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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 율리시즈 Jul 25. 2017

하목파는 사람들

멕시코 여행 에세이-아카풀코


뜨거운 나라, 정열의 나라, 고추처럼 매운 나라.
그 나라 멕시코에 갔었다.
그들은 '메히코'라 불렀다.

멕시코 시티 근교의 과달루페 성모님 성지를 갔었고 엘비스 프레슬리가 좋아했던 휴양지이고 셀마 헤이옉의 휴가 집이 있다는 태평양 연안 '아카풀코(Acapulco)'에서 멋진 바다도 보았다. 마침 스와인 플루(Swine Flu)가 유행하던 때라 호텔은 텅텅 비어 있었고 운도 좋아 태평양이 바로 내려다 보이는 전망좋은 방을 배정받았다. E. M. Foster의 소설 ‘전망 좋은 방’을 떠올렸다. 이 방을 양보한 건 어떤 신사가 아니라 스와인 플루때문이었다. 고맙다고 해야 하나... 호텔 방 발코니에서 바라보았던 태평양, 그리고 해변의 야자수 사이로 보았던 석양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고 ‘전망 좋은 방’의 피렌체 보다도 더 좋았다고 자부한다.

그러다가 아카풀코 해변가 뒷길에서 이 하목(Hammock: 공중에 매달린 그물침대)을 둘러메고 파는 사람들을 보았다. 아버지와 아들같은 이 두사람은 긴 하목을 어깨에 걸치고 뜨거운 멕시코의 태양아래 관광객에게 하목을 팔고 있었다. 몇개 되지도 않은 하목을 가지고 하나는 보기좋게 펼쳐서 보여주고 있었다. 촘촘히 짠 그리고 튼튼한 그물 하목을 이리펴고 저리펴며 보여주었다. 사이즈도 '대 중 소'로 나누어 누구에게나 맞출수 있도록 했고 멕시코의 첫 인상처럼 항상 미소를 머금은 채로 하목을 외치고 있었다. 출렁대는 그물하목이 내 마음도 출렁대게 만들었다.


갑자기 나자렛의 유명한 부자지간, 아버지 요셉과 그의 아들 예수님이 떠올랐다. 목수 아버지를 도우던 착한 아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고 했던가? 아버지의 대패를 이어받아 쓱싹쓱싹 가구를 짜 만들던 나자렛 동네의 아버지와 아들. 거기서 피어나던 나무냄새가 뜨거운 멕시코의 태양아래서도 솔솔 피어오르고 있었다. 아버지 요셉과 아들 예수가 짜맞추어 만들어낸 테이블과 의자에 나자렛 사람들이 편안히 앉아 생활할수 있었던 것처럼 멕시코의 하목은 편안히 그늘 아래 누워 쉴 수 있도록 할 것이다.


누구의 땀과 노동이 없으면 편안히 앉을수도 편안히 누워 쉴수도 없다. '노동(work)'을 바라보는 가톨릭 교회의 입장은 고삐풀린 자본주의나 유물론적 공산주의도 아니다. '하느님의 모상(Imago Dei)'으로 창조된 인간이 하는 노동은 그 자체로 하느님의 창조사역을 돕는 '거룩한 행위'이다. 그래서 '인간이 목적이 아닌 수단이 되는 행위,' 즉 노동이 돈만을 위한 시간허비(wasted)나 남용되는(abused), 그리고 노동한 만큼의 적정임금을 받지못한다면,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은 착취의 대상이 된다. 이는 단순히 '억압(oppression)'만이 아닌 '신성모독(sacrilege)'도 되는 것이다.

이제는 한물간(?) 해방신학의 문헌이 작성된 멕시코의 푸에블라가 떠올렸다. 정보화시대에도 이 논란의 신학적 관심은 어떤면에선 아직도 유효함을 일깨워준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아버지 요셉과 아들  예수님이 몸소 보여주신 노동의 신성함을, 하목을 파는 이 두 사람이 게으른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날 저녁 호텔방에서 보았던 잔잔한 태평양의 석양은 멕시코의 고추색처럼 붉었다. 그리고 내 가슴도 매워 한동안 고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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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풀코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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