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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 율리시즈 Jun 18. 2017

얼음의 땅 아이슬란드

아이슬란드 여행 에세이 1

그곳에도 사람들은 살고 있었다.
웃고 떠들고...

전혀 생소한 곳에 가보고 싶은 생각이 들때가 있다. 일상을 살면서 잘 떠올리지 않는 바로 그런 곳, 어느날 문득 생각나는 그런 곳 말이다. 훌쩍 떠나고 싶을때 생각나는 그런 곳.

차를 타고가다 이 작은 폭포를 발견했다.

아이슬란드(Iceland)가 그런 나라였다. 그렇지만 이 나라는 동화속의 신비한 나라의 이미지로, 저 멀리, 멀고 먼 북극점 가까운 어딘가에 있다는 느낌이고, 또 꼭 가야할 필요성이 대두되지 않는 그런 곳이었다. 신비한 북극 오로라를 보고싶다는 상상이 겹치는 이 신비의 나라를 가보고 싶다는 마음이 처음 든 건 어느날 우연히 일어났다.


지금은 런던이란 복잡한 대도시에 살지만 난 조용한 타운을 자주 경험했다. 웨일즈도 시골이었고 스코틀랜드도 그랬다. 잉글랜드의 신학교도 런던 교외였지만 시골이었다. 스코틀랜드는 에딘버러에서도 한시간 반 기차를 타고 또 황량한 시골 기차역에 내려  15분정도 버스를 갈아타야만 당도하는 먼곳에 대학이 있었다. 바닷가의 바람은 매서웠고 작은 타운이라 밤만되면 사람들은 어디 꼭꼭 숨었는지 거리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밤만되면 황량하고 을씨년스러운 그런곳이었다. 시끄러운 '펍'만 빼면... 거기서 난 런던으로 가는 날만을 계산했다. 심심하고 우중충하고 우울한 그곳에서 할일은 딱 두가지였다. 도서관으로 가서 공부하거나 아니면 펍에 가서 사람들과 술을 마시는게 전부였다. 그런데 난 둘 다 적성에 맞지않았다. 귀신 나올 것 같은 몇백년된 건물인 금방 쓰러질것 같은 신학부 건물로 가면 ‘커몬 룸(Common Room)’이 있었고 큰 tv와 푹신한 소파가 여럿 놓여있었다. 당시 tv가 없었던 나는 거기서 꼭 bbc1의 밤 10시 정규뉴스와 연이은 10시 반에 시작하는 bbc2의 뉴스나이트(Newsnight)라는 시사 프로그램을 시청하는게 '낙'이였다.


그런 어느날 하루는 나보다 훨씬 나이 어려보이는 청년 두명이 그 공동방에 들어왔다. 그리고 나보고 영화 비디오 테잎을 가져와 볼려고 하는데 괜찮으냐고 물었다. 가뜩이나 심심한데 잘됐다 싶었다. 일본영화라고 했다. 제목은 ‘콜드 피버(Cold Fever)’이었다. 한 성공한 일본인 사업가가 하와이로 휴가를 갈려다가 대신 아이슬란드로 가게된 이야기였다. 왜냐하면 그의 부모가 익사한 곳이 하필이면 아이슬란드 였고 일본 전통에 따라 부모사망 7주년 기념식을 부모가 강물에 빠져 익사한 바로 그 지점에서 부모의 사망예식을 치르러 길떠나는 영화였다. 그래서 영화의 대부분은 부모가 익사한 그 강까지 가는 동안 일어나는 아이슬란드 시골 여행담을 담은 영화였다. 여행? 항상 마음엔 있었지만 여유가 없었던 나에겐 호기심도 일었다. 이 두 청년은 아이슬란드 출신이었고 자기나라를 담은 영화라 어떻게 알았는지 비디오 테잎(지금은 옛날 얘기인)을 빌려와 보는 것이었다. 내용보다도 나는 아이슬란드의 신기한 풍광을 보는게 더 즐거웠다. 영화를 같이 보면서 문득 이 미지의 나라에 가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당시엔, 비록 유럽에 속해있는 이 나라지만, 이곳으로 여행갈 꿈도 못꾸었다. 그후 뷔옥(Björk)이라는 이 나라 출신의 유명가수가 tv나 신문에 나올때마다 꼭 한번 가봐야지 하다가도 아이슬란드는 가능성없는 여행인지 금방 금방 뇌리에서 사라졌다. 그러다가 2014년에 드디어 이 북쪽, 이름 그대로 얼음의 나라, ‘빙국’에 갈 수있었다.


아이슬란드는 런던에서 겨우 세시간 남짓, 결코 멀다고 할수없는 나라였다. 런던에서 한국사람들에게 이 나라에 간다고 했더니 수도인 레이캬비크(Reykjavík) 공항 앞에서 호떡과 오뎅장사를 하는 한국인이 있다는 알쏭달쏭한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 정말일까? 이 추운 나라에서 호떡과 오뎅장사는 먹혀 들어갈것 같았다. 그러나 정말인지 의심이 갔다.


런던에서 아이슬란드의 수도 레이캬비크로 가는 항공기는 이름도 특이한 ‘와우 에어(Wow Air)’라는 저가 항공사였다. 이곳 공항에 내렸을 땐 공항이 꼭 지방 도시의 역(station) 정도밖에 되지 않는 작은 공항이었다. 이 나라의 남서쪽에 위치한 수도 레이캬비크(Reykjavík)는 이 나라 인구 32만명중 거의 3분의 1이 살고 있다고 했다. 인구 32만명이면 포항인구보다 작은 나라이다. 거리의 집들을 보며 꼭 아이키아(IKEA. 한국에선 ‘이케아’로 부르는 걸 신문에서 봤다) 스타일로 실용적 스칸디나비아 식이었다. 어떻게 보면 곡선적이며 무거운 돌을 많이 쓰는 남유럽 나라의 집들과 달리 목재와 직선적인 북유럽식이었고 깔끔하고 정돈된 모습이었다. 가끔씩 초현대식 건물들도 더러 눈에 띄었다. 거리는 정말 깨끗하고 휴지하나 볼수없었다. 그리고 맑고 청정한 무공해공기는 쉽게 알아챌수 있었고 냄새부터 달랐다. 런던과 정말 비교되었다. 하지만 딱 한가지 궂은 날씨는 영국과 비교해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내가 도착한 바로 그 날도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가끔 바람도 동반해 불어댔다. 여행가이드는 그랬다. 아이슬란드엔 하루에 사계절을 다 경험할 수 있다고. 어디서 많이 듣던 얘기였다. 정말이지 차를 타고 호텔로 이동하는 순간에 북국의 햇빛이 코치의 유리창으로 들어왔다. 북쪽에서 맞아보는 햇빛이지만 따스했다.

"아, 햇빛은 그래도 따뜻한 햇빛이구나."

여기가 스칸디나비아 나라가 아닐까봐 호텔조차도 아주 편리하고 기능적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땅에서 솟는 지열과 온천수가 풍부해 대부분의 아이슬란드 가정은 거의 무료인 온수와 전기를 쓴다고 한다. 그런데 호텔에서 샤워할때마다 무슨 계란썩는 냄새가 났다. 혹시 내 몸에서 나나 싶었는데 그건 아니었다. 양치질을 할때도 온수를 틀면 이 냄새는 심하게 났다. 꼭 계란 썩는 냄새같았다. 가이드 말로는 대부분의 가정에서 자연적인 땅속의 온천수를 쓰는데 이 냄새가 난다고 했다. 그러나 건강엔 아무 지장이 없다고 했다. 날씨가 뵨덕도 심하고 추워서 그렇지 복받은 나라였다.


‘란드나마복(Landnámabók)’이라는 고문서에 따르면 아이슬란드엔 874년부터 노르웨이인들이 정착해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전에도 영국쪽의 스코틀랜드나 아일랜드 켈트족이 이곳에 온 흔적도 발견됐다고 한다. 그러나 정착해 살기 시작한 것은 노르웨이인들과 다른 스칸디나비아 인들이었고 그래서 1262년부터 1814년까지는 노르웨이의 통치아래 그 후로는 덴마크령으로 지내다가 드디어 1918년에 독립하고 1944년에 공화국이 되었다. 다른 북유럽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사회복지나 삶의 질 순위에서 항상 상위에 올라있는 대표적인 복지 국가이다. 그러다가 2008년에 경제가 파탄을 맞았는데 인구 32만명의 소국이 지나치게 해외로 금융산업을 확장하다가 세계경제 불황의 직격탄을 맞은 것이다. 많은 영국인들이 이 아이슬란드 은행에 돈을 맞겼다가 떼였는데 그때 영국신문과 방송에서 연일 떠들었던 기억이 난다. 고든 브라운 당시 총리는 거의 엄포로 이 소국에 문제해결을 촉구했다. 하지만 경제파탄후 몇년이 지난 2014년 임에도 호텔은 호텔대로 음식은 음식대로 물가는 유럽 어느나라에 비해서도 높았다. 호텔에서 커피값은 물가비싼 런던보다도 비쌌다.


하지만 이 먼곳에 왔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호텔을 나와 이리저리 기웃하며 이 신기한 나라를 구경했다. 가까운 수퍼마켓도 가보고 세계 어디에도 있는 중국식당 앞에서 메뉴도 살펴보았다. 그러나 어디가도 역사의 냄새가 풍기는 좁은 골목이 군데군데있고 타운중앙에 성당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남유럽과 중유럽의 풍경에 비해 여긴 오히려 미국과 호주같은 모습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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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만해도 청정하다. 마음까지...
궂은 날씨에도 즐거운 마음으로 살려는 아이슬란드인들을 형상화했을까?
그림같은, 그러나 그림이 아닌 실제.
아이슬란드 교회. 루터교가 대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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