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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 율리시즈 Jun 14. 2017

아우슈비츠의 겨울과 독일의 여름

아우슈비츠 여행 에세이-어두운 역사, 밝은 미래를 꿈꾸며

따뜻한 봄날에 본 아우슈비츠는 '악'을 빛으로 감추고 있었다.


2015년 여름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를 가면서 ‘아우슈비츠’를 거쳤다. 처음이었다. 우리 50명을 태운 코치(Coach)안에서 가이드가 곧 이 악명높은 수용소가 가까와 온다고 하자 마음이 점차 무거워져 옴을 느꼈다. 차 안에선 정적이 감돌았다. 창밖으론 4월의 싱그러운 폴란드의 봄이었다. 이 봄기운이 아우슈비츠가 가까워 오는 코치안에선 없었다.

아우슈비츠.

이름만 들어도 무시무시한 그 곳으로 갔다.
수없이 말로 들은 그 곳.
사진이나 영화로 본 그 곳.
‘악(Evil)’의 대명사.

줄무늬 푸른 죄수복을 입은 깡마른 유대인들이 긴 줄을 이루며 서있던 그 지옥. 침침한 캠프의 전구아래 다들 힘없이 움푹 패인 쾡한 눈으로 곧 다가올 죽음을 예견하듯 허공을 응시하던 수많은 눈동자들과 일렬로 죽 늘어선 벙커침대. 그리고 독일군 병사들이 총을 겨누며 보초서던 높다란 초소들. 머리속에 깊숙히 잠복되어있던 이미지들이 영화의 플라쉬백(flashback)처럼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했다. 이렇게 화창한 봄날에 아우슈비츠의 비극을 떠올리기엔 무리일수도 있지만 머리 깊숙히 각인된 그 어두운 이미지들은 좀체 사라지지 않았고 머리속에서 연기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난 잠시 우울증에 걸린 환자가 되었다.
그때 갑자기 코치 앞자리에 앉은 가이드가 마이크에 대고 소릴 냅다 질렀다.
“다들 오른쪽을 보세요!”

코치의 오른쪽엔 거무튀튀한 붉은 벽돌로 지은 한 10미터 높이의 무슨 공장같은 건물이 보였다. 동시에 공포의 이미지들이 금방 튀어나와 머리속을 마구 휘젔고 다녔다.
‘여기구나.’
여기 이 따사로운 봄빛도 이 공포를 막아내지 못하는구나.

가이드가 잠시 뒤 다시 소리쳤다.
“저기 보이는 단선 철길이 백만명이 넘는 유대인과 다른 죄수들을 죽음의 가스실로 실어온 그 철길입니다.”
철로는 그때 그대로 녹이 슨채로 남아있었다. 잠시 우리나라의 ‘철마는 달리고 싶다’의 그 녹슨 기차가 떠 올랐다. 곳곳에 잡풀과 맨드라미 꽃이 피어 그때와 지금의 시간간격을 조정해 주고 있었다. 저 철길위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어린애와 노인들까지, 더구나 어린애와 노인들은 노동으로서의 쓸모가 없어 즉시 가스실로 보내졌다고 하니. 영화의 장면들이 스르르 지나갔다. 그 철도 앞에 아우슈비츠 II 캠프의 정문이 아직도 그대로 버티며 그때를 말해주었다. 갑자기 그리로 수 많은 관광객들이 쏟아져 나왔다. 슬프고 이해못할 어둠이 이 밝은 대낮에도 그들의 걸음걸이와 얼굴에 보였다. 이 악명높은 철길옆에서 한때 지옥의 정문이었던 이곳을 보며 난 가스실에서 죽어간 수많은 이름없는 영혼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특히 두사람 십자가의 데레사 베네딕타 성인(St. Theresa Benedicta of the Cross. ‘에디트 슈타인’으로 더 잘 알려진)과 막시밀리안 콜베 성인(St. Maximillian Kolbe)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2016년 나는 BBC 뉴스를 보며 다시 독일을 생각했다. 독일이 이번 난민사태로 8만명을 받아들일 걸 약속했고 또 약 50만명의 난민들을 점차로 받아들일 계획이 있다고 했다. 영국이 겨우(?) 2만명 프랑스가 조금 더 넘는 2만 5000명을 받아들인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이 숫자는 무슨 재해때 성금액을 나타내는 그런류의 숫자는 아니지만 난 독일과 독일인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했다.

영국인들은 항상 독일에 대한 ‘반반’의 감정을 나타낸다(이는 프랑스와 프랑스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같은 게르만족인 독일은 영국인에겐(잉글랜드의 앵글로 색슨, Anglo-Saxon,족은 독일 색슨 주에서 건너온 게르만 민족이다) 항상 정리정돈된 완전주의자(perfectionist)같은 어쩌면 ‘범생이’ 이미지를 풍긴다. 대체로 영국보다 깨끗하고 질서도 잘지키고 예절도 바르다. 경제도 더 건실하다. 그렇지만 위의 아우슈비츠의 예로 보듯이 무시무시한 두 번의 세계대전을 일으킨 문제의 나라다. 두 번 다 영국은 이 독일이 일으킨 전쟁에서 주도하여 승리로 이끌었다. 마가렛 대처 수상의 임기중 큰 실수의 하나로 항상 꼽히는 독일통일의 반대도 과거에 반추해 독일의 잠재적 위력에 위험을 감지한게 아니었을까? 해마다 11월의 전승절이 되면 온 영국이 난리다. 우리 가톨릭 교회도 마찬가지다. 크로이든(Croydon)과 턴브리지 웰스(Tunbridge Wells) 성당에 있을 땐 주일미사 중 가장 큰 미사에 스카우트 어린이들과 퇴역 군인 신자들이 무슨 무슨 색색의 깃발을 곧이 세우며 미사 시작과 함께 성당안으로 엄숙하게 입장한다. 그러면 나는 제대 앞에 서서 기다리며 그 깃발들을 받아 성당 제대 옆에 세워두었다. 온 신자들이 미사시간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말이다. 이날 미사만큼은 이들은 거수경례를 한다. 이 깃발들은(유니온 잭을 포함해) 영국이 전쟁에서 승리했음을, 악을 물리치고 정의가 승리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이었다. 그리고 이 일요일 1-2주전부터 영국 시내마다, 거리마다, 성당마다 포피(Poppy. 양귀비 꽃. 전쟁에서 전사한 군인들을 상징)을 판다. 그리고 사람들은 가슴에 이 기간 내내 그 꽃을 달고있다. BBC를 비롯한 모든 공중파 방송에서도 어나운서와 tv진행자 출연자들도 마찬가지다. 이는 성스러운 예식처럼 해마다 반복된다. 몇 십년 전에 유행했던 코미디 프로그램에서는 독일인과 전쟁은 중요한 주제였다. ‘포울티 탑(Fawlty Towers)’이라는 인기 프로에선 외국인 특히 독일인과 스페인인을 영국식으로 비꼬는 풍자로 인기를 끌었다. 아직도 이런 옛 프로그램은 인기를 끌고있다. 예를 들어 ‘아빠의 군대(Dad’s Army)”는 수없이 재방송되었다. 지금은 그 필름이 다 닳았지 않았을까? 지금은 불가능하고 해서도 안되는 한때는 영국인 사이에서 독일인에게 묻는 가상 질문이 “아직도 독일에선 가스로 쿠킹 하나요?”라는 농담도 있었다고 한다. 지금 영국에서 이 소릴 하면 감옥갈 준비해야 한다. 끔찍하고 굉장히 비하의 의미가 담겨있다. 기억하라. 이런 농담들은 영국이 경제적으로 ‘영국병’에 걸렸을 때 경제적으로 부흥한 서독에 대한 부러움으로 열등감을 느낄 때란 것을.

또 다른 영국인의 독일인에 대한 편견은 부유한 독일인이 남유럽에 같은데로 휴가가서 하는 짓(?)이다. 아침 일찍 일어난 부지런한 독일인은 항상 큰 호텔 욕실 타월로 수영장 주위나 바닷가에 자기자리로 명확히 하기위해 이 타월을 깔아 놓는다는 것이다. 난 이 농담을 꽤 여러번 영국인끼리하는 것을 들었다. 실지로 몇해 전에는 어떤 영국인 관광 크루즈선 선장이 아침방송을 하면서 ‘독일인은 사용하지 않을 타월을 수영장가에 펼쳐 놓지 마십시요.’라고 농담했다가 ‘인종차별’로 독일인 관광객들에게 고발당한 사건도 있었다. 산티아고 순례중 만난 한 독일인은 이런 관습은 영국이 먼저 시작했다고 불평했다. 하여튼 이웃나라 끼리는 항상 이런 저런 일이 많다. 그렇지만 이러한 영국인도 독일인에 대한 이미지는, 특히나 지난 전쟁의 이미지는, 확실히 바뀌었다. 심지어 독일이 최근의 그리스와 남유럽의 경제문제를 ‘주도적으로’ 해결해 주길 바라는 말도 서슴치 않고 방송에서 하는 것이다. 이는 엄청난 변화이다(사실 독일인들은 과거의 일 때문에 주저한다고 들었다. 리더로서 나서면 사실 책임감과 골치 아프기도하고 더구나 과거의 일로 괜히 이웃을 자극할 수도 있어서.) 대처가 살아있으면 어떤 반응이 왔을 지 참으로 궁금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영국인은 나치 독일과 지금 안겔라 메르켈의 독일은 구분한다. 이런 의미에서 독일은 엄청난 성공을 한 나라다. 경제적 성공보다 훨씬 파급력이 큰 독일 이미지 변화의 성공이며 독일이 미래의 동반자며 또 미래를 볼줄아는 성숙한 나라로 성장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잃었던 신용(Credit)을 독일은 얻었다.

산티아고 순례를 하면서 여러 나라 사람들 중 아마 독일인을 가장 많이 만났을 것이다. 그래서 산티아고에선 아예 독일 주교회의에서 파견한 신부님이 상주하고 계셔서 독일인 순례자들을 보살폈다. 순례자의 미사가 끝나면 그는 독일어로 어디어디에서 순례의 나눔 시간이 있다고 광고하는 걸 들었다. 순례동안에 영국인들이 놀리는 그 수영장의 타월을 알베르게(Albergue. Youth Hostel 같이 여러명이 한방에 자고 시설을 나누어 쓰는 숙박시설)에서 경험한 적은 없었다. 대신에 얼마나 그들이 철저하고 예절바른지를 경험했다. 쓰고난 뒤의 샤워나 침대는 항상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한 방에 잠자면서도 남에게 불편함을 주는, 예를 들어 큰 소리로 같이 온 친구와 밤 늦게까지 떠든다든가 하는, 일도 하지 않았다. 오래된 스테레오 타입(Stereotype)을 재생산하는 것은 아니지만 스페인이나 이태리인들은 쉽게 친구가 됐고 또 한편으론 여러번 그들의 소음에 잠자리를 설쳤다. 남유럽 사람들은 화통했다. 언제든지 어느곳에서든 만나면 끌어안고 포옹을 했다. 그 포옹의 세기에 따라서 난 각 내셔날리티(Nationality)를 구별할 수 있었다. 브라질 사람들이 가장 세었다. 라틴 사람들인 남유럽과 남미 사람들은 꼭 10년을 알고지낸 친구처럼 스스럼 없었다. 이멜 주소도 즉시 즉시 그때 그때 주저없이 교환했다. 독일인은 아니었다. 순례시작부터 산티아고 끝까지 거의 비슷하게 같이 여행한 한 독일인과 나는 이멜 주소 교환도 없이 그렇게 “good luck”하며 산티아고에서 헤어졌다. 거의 한달을 같이 순례했는데도 말이다. 우리는 같은 순례자로 오랫동안 그리고 여러번 진부한 세상살이에 대해 얘기했다. 그리고 친했다, 내 생각으론. 꼭 이멜을 교환해 더 이야기 할 건 없었다. 이게 사실 합리적이다. 그러나 뭔 한가지가 빠진 듯하고 부족해 보인다. 한번은 대학을 갓 졸업한 독일 청년과 하루를 꼬박 같이 걸었다. 이런저런 얘기를 많이 했다. 대학 졸업한뒤 일년이 거의 다되어 가는데 취직이 안되어서 화도나고해서 이리로 순례왔다고 했다. 무거운 텐트까지 넣어 내 가벼운(?) 배낭보다 두배 커고 무거운 베낭을 진 키가 거의 2미터나 될것같은 청년이었다. 순례동안 스페인 선거 포스터를 볼수 있었고 동시에 스페인의 경제 파탄이 신문의 주요기사로 등장할 무렵이었다. 많은 스페인 청년들이 독일로 영국으로 일을 찾아 떠나고 있었다. 난 넌지시 스페인인과 그리스인 청년과 똑같이 독일에서 일자리 경쟁을 하는 걸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다. 곧 나는 얼굴이 뜨거워 졌다. 20대 초반인 그가 자연스레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말이 자기들은 같은 유럽이고 그게 유럽연합의 정신이라고 했다.

난 독일이 이제 편협한 민족국가인 독일을 넘어서 유럽 안의 독일이 됐음을 다시 느꼈다. 물론 독일에서도 이민 반대자와 인종차별의 네오-나치 단체도 있다고 들었다. 그러나 이는 소수이고 대세를 잡지는 못한다고 본다. 이변이 생기기 전에는 말이다. 심지어 뮌헨의 기차역에 엄청난 독일인들이 플랭카드를 들고 난민들인 시리아 인들이나 아프간 인들을 환영하는 tv 뉴스도 봤다. 그에다가 “Welcome to Germany”라는 팻말도 있었다. 이는 어느 한 나라의 성숙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사실이지 다른 나라 난민을 한두명도 아닌 수만명을 받아들인다고 생각해 보라. 어떤이는 독일이 경제인구로 이들이 필요해서 일지도 모른다고했다. 일리가 있다. 그렇지만 경제인구론 같은 유럽인 스페인이나 폴란드 심지어는 우크라이나같은 나라에서도 충당할 수 있다. 더구나 한 이년 전에 몇 백만명의 독일 안의 터키인들과 아랍인들이 독일에서 그렇게 오래 살았음에도 “인테그레이션(integration)”에 실패했다고 한 독일 정부의 고백에서도 알수있듯 이번 결정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한 나라의 성숙은 개개인의 성숙과 맞물려있다. 난 내가 만난 소수의 독일인들을 보면서 일반적 독일을 간접 경험했다.

많은 독일인들은 어린 3살의 아일란 쿠르디가 바닷가에 엎어져있는 사진을 보며 혹시 60년전의 아우슈비츠를 떠올린 건 아닐까. 물론 이 슬프디 슬픈 한장의 사진은 아우슈비츠와는 다르지만 많은 맥락에서 같다. 신문에서는 이 한장의 사진이 많은 유럽인을 움직였고 그 뒤로 난민수용 발표가 여러나라에서 나왔다. 독일이 이를 이끌었다. 사실 이런 면에서 독일은 ‘국가개조’가 이루어진 나라이다. 여기서 국가개조는 독재시절의 그 무시무시한 구호완 물론 다르다. 그렇다고 아우슈비츠의 과거가 파묻힌다거나 왜곡돼서는 절대 안된다. 분명한 사실은 많은 영국인들이(또 다른 유럽인들이) 느끼듯이 과거의 나치 독일과 현재의 독일을 “구분 할 줄 아는” 또는 “구분되는” 것이다. 이는 독일에 엄청 이득이다. 그렇다면 일본은 어떤가?

나는 결국 일본은 장기적으로 또 가까운 미래를 위해서도 자기들에게 얻을 것이 없다고 본다. 만약에 이대로 간다면. 현재도 그렇고 미래도 그렇다. 첫째는 말할 것도 없이 윤리적 문제이다. 다음은 이미지 문제이다. 중국인들이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영국인들이 독일인에게 갖는 것처럼, 현재의 일본이 과거와 그렇게 명확히 “구분 안되고” 또 많은 예에서 “구분되 보이지 않는다.” 많은 선량한 일본인이 있을 곳이다. 예절 바른 일인들도 많이 봤다. 20년도 넘었을까? 한 은퇴한 일본인이 런던에서 길을 잃어 같이 호텔을 찾아 주었는데 주소(?)를 달라고 했다. 나중에 나에게 양말 10켤레와 정성스런 카드를 그 일본인으로부터 받았다. 감동에 감동을 받았다. 그런 한편으론 안타까운게 그 많은 선량한 일본인이 왜 잘못된 과거를 잘못이라고 말 못할까? 한 20년도 더 전 영어를 배울 때 한 클래스에서 남유럽애들이 손가락으로 나치 십자가를 만들며 독일과 나치를 비난하던 일이 떠오른다. 내 생각으론 지금 그 애들은 나치 독일과 지금 독일을 구분할 줄 알 것이라 생각한다. 독일인은 지혜가 있고 지혜를 발휘했다. 지혜(Wisdom)는 얄팍한 “잔꽤(Excuse)”가 아니다. 윤리(Ethics)는 “왜곡(Distortion)”에 기초하지 않는다. 죄없는 젊은 일본애들이 다른 아시아 젊은이들에게 과거 땜에 놀림 받는 건 원치 않지만 적어도 다른 젊은 새 세대의 아시아인들이 과거의 일본과 현재의 일본을 구분할 수있도록 하는 것은 전적으로 일본에 달려있다. 이것은 지혜로부터 나온다. 현재의 독일인은 이웃들에게 과거의 독일과 현재의 독일을 구분할 수 있도록 노력해 증명했고 또 성공했다. 그래서 미래를 이웃과 같이 설계할수 있고 또 그 이웃은 기꺼이 이에 참여한다. 독일의 과거가 미래를 방해하지 않는다. 일본도 이 지혜와 윤리를 가지는 날을 기대해 본다. 현재는 미래를 설계할 뿐 아니라 과거를 왜곡해 보지 않고 선명히 보아 미래의 지혜를 뽑아낸다. 그래서 과거가 중요하다.

아우슈비츠를 보면서 마음은 착잡했고 어두웠지만 독일을 보면서 마음이 밝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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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명높은 철조망. 트럼프는 이런 철조망 벽을 다시 세우려 한다... 역사시간에 그는 졸았을까?
수용소 군락. 잊지말자...
이 대문을 지났을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하며 고개 숙였다.
철마는 '절대' 달려서는 안된다. 눈감고 묵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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