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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 율리시즈 Aug 05. 2017

헉, 교도소를 관광지로?

필리핀 팔라완 이와힉 교도소


“지옥은 밝을까? 아님 어두울까? 대낮에도 지옥을 사는 사람들이 있다면…”

몇년전 50명의 대인원과 함께 필리핀의 수도 마닐라에서 한참 떨어진 ‘팔라완 섬’으로 날아 갔다. 팔라완 섬은 필리핀 군도의 많고 많은 섬들 중 남서쪽에 위치해 있으며 길게 막대처럼 생겨 지도를 펴들면 쉽게 찾을 수 있다. 이 막대 섬의 수도는 인구 25만명 정도인 ‘푸에르토 프린세사(Puerto Princesa)’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스페인 식민지 시절 단명한 공주의 이름을 따서 공주의 항구란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붙인 이름만큼이나 지리적 요건도 좋아 스페인 식민지 정부는 이곳을 해양기지로 개발했다. 그래서 조그만 어촌이 도시로 발전했으며 스페인을 이은 미국도 이 이점을 이용 계승했다고 한다. 푸에르토 프린세사는 다른 필리핀의 도시에 비해 거리가 깨끗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이곳에선 휴지를 버리면 막바로 벌금이 부과된다고 했다. 길가에 휴지 버리는게 일상인 마닐라나 세부와는 많이 달랐다. 그러나 일반 거리의 건물들은 낡고 우중충한 여느 필리핀의 도시와 비슷했고 가난의 흔적들은 여기서도 쉽게 볼수 있었다.

다음날 우리는 여러 승합차에 나누어 타고 푸에르토 프린세사 교외에 위치한 ‘이와힉(Iwahig) 교도소’로 갔다.  약 30분 정도 걸렸던 것같다. 여행 온 필리핀에 웬 교도소가 일정에 포함됐을까? 교도소라고 하지만 정확히는 ‘피날 콜로니(penal colony/farm)’라고 부르는 완전히 갇힌 교도소와는 조금 다른 형태의, 형벌을 받은 범죄자들이 모여 살지만 좀더 자유로운, 열린 개념의 교도소였다. 1904년 미국인 총독이었던 ‘루크 라이트(Luke Wright)’가 지었다고 하니 100년도 넘는 역사를 가졌고 처음엔 미군 캠프였던 모양이었다. 큰 농장이 교도소 안에 있어 수감자들은 작물도 키우고 목공예나 수공예를 배워 기념품도 만들어 팔았다. 그래서 관광객들에게 이곳을 개방했으며 사실 팔라완의 관광일정엔 이곳이 자주 포함된다고 했다. 이곳에 수감된 죄수들 중 심지어 바닷가에 나가 고기잡이도 할수도 있는 오픈된 개념의 교도소이지만 또 한편 일반 교도소처럼 거주를 엄격히 제한받는 수감자들도 많다고 하였다.

교도소 간판이 보이고도 한참 더 들어가자 여러 동의 단조로운 건물들이 눈에 들어왔고 가운데는 우리나라 학교 운동장 크기의 공터가 보였다. 뜨거운 대낮이라 넓은 운동장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들 승합차가 도착하자 한 건물에서 유니폼을 차려입은 대여섯 명이 우르르 몰려 나와 우리를 운동장 가까이 있는 교도소 성당으로 안내했다. 일정에 따라 미사를 먼저 보기로 한 것이다. 현대식 성당안에 들어서자 꽤 큰 규모였고 수감자들이 주르르 줄지어 앉아 들어서는 우리 일행을 바라보고 있었다. 벽에 붙어 뱅뱅 돌아가는 여러 대의 선풍기 소리가 제일 크게 들렸다. 같이 간 신자들이 자리를 잡아 앉는 사이 난 성당 제의실로 갔다. 거기서 그곳 신부님과 인사를 나눈 뒤 미사를 준비했다. 가뜩이나 더운 날씨에 미사복을 위에 걸치니 교도소의 마른 풀냄새와 더불어 쑥탕 그대로 였다. 연신 닦아도 닦아도 땀은 계속 흘렀다.

시작성가의 반주가 흘러나왔다. 성당안에 족히 몇백명은 되어보이는 인원이 주르르 일어섰다. 제대 오른편엔 수감자로 구성된 성가대원들이 악보를 들고 성가를 부르고 있었다. 교도소에서의 미사는 처음이었다. 앞에 서있는 사람들이 범법자들이라 생각하니 여간 조심스러운게 아니었다(사실 떨렸다). 그러나 미사 시작 성호를 긋는 즉시 이런 기우는 사라졌다. 날 쳐다보며 성호를 긋는 수많은 얼굴에 그들이 범법자라는 표시는 전혀 없었다. 그들은 일률적으로 간단한 유니폼을 모두 걸치고 있었다. 미사 독서를 하는 동안 넌지시 성당안 수감자들을 내다 보았다. 마이크가 계속 지직거리면서 상태가 좋지 않음에도 다들 열심히 귀 기울이며 듣고 있었다. 타갈로그가 아닌 영어로 '주님의 말씀'을 낭독했음에도 난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대신에, 어떻하다 이들이 이곳까지 오게 됐을까? 생각하니 안스러운 마음이 절로 들고 관심도 들었다. 대부분의 이곳 사람들은 콩나물 시루같은 악명높은 마닐라의 ‘빌리비드 교도소(Bilibid prison)’에서 옮겨 왔다고 한다. 그렇다면 수감자들은 대부분이 수도 마닐라가 있는 루손 섬 출신일 것이고 그들의 가족들이 이 먼 팔라완까지 비싼 비행기를 타고와 면회 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론 아예 가족이 상봉은 물론이려니와 연락도 안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하였다. 어떻게 보면 이곳은 옛날 영국정부가 죄수를 멀리 호주까지 보낸 시책과 비슷한 필리핀의 호주였다. 귀찮고 위험하니 먼곳으로 보내어 격리시켜버리는 것이다.

미사를 마치자 이곳 신부님이 우리 그룹보고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으라고 하시며 이곳 수감자들이 공연(?)을 곧 시작 한다고 알려 주셨다. 성당안에서 공연을? 옷을 갈아입고 벤치에 사람들과 같이 앉아 있으니 곧 음악이 흘러나오고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젊은이들 대여섯명이 나왔다. 그리고 음악에 맞춰 춤을 추었다. 그냥 취미로 추는 춤솜씨가 아니었다. tv에 나오는 춤꾼들보다 내 생각으론 더 잘추었다. 필리핀 사람들은 노래도 상당히 잘하고 춤도 잘춘다는 것을 여기서 또 경험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노래하고 춤추는 건 일상이어서 부끄러움이 없었다. 그들은 즐기는 것같았다. 가라오케가 일본에서 발명됐지만 그걸 가장 많이 이용하는 국민은 필리핀 사람들이라고 누가 이야기했다. 영국에서도 필리핀 가정을 방문하면 tv에 연결해 사용하는 가라오케 기계는 응접실에 항상 놓여 있었다. 항상 나보고 곡을 선택해 마이크 잡고 노랠시켜서 가끔 거절하느라 진땀을 뺀다. 20분 정도의 수감자들의 공연이 끝나자 점심을 준비했다며 우리 일행을 성당 옆 건물로 데려갔다. 교도소에 와서 너무 호강하는게 아닌가 싶었다. 필리핀식 잡채인 ‘빤싯(pancit)’과 스프링 롤인 ‘룸삐아(lumpia)’ 그리고 볶음밥 등이 있었다.

점심뒤에 이곳 신부님의 주선으로 난 서너명의 죄수들과 개인적으로 만날 기회가 있었다. 영어와 타갈로그가 섞인 대화를 해서 정확히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한명 한명의 사연들이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한명은 이곳에서 20년을 넘게 살았다고 했다. 25세에 들어와 지금은 45세가 되었다. 또 앞으로 얼마나 더... 마닐라의 가족과 연락이 끊긴지는 이곳에 오자마자 였다. 가족에게 편지를 보내도 ‘수취인불명’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죄명은 살인....

어떻게 살인을 한 사람이 이렇게 온순하고 수줍어 하는 성격인지 이해가 안됐다. 살인자하면 떠오르는 험상궂은 얼굴을 한 사람, 거대한 등짝과 팔에 괴상한 문신을 한 미국 영화에 나오는 그런 죄수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눈에 살기 등등한 상상만해도 몸서리쳐지는 한국영화속의 살인자가 떠올랐다. 여기서도 몇몇 수감자들은 문신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 앞에 얌전히 앉아 눈도 제대로 못맞추고 고개숙여 얘기하는, 나보다 더 빼빼마른 이 필리핀 사람과 얘기하는 중에 평소에 드러나지 않던 편견이 내 머리속에 얼마나 깊이 박혀있는지를 느껴야 했다.

그러나 이들의 손에 직접 범죄를 당한 피해자들과 그 가족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가해자를 보는 무조건적 동정의 시선과 어슬픈 이해는 사실 피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원론적으로 정의로운 재판과 그런 재판을 받을 기회균등은 누구나 가지는 천부적인 권리이며 민주주의 사회에선 필수이다. 필리핀과 같은 부패가 심한 나라에서 정의로운 재판과 기회균등이 이들에게 행해졌을까? 혹시 이 교도소의 수감자들이 자기들이 받아야만 하는 벌보다 훨씬 더한 벌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닐까? 구약성서에 나오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말은 처절한 복수와 앙갚음이 아닌 한치의 오차도 허용치 않는 ‘공정한 재판(fair trial)’을 지향하는 것이다. 그리고 신약성서에서 왜 예수님은 누구든지 죄없는 자가 저 여자를 돌로쳐라 하셨을까? 누가 오십보를 같이 가 달라고 했는데 백보는 커녕, 난 이 살인수의 말을 듣고 사실 십보나 제대로 같이 가 주었을까? 난 한증막 속같은 뜨거운 날씨에 뜨겁고 달디 단 필리핀식 커피를 마시며 어지러운 머리를 땀으로 씻어 내렸다. 그럼에도 필리핀 살인수의 너무도 온순한 얼굴과 불행한 사연땜에 이해와 용서라는 손으로 머리속에 깊게 박힌 편견을 빼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내가 만나 본 다른 몇 수감자들 사연도 다 비슷했다. 어릴적 들었던 박삼중 스님의 교도소 일화들이 떠올랐다. 오래전에 잊어버렸던 사형수들이 그들 가족과 스님에게 보낸 용서와 참회의 편지 글 사연들이 되살아 났다. 가족과 일반사회로부터 육체적으로 또 정신적으로 단절된 삶이 어떤지는 상상이 안된다. 놀랍게도 내가 만난 이곳 사람들은 이곳 교도소가 더 편하고 좋다고 했다. 어차피 가족의 품으로 또 사회로 돌아가 보아야 재기의 기회는 좀처럼 주어지지 않을 것임을 이들이 잘 아는 듯했다. 자유로부터 스스로 자신을 제한시키는, 자신의 권리를 스스로 축소시키는 이들이 조금은 이해됐다.

어떤 수도원의 수도사가 장상에게 물었다.  
“지옥은 어떤 곳입니까?”
장상이 웃었다.
“‘희망(hope)’이 없는 곳, 바로 그곳이 지옥이지”

‘단테’의 ‘신곡’ 지옥편에 나오는 지옥문앞에 새겨진 글귀와 비슷하다. 가족에게 돌아 갈, 사회에 되돌아 갈 희망을 품지 않는 이곳 제소자들은 이미 지옥을 사는 것이 아닐까? 이 아름다운 섬에, 이 햇빛 쨍쨍한 날씨에 이렇게 지상의 지옥은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실 지옥은 이들 마음 속뿐 아니라 희망이 없다고 믿는 그 사회안에도 존재한다. 그만큼 썩었다는 것이고 악취를 풍긴다는 것이다. 혹시 이 악취에 취해 이들이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을까? 마약에 중독되어 이성으로 상황판단이 안되는 중독자처럼 말이다. 그리고, 혹시 성능 좋지 않은 마이크로 주님의 말씀을 의미없이 우리는 봉독하지 않았을까? 제 아무리 좋은 성서의 말씀이라도 마이크 시스템이 나쁘면 제대로 사람들의 귀에 들어갈리 없다. 그렇다면 이 지직거리는 마이크 시스템과 같은 악취를 뿜어대는 사회 시스템도 고쳐야 하지 않을까? 이 고장난 시스템을 공고히 하며 계속 악취를 풍기도록 유지시키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지직거리는 마이크를 잡고 주님의 말씀대신 소음만 일으키는 우리는 아닐까? 그리고, 이런 악취의 시스템에서 이익을 취하는 사람들은 과연 누구일까? 그들은 가해자가 아닐까? 그래서 그들이 이 수감자들처럼 단죄를 받았을까? 이 부패의 연결고리를 따라가다보면 이 시스템을 움직이는 자들을 색출해 낼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이곳 수감자들보다 더 심한 범죄를 저질러도 뇌물을 바치고 또 유능한 변호사를 고용해 뱀장어처럼 빠져 나올수 있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곳의 수감자들은 최소의 변호사 비용마저 구할 수 없는 그런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분명 가해자였지만 또 피해자였다. 이런 악취속에서 어떻게 정의로운 재판과 균등의 기회를 감히 상상할까? 몇백 병의 방향제를 뿌려 이 악취를 재거해도 바람처럼 악취는 되돌아올 것이다. 거의 백만명의 자기 시민을 가두고 있는 선진국 미국도 대부분의 교도소 생활자는 가난한 흑인들이라고 하니 이곳 필리핀에선 말할 나위도 없다.

우리 일행은 마지막 일정으로 이곳 수감자들이 직접 만든 옷이며 수공예품을 파는 운동장 반대편의 강당 비슷한 곳으로 걸어갔다. 이곳 건물중 가장 근사한 건물안에 있었다. 제법 큰 매장에 여러 물품들을 전시하며 팔고 있었다. 다시 수감자들로 구성된 그 춤꾼들이 와서 일행들이 매장을 둘러보는 사이 춤을 추었다. 몇몇 한국 노래에 맞춰 춤도 추었는데 ‘강남 스타일’ 밖에 나는 아는 것이 없었다(이들의 춤은 유튜브에서도 있고 인기도 많음.).

하여튼 이 잊지 못할 교도소 순례를 경험하며 사회에서 격리되어 사는 수감자들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이들은 육체적으로만 격리 되어 사는것만이 아닌 심리적으로도 격리되어 산다고 느꼈다. 범법자라고 해서 ‘보이지 않는 돌’을 던지는 우리가 아닐까?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또 이들의 사연들을 마음열고 들어보면, 쉽게 흑백으로 판단할 문제가 아닌 것같다. 죄를 미워하되 사람을 미워말라는 말이 떠 올랐다.

필리핀 대통령인 ‘두테르테’ 대통령이 필리핀의 사회악인 마약 근절을 위해 초강력 대책으로 비판받고 있다. 수많은 희생자를 내고 십수년을 끌어온 사회악이기에 지친 시민들에겐 이 정책은 환영받아 그의 인기도 정비례로 높다고 한다. 언제까지 참으며 공허한 ‘개선’만을 기다릴수 없다고 생각한 시민들이 두테르테 대통령의 강력책을 옹호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사람 ‘목숨’이 달린 문제다.  마약상들을 그대로 쏘아 죽인다고 문제가 다 해결이 될까? 방향제를 뿌린 것처럼 일시적인 악취제거는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까? 사실 근본적인 해결책이란게 있기는 할까? 또 언제까지 계속 마약상들을 쏘아대야 할까? 이 악질적인 마약상들도 한꺼풀 벗겨보면 다 사람이다. 내가 만났던 그 수감자처럼 혹시 이 악취에 감염돼 제대로 상황판단을 못했던 이들이 아닐까? 이들을 무조건 쏘아 죽인다고 수없는 연결고리로 구성된 사회 구조악이 개선된다고 믿지는 못하겠다. 스탈린도 모택동도 똑같은 논리였다. 이 논리에  수백만명이 희생되었다. 해결보다 희생이 훨씬 더 컸고 그 트라우마는 상상을 초월했다. 사실 우리는 이런 ‘악’들에 시달려 이런 근본책(radical solution)에 솔깃하지만 그로인한 뒷감당은 누가 떠맡아야 할까?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훨씬 더 많을 것이다. 아, 그리고 사람 목숨은 ‘공리주의(Utilitarianism)’로 계산해서는 절대 안된다.

교도소 구역을 나서면서 그 수줍고 온순한 수감자들을 다시 떠올렸다. 무엇이 그 사람을 살인자로 만들었을까? 의문이 가시지 않았다. 알베르 까뮈의 소설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는 아무 이유없이 알제리의 햇빛이 너무 눈부셔 해변에서 아랍인을 총으로 쏘아 죽였다. 교도소 안에서 만난 가톨릭 사제의 말에도 그는 히죽거리며 냉소했다. 범죄는 음침한 밤에 일어나는 것이라 믿었던 내게 이렇게 벌건 대낮에도 일어나는 구나 생각이 들었다. 창세기 4장에서 카인이 아벨을 죽였을 때도 대낮이었고 넓은 들판이었다. 이렇게 범죄는 환한 대낮에도 일어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밝은 대낮에 지옥을 사는 사람을 보았는가? 혹시 나는 책임이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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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장 건너로 옛 미군시절 사용한 건물이 보인다. 지금은 위층을 교도소에서 만든 물건들을 관광객들에게 팔고 있었다.

성당안에서 춤추던 춤꾼들이 다시 교도소에서 만든 물건을 파는 곳으로 우르르 몰려와서 '강남 스타일' 춤을 추었다.

교도소 안에 있는 성당 모습.

왼쪽이 교도소 수감중인 제소자들이고 오른쪽은 직원 가족 그리고 허락받고 교도소 안의 정해진 곳에서 사는 수감원 가족들. 초등학생들로 보이는 어린이들도 많이 있었다.

교도소 성당의 신부님이 미사준비 전 말씀하고 계신다.

수감원들은 질서도 잘 지키고 한마디 떠드는 사람도 없었다. 선풍기 소리만 왱왱 들렸다. 자원 봉사자들도 있어 도움을 주고 있었다.

성가에 맞춰 춤을 추고 있는 수감원들. 속에 맺힌 울분과 분노를 내밷는 표현으로 테라피의 효과도 있으리라 생각했다.

떠들썩한 춤이 아닌 아주 감미로운 선율의 음악에다 감성적인 몸짓으로 춤을 추었다. 내용은 타갈로그라 이해를 못했다.
T셔츠의 'P'는 무엇을 뜻할까?

Philippines?

Prisoner?

Penal?

Peace로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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