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런던 율리시즈 Sep 07. 2017

단풍잎 몇개

미술 에세이

그림을 보는 방법은 다양하다. 그래서 가끔 그림을 눈으로 ‘보는게’ 아닌 머리로 또 마음으로 ‘읽는다’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첫 인상을 통해 그림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려 화가는 아름답게 그리는 단계로 실물과 똑같이 재현하는 노력을 엄청했다. 왜냐하면 자연이 최고의 아름다움이니까 그 아름다움을 화가는 모방하려 했던 것이다. 그 모방 단계를  극복하면 거기에 상징과 알레고리가 등장하기 시작하고 문학처럼 은유가 등장하기도 한다. 나중엔 개념(concept)이 미술에 등장해 교란시켰다. 그러다 이건 너무 문학적이라고 화가와 미술사가들은 반발해 요즘은  ‘그림으로만(pictorial turn)’으로라고 외친 미첼(W. J. T. Mitchell)같은 학자도 있고 보엠(Gottfried Boehm)도 비슷하게 ‘아이코닉 터언(iconic turn)’이라고 주장했다. 영국의  존 버저(John Burger)는 ‘보는 법들(Ways of Seeing)’이란 베스트셀러 책과 텔레비전 다큐멘터리를 방송해 그림을 보는 것은 세상을 보는 방식임을 재미있게 설명했다.



어쨌든, 그림을 볼때 느끼는 관람자의 심리상태나 감정은 어떻게 그림을 보든 무관하게 중요시했다. 거기에서 그 기초가 되는 첫단계, ‘미’를 느끼는 감정은 중요하다. 비록 지금은 ‘미(Beauty)’란 정의조차 어렵고 ‘추(Ugly)’와의 경계도 불분명하며 아예 ‘추’는 ‘미’의 한 부분이라 하기도 한다.



이 ‘우키요 에’ 단풍 그림을 보면서 ‘아 곱고 아름답구나!’를 첫인상에 받는다. 깨끗한 배경색에다 붉은 단풍잎 그 위의 수수한 색의 또 다른 단풍잎. 그리고 극히 단순함. 단풍나무 전체도 아닌 단풍 몇 잎. 그걸로 전체 단풍 나무와 가을 날 붉게 물든 전체 산까지 연결되니까 말이다. 그래서 이 단풍 몇잎은 진리와 세상을 요점으로 이야기한다. 이 그림으로 환유와 제유까지 끌어낼수 있다.



한때 화가들은 실물처럼 똑같이 그리려 애썼다.


고대 그리스의 플리니(Pliny the Elder)는 그의 책 자연사(Naturalis Historia)에서 우리나라의 솔거와 담징같은 이야기를 썼다. 제우시스(Zeuxis)는 포도를 똑같이 그려 새들이 쪼아 먹으려 하였을 정도였다. 그래서 그와 '똑같이 그리기'를 내기한 파라시우스(Parrhasius)의 화실에서 의기양양한 제우시스는 파라시우스의 그림을 보려 그림을 덮은 커튼을 열려고 한다. 제우시스가 커튼을 올리려하자 그때 그는 알았다. 그의 손에 닿은 건 커튼이 아닌 파라시우스의 그림이었음을…



파리의 기메 박물관에서 본 이 ‘우키요 에’ 단풍을 보면서 실물보다 더 아름답다고 느꼈다. 포도보다 더 포도같고, 커튼보다 더 커튼 같은. 그래서 포도도 아니고 커튼도 아닌 그림일뿐인 그림말이다. 이 판화 그림은 그래서 실물인 단풍보다 더 감정을 자극한다. 미술사적으론 별 가치가 없을 이 심플한 그림은 보는 사람을 그저 즐겁게 해주었고 약간의 노스탤지어도 자극하였다.


:::::





매거진의 이전글 '일본풍'의 원조 '우키요 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