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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 율리시즈 Aug 14. 2017

죽은 데카르트를 만나다...

프랑스 여행 에세이- 생 제르망 데 프레 성당

파리의 오래된 성당앞에서 첨탑을 올려다보며 난 생각했다.



육체와 정신은 ‘하나’일까?


아님, 분리될수 있는 ‘두개’일까?



정신이 복잡하자 나의 육체도 따라 복잡해졌다. 그래서 일단, 육체와 정신이 ‘일원론(monism)’이라 생각하고, 미안하지만 ‘이원론(dualism)’을 주장한 근대철학의 아버지 ‘르네 데카르트(René Descartes)’가 묻힌 성당안으로 들어갔다. 내 경험을 주무기로 삼아 그에게 반박할 태세도 갖추었다.



파리의 베네딕트 수도원 성당인 ‘생 제르망 데 프레(Saint-Germain-des-Prés)’는 파리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성당들 중 하나이다. 유서깊은 파리 센느 강의  왼편에 있다. 프랑스 사람들은 센느 강의 왼편이라는데 사실 지도를 보면 남쪽이 더 맞아 보인다. 이곳 파리의 라틴 구역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곳에 성당은 그렇게 1500년을 당당히 자리하고 있었다. 6세기경 메로빙가 왕이었던 클로비스 1세의 아들 ‘실드베르 1세(Childebert I. 통치 511–558)가 스페인 사라고사 정복뒤에 세웠다고 한다. 그래서 막강한 프랑스 왕의 후원을 업고 이 수도원 성당은 중세로부터 프랑스 학문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베니딕도회 수도사들의 성서 필사나 그림책을 편찬하는, 즉 스크립토리움(scriptorium)의 중심지 역할을 담당했다고 한다. 성당에 딸린 수도원엔 책 냄새가 풀풀 날 것이다. 수많은 수도사들이 책상위의 잉크병에 연신 깃털 펜을 적시며 필사를 했을 것이다. 같은 라틴 구역 가까운 곳에 소르본 대학이 위치해 있어 그 중요성을 쉽게 짐작해 볼수있다. 그러나, 이러한 역할은 프랑스 대혁명으로 불타고 끝이 나 버렸다. 수도사들이 일일이 필사한 소중한 서적들도 같이 혁명의 불길에 타올라 공중에 사라졌을까?



그러나 한때의 영광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어느 폭군이, 어느 혁명가가 그 역사를 지울 수 있으리요. 혁명이 지우개의 역할을 했다면 그건 혁명이 아니다. ‘시떼’ 섬의 노트르 담 대성당같은 고딕 양식과 바로크 양식의 건물들이 철철 넘쳐나는 파리에서 몇 안되는 지워지지 않은 중세 로마네스 양식의 정수를 이 성당에서 우선 찾아 보려 했다. 겉모양은 다른 성당에 비해 화려하지도 또 크지도 않았다. 또 갈때마다 성당 어느 부분엔 항상 가림막이 쳐져 있어 자주 점검하고 손을 보아야하는 병약한 사람같은 성당이었다.



본 성당안으로 들어가기 바로 전, 오른쪽에 나있는 문을 빼꼼 열어보면 가끔 성체조배 시간일 수도 있고 미사 중일 수도 있다. 조용하다… 이 부속 채플이 얼마나 아늑하고 따뜻하고 평화로운지 오래 앉아 견디지 못하는 나도 여기만 오면 오래 앉아있었다. 그만큼 주위 분위기나 성당 건축물이 영향을 끼친다는 것일 것이다. 다시 철학자 데카르트의 이론에 반하는 경험을 했다.



본 성당 안에 들어가면 약간 어두컴컴하다. 그러나 시간을 넉넉히 갖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둘러보면 성당벽으로부터 풍겨나오는 오랜 역사냄새도 더불어 맡을 수 있다. 성당안 양쪽엔 몇 성인들의 채플도 보이고 최근의 요한 바오로 2세의 흉상도 보인다. 또 내가 찾았던 데카르트의 무덤도 보았다.



르네 데카르트는 말년에 스웨덴에서 지냈는데 스웨덴의 ‘크리스티나’ 왕비에게 일주일에 세번, 나중엔 네다섯번 개인교습했다고 한다. 크리스티나 왕비는 ‘사랑(Love)’의 철학적 풀이에 관심이 많았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그의 성미대로 기계적이고 수학적인 철학을 가르친 모양이었다. 왕비의 관심인 고대 그리스 철학에도 심드렁했다고 한다. 하여튼, 들리는 말에 의하면, 그 스웨덴 왕궁은 이곳 오래된 성당처럼 어둡고 참침하며 특히 스칸디나비아 날씨 그대로 춥고 습기가 많은 곳이라 결국 데카르트는 폐렴을 앓게되었다. 그래서 왕비가 보낸 의사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결국 거기에서 죽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의문이 많아 심지어는 진찰한 의사의 편지를 분석하며 그가 암살되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고 책도 나왔다. 왜냐하면 데카르트는 왕비가 보낸 그 의사를 거부하였기 때문이다. 하여튼 우여곡절 끝에 그는 이 성당에 누웠다. 프랑스 혁명 3년뒤인 1892년에 그를 프랑스 위인들이 안장된 ‘판떼옹(Pantheon)’에 묻으려 했으나 성사되지 못하고 이 오래된 작은 성당에 묻혔다고 한다. 그가 주장한 연역법으로 왜 그가 이 성당에 묻혔는지 이해하려 했으나 안되었다. 프랑스 인이기에? 예수회 교육을 받은 가톨릭 신자였기에? 그러나 그의 해골(Skull)은 다른 곳에 있다고 한다. 해골이 떠오르자 으시시해졌다. 꼭 런던 대학(UCL)의 공리주의 철학자 제레미 벤담을 모셔둔 거와 같다.



해골이 없어서 일까? 그의 무덤 채플에는 별다른 것이 없었다. 너무 심심하게 아무것도 없었고 묘비석 몇이 보였다. 로마네스크형 창문으로 아침 햇살이 포근하게 비춰 들어오고 있었다. 그것뿐이었다. 그렇게 근대철학의 아버지 데카르트는 그가 쓴 책(정신)으로 말하지 흙이 된 그의 육신으로 말하지 않았다. 뒤에 교황청에 의해 ‘금서목록(Index)’에 까지 올랐던 그의 사상이었다. 그러다, 옛 영국대학시절 철학수업이 갑자기 떠올랐다. 수업시간에 교수가 하는 말, 즉 영어로 데카르트의 사상을 말하는 단어인 ‘카르테시안(Cartesian)’이 도대체 무슨 뜻인지 몰라 허둥대었던 철학수업이었다. 한 단어를 몰라 1시간짜리 수업을 그대로 망쳐버렸다. 누가 ‘데카르트적’이란 말을 ‘카르테시안’이란 말로 ‘de’를 떼어내고 말하는 줄 알았을까? 허망함이 들었다. 영어쓰는 사람들을 원망했다. 이 허망함은 스웨덴의 왕비 크리스티나가 알고 싶었던 ‘사랑’만큼이나 철학적으로 풀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한국인이라면 이런 허망함은 그래도 쉽게 감지할 것이라 믿는다. 그래서 민족적 차이가 존재하는 것일까?



그 데카르트의 채플 창으로 들어오는 빛으로 성당내부는 한층 밝아졌다. 본 성당의 역사와 건축 내부의 우아함이 드러났다. 성당 중앙의 간이 의자(파리의 대부분 성당엔 대여섯 나무의자를, 그것도 사이즈가 작고 가벼운 의자를 함께 묶어 벤치처럼 놓아 두었다.)에 앉았다. 데카르트의 ‘명상(Meditationes de prima philosophia, 1641.)’을 떠올리며 ‘명상’하려 했으나 머리가 파리의 달팽이 지도처럼 복잡했다. 대신 공중의 십자가를 멍청이 바라보았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아침햇살이 하늘의 정상에 올랐는지 성당내부는 대낮의 거리처럼 환했다.



나머지 성당 부분을 보려 발을 뗐다. 그리고 성당의 제대 뒤쪽에 있는 조그만 채플에서 거의 숨이 멎을뻔 했다. 한 두평 정도의 조그만 채플 중앙에 오래된 ‘성모자상’ 조각이 세워져 있었다. 그러나 부분 부분이 떨어져 나가 조각의 반수가 사라진 반조각의 성모자상이었다. 그렇지만 이 성상이 성모자상이란 걸 쉽게 눈치 챌수 있는 건 아들 예수를 지긋이 내려다 보는 어머니 성모의 부드러운 얼굴모습과 아기 예수를 포근이 안은 팔 그리고 형체를 알수없는 아기 예수의 얼굴과 조그만 팔이었다. 성모의 몸체 반은 떨어져 나가버렸다. 그러나 직관으로 알아 챌수 있었다. 얼굴과 팔의 동작을 통해 모든 것을 아들 예수로 향하고 있는 따뜻한 성모의 모습을 그려볼수 있었다. 그렇다. 성모의 모정을 이렇게 직관으로도 느낄 수 있었다. 머리에 쓴 성모의 왕관도 볼 수 있었는데 다행히 많이 파손되지 않았다. 데카르트로부터 배운 스웨덴의 크리스티나 왕비의 왕관이 기억나고 또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의 왕관도 기억났다. 돌을 쪼아 만든 이 머리위의 ‘돌 왕관’은 머리위에 고정되어 한몸을 이루며 분리되지 않는다. 조롱의 가시관을 쓰고 십자가의 길을 걸은 아들 예수의 훗날을 상기하면 ‘돌 왕관’은 가시관이나 다름없었다. 몸체가 거의 떨어져 나간 상태에서 머리와 왕관이 남아있다는게 신기하기도 하였다. 갑자기 모정을, 세상 어머니들의 마음을 이 조각으로부터 읽을 수가 있었다. 그리고 자식을 위한 세상 어머니들의 ‘모정’을 자식으로부터 과연 떼어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정과 그 모정이 향하는 자식은 분명 ‘하나(one)’일 것이다. 그렇다면 어머니와 아들은 원래 한 몸이었는데 떨어져 나와 두 몸이 되었을 때도 한때 한몸임을 잊지 않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모정은 그 떨어져 나간 자신의 한 몸을 향한 영원한 그리움이 아닐까? 데카르트의 정신(mind)과 육체(body)간의 똑 떨어지는 이원론에 잠시 정나미가 떨어졌다. 도대체 데카르트는 이를 어떻게 설명할까? 크리스티나 왕비가 알고 싶었던 ‘사랑’이란 주제도 이렇게 뗄레야 뗄수없는 보이지 않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끈’을 알고 싶었던게 아닐까?



그래서 혹시 데카르트의 명언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대신에


‘나는 느낀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가 아닐까?




‘영원한 모후’란 최고의 아름다운 수식어를 지닌 성모상과 조각가가 세워준 그 왕관을 보며 그야말로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없는 ‘한몸’ 자식에 대한 사랑을 최고의 상징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느꼈다.



밝은 성당을 나오니 성당정문에 홈리스 아저씨가 손을 내밀고 계셨다. 어디가도 동전주는 성격이 못되는 나였지만 오른손이 뒤에 맨 가방으로 절로갔다. 성당 들어갈 때와 나올때는 똑같던 마음이 이렇게 달랐다.



정신과 육체?


일원론?


이원론?



햇살에 녹아 내렸다. 햇살이 좋았다. 정신도 육체도...


:::::

성모자상. (시기에 따라 다른곳에 안치하는 경우도 많다.)

데카르트의 무덤. 흉상이 보인다.

오래된 로마네스크 양식 벽 장식.

성당안 모습. 옆으로 가림막이 설치되 보수중임을 알 수 있다.

나중에 갔을 때 금색의 성모상이 서 있었다. 뱀에 유혹당한 이브 때문에 죄가 들어온 점을 상기시키며 유형학적으로 신약성서의 성모마리아가 뱀을 누르며 구약의 이브를 극복대체하는 모습이다. 한 사람으로 죄가 들어왔고 한 사람으로 인해 구원의 방해자인 죄를 물리쳤다.

곳곳에 파손된 흔적이 보인다.

성당 내부.

여기서도 베드로 사도상이 있으며 로마 베드로 대성당처럼 순례자들이 얼마나 그의 발을 터치했기에 색깔이 달라보인다.

'파두아의 성 안토니오.' 가만히 보면 사람들이 잔뜩 낙서를 해놓았다. 허락이 되는지? 아님 불법인지?

요한 바오로 2세 흉상. 폴란드 어가 적혀있어 폴란드에서 기증했음을 알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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