 그전에 보았던 성당광장과 비슷하거나 약간 더 컸다. 이 수도원은 1580년에서 1591년 사이에 지어졌는데 원래는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쿠바 본원이었다. 그리고 1730년에 다시 바로크 스타일로 재단장을 했다고 한다. 이 수도원은 영국이 하바나를 잠시 지배할때 예배의 장소로 쓰였으나 다시 스페인으로 넘어오면서 더 이상 성당으로 쓰여지지는 않는다고 했다. 요즘은 콘서트 홀로 쓰여지며 연중 관광객이 드나들어 관광지로 꼭 가봐야 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비록 성당으로 쓰여지지 않으나 내부 구조나 성당 옆 수도원 뜰은 옛 수도원 그대로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 옆에 붙어있는 종탑은 138 feet에 이를 만큼 높았다. 원래는 성 프란치스코의 성상이 종탑위에 안치됐으나 1846년 사이클론(cyclone)에 의해 파손되었다고 했다. 대신에 성당 바로 밖 광장에는 후니페로 세라(Fray Junípero Serra) 수사가 인디오 화네뇨(Juaneño Indian) 소년과 함께 서있는 동상이 있었다. 관광객들로 붐비는 이 광장 한 구석엔 말이 끄는 마차가 관광객을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