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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 율리시즈 Jun 14. 2017

지옥은 어떤 곳입니까?

폴란드 여행 에세이-폴란드 아우슈비츠와 크라코프

2016년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아우슈비츠(Auschwitz)를 찾으셨다. 몇일 전 미사중 넘어지신 이 연세드신 노인이 한때 아비규환 생지옥이었던 이 마른 땅을 침묵하며 밟으셨다. 이곳에선 침묵외에 또다른 표현이 어디 있을까? 그리고 막시밀리안 콜베 성인이 갇히고 순교하신 바로 그 좁고 침침한 방에서 혼자 조용히 기도를 올리셨다. 바로 그 자리에 콜베 성인은 비쩍 마른 그의 왼팔을 스스로 올리며 죽음의 주사를 맞았다. 병원에서 일하면서 수없이 보아 온 치유의 주사가 아닌 죽음으로 이끄는 주사... 침묵안에서 교황님은 무슨 생각과 기도를 하셨을까? 듣기만해도 섬뜩섬뜩한 공포가 솟아 오르는 이 수용소에서 인간이 취할수 있는 가장 악랄한 모습에 기도하시다 치를 떨지나 않으셨을까?


난 2015년에 처음으로 이 ‘아우슈비츠’를 방문할 수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을 가스실로 실어 날랐던  그 악명높은 수용소 바로 앞의 녹슨 철로를 먼저 보았다. 우리나라 민통선의 철로는 다시 달리길 염원해야 하지만 이곳의 철로는 '절대 절대' 다시 달려서는 안되는 철로였다. 이곳에서 비명횡사한 막시밀리안 콜베 성인과 에디트 슈타인 성인도 자연히 떠올랐다.


콜베 성인(Maximilian Maria Kolbe.1894 –14 August 1941)은 폴란드 콘벤투알 프란치스코회 소속 사제였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성인은 항상 병약했다고 알려졌다. 그는 1906년, 그가 12살쯤에 경험한 성모님과의 기적적 만남(vision) 이후로 그의 삶은 오직 하나 신앙을 위해 살아가는 운명임을 느꼈다고 스스로 고백했다.


“바로 그날밤, 천주의 성모님께 장차 내가 뭐가 될지 물었죠. 그때 성모님은 하나는 붉고 하나는 흰, 두개의 왕관을 들고 제게 다가 오셨습니다. 성모님은 제게 기꺼이 두개의 왕관을 받겠느냐고 물으셨죠. 흰 왕관은  정결을 보존해야 하고 다른 붉은 왕관은 순교자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저는 기꺼이 이 두개의 왕관을 받겠노라고 말씀드렸습니다.

That night I asked the Mother of God what was to become of me. Then she came to me holding two crowns, one white, the other red. She asked me if I was willing to accept either of these crowns. The white one meant that I should persevere in purity, and the red that I should become a martyr. I said that I would accept them both.”(Armstrong, Regis J.; Peterson, Ingrid J. (2010). The Franciscan Tradition. Liturgical Press. p. 50.)


두 개의 왕관을 받기로 맹세한 그는 성년이 되어 프란치스코회의 회원이 되어 로마에서 공부하며 박사학위를 받았고 나중에 중국 상하이를 거쳐 일본 나가사키에 정착했다. 나가사키. 그렇다. 두번째로 원폭이 투하된 그 도시에선 가톨릭 신자가 많았다. 콜베 성인은 이곳에서  선교하시면서 부산에도 잠시 오셨다고 하는데(일제 시대때)사실인지 모르겠다. 이 나가사키에서 세운 수도원은 당시엔 이해안되는 그의 고집으로 나가사키 시내와 떨어진 산 반대방향에 지었다고 한다. 그래서 1945년 나가사키 원폭시에서도 아무런 피해가 없었다고 했다. 사람들은 성인이 이미 이 무시무시한 원폭투하 사실을 예견했다고도 한다.


2차대전이 일어나 독일군 점령하의 폴란드에서 그는 이곳 아우슈비츠에 끌려왔다. 성인은 이곳에서도 구타와 핍박을 받았었고 병원에도 자주 실려갔다고 한다. 당시 캠프에서 3명이 도주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캠프의 책임자가 더이상 도주자가 생긴 것에 대한 처벌과 방지의 수단으로 10명을 뽑아 지하 감옥에 가둬 굶겨죽이는 악랄한 지시하였다. 프란치스젝 교브니츠젝(Franciszek Gajowniczek)이라는 사람이 열명중 한명으로 뽑혔다. 그는  울부짖으며 그의 아내와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살려달라 애원하였다. 이에 콜베 성인은 서슴없이 이 사람대신 자원하여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때 같이 있은 실제 증인인 보조 문지기에 의하면 콜베 성인은 같이 있던 감방 사람들에게 항상 기도하자고 권했으며  감시병이 체크할때마다 그는 무릅을 꿇고 기도하고 있었다고 전한다. 2주간의 탈수후에도 아직 그는 생명을 연명하고 있었으며 끝내 이 감옥을 비워내야 할때 콜베 성인은 스스로 왼쪽 팔을 들어 ‘석탄산(carbolic acid)’이란 독약을 맞았다고 한다. 마지막까지도 힘없고 바짝 마른 팔을 들어 저항대신 기꺼이 주사를 맞았던 신앙은 그의 성모신심에서 나왔다고 그의 전기에 나와있다. 우연의 일치인지, 우리나라 광복절 4년전인, 1941년 8월 15일 ‘성모승천축일’에 지상의 그의 육체는 화장되었다고 한다.


‘석탄산’이란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이 독약이 아우슈비츠를 떠난 후에도 계속 머리속을 맴돌고 있었다. 아름다운 중세도시 폴란드의 ‘크라코프’를 혼자 거닐면서도 사람을 단번에 죽이는 이 약이 머리에 빙글빙글 회전하고 있었다. 아우슈비츠란 지옥을 갔다온 후유증이었다. 사람을 살리는 약도 있고 이렇게 사람을 죽이는 약도 있다. 그러나 아직 지옥이란 어떤 곳인지 감히 상상이 안됐다. 자기 아내와 아이들이 있다며 살려달라 울부짖은 그 남자분이 떠올랐다. 그분은 살 ‘권리’가 분명히 있었다. 얼마나 가족이 애탔으면 그렇게 할수밖에 없었을까? 우리 모두가 그랬을 것이다. 얼마나 죽음이 공포스러웠으면 그토록 몸부림을 쳤을까? 누가 그분을 감히 지명하랴. 죽음을 앞에 둔 그분이 느꼈을 공포가 다시 올라왔다. 콜베 성인은 거기서, 그 어두운 공포의 지옥에서 한줄기 빛이었다.


제자가 물었다.

“지옥이 어떤 곳입니까?”

스승이 답했다.

“한 조각의 희망이 없을 때 거기가 바로 지옥이지.”


아우슈비츠가 지옥이 아니었다고 감히 말 못하겠다. 그러나 거기엔 콜베 성인이 있었기에 또 애타는 가족을 그리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감히 지옥이 아니었다고도 하겠다.


아우슈비츠의 무거운 마음으로 크라코프 대성당을 방문했다. 어두운 내 마음과 다르게 눈물겹도록 이 성당은 밝고 아름다왔다. 어두운 마음으로 이 아름다움을, 이 성스러움을 즐기지 못했다. 인간은 이 아름다운 성당을 세웠고 또 인간들은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을 만들었다. 이해가 안됐다. 화려한 바로크 장식의 높은 제단을 바라보았다. 교황 요한 바오로 성인이 대주교로 있던 유서깊은 대성당이었다. 교황으로 선출되기 전 매일마다 그는 이곳에서 미사를 올렸을 것이다. 교황이 된후 3년뒤인 1982년에 콜베 순교자를 성인품에 올린 미사를 여기서 거행했었다. 대성당의 눈부신 화려함이 나에겐 오히려 불편했다. 밖으로 나와 크라코프 중세의 거리를 터덜터덜 걸었다. 대성당 광장에 또다른 성당이 있었다. 그리고 또 조금 걸어가자 다른 성당이 나타났다. 도대체 이 시내안에 몇개의 성당이 있는거야? 내치는데로 거리의 오른쪽 성당에 들어갔다. 피곤하기도 했다. 성당안은 내 마음과 같이 어두웠다. 한두명이 서성이며 기도하고 있었다. 조용히 걸으며 벽쪽에 붙은 경당(채플)들을 둘러봤다. 갑자기 콜베 성인이 나타났다. 이번엔 큰 폭의 그림으로 내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아우슈비츠의 화장장에서 사라진 성인이 이제 큰 그림으로 내 눈앞에 그렇게 서 있었다. 뜬금없이 한국의 부산에서 왔다고 성인에게 말했다. 사쿠라가 지천으로 핀 나가사키 항을 아직 기억나느냐고 물었다.


그리곤 아무 말도 못했다.

정적이 감돌았다.


아우슈비츠는 감히 물어볼수 없었다. 무릅꿇고 멍하니 성인을 쳐다보며 한동안 그렇게 있었다. 한참 후 용기내어 찬찬히 성인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수도복을 단정히 입은 성인의 모습이었다. 왼손을 가슴에 얹고 오른손은 손바닥이 밖으로 향해 나를 초청하는 듯했다. 그리고 핏기없고 병약한 안경낀 그의 얼굴을 올려 보았다. 배경엔 그가 입었던 아우슈비츠의 푸른 줄무늬 죄수복이 보이고 철조망이 있었다. 감히 물어보진 못했지만 아우슈비츠는 그의 배경에 그렇게 그를 감싸고 있었다. 고개를 아래로 다시 떨구었다. 아래 양쪽에는 성인이 12살때 경험했고 기꺼이 받아들인 두개의 왕관이 있었다. 하나는 붉고 하나는 흰 왕관이었다. 정결과 순교. 가만히 왼손을 들어 성인처럼 가슴에 손을 대어보았다.


‘난 제대로 살았나?’


갑자기 부끄러웠다. 그래서 도망치듯 성당 밖을 나왔다. 눈부신 햇살이 부셨다. 한줄기 희망의 빛이라도 있다면 거긴 지옥이 아닐수 있다는 말이 다시 떠올랐다.


(나중에 알았다. 내가 지쳐 방문했던 이 크라코프의 성당이 프란치스코회의 성당(St Francis of Assisi Church)이며 막시밀리안 콜베 성인이 이 성당에 살았으며 또 폴란드의 독립이 이루어지자 첫 미사를 여기서 올렸다는 사실을. 이건 그냥 우연일까? 혹시 성인이 나를 이리로 데려가질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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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베 성인의 성화(위 사진).

크라코프 시내 프란치스코회 성당에 걸려 있었다. 성인을 이곳에서 만날 줄은 생각도 못했다. 더구나 아우슈비츠를 다녀 온 뒤에 말이다. 엉성한 솜씨로 사진을 찍었지만 가끔 이 성화를 응시한다. 성인의 수의 번호도 읽어본다. 그리고 힘을 얻는다.


대성당 광장. 종탑에선 종을 울리고 있었다.
크라코프 성앞. 마차가 관광객을 태우고 구시가를 돈다.
성. 아름다운 성당이 이 안에 있었다.
시내의 조그만 채플.
무서버... 사실은 순해보인다.
광장.
또 광장.
크라코프의 거리에서 링처럼 생긴 브레드를 파는 노인들.
성당들이 너무 많아서 일일이 셀 수도 없었다.
아우슈비츠...
영국으로 돌아와서...런던의 웨스트민스트 사원의 현대 성인들. 맨 왼편이 콜베 성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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