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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 율리시즈 Sep 11. 2017

고통의 짐을 내려놓는 곳...

이탈리아 여행 에세이-산 죠반니 로톤도

"고통을 사라지게 만드는 만병통치약은 없을까?"


'아드리아 해'색깔은 늘상 그렇듯 푸르렀다. 나는 이탈리아쪽 해안에서 아드리아해의 수평선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멀리서 몇 시간을 내리달려 온 뒤라 정신이 없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수평선 넘어, 거기엔 크로아티아가 있고 아래엔 몬테네그로와 알바니아 그리고 그 끝에 그리스가 위치해 있으리라. 멀리 수평선만 보일뿐 그 나라들은 보이지 않는다. 로마에서 거의 평행선으로 아드리아해 쪽으로 뻗은 고속도로의 끝자락에 이 ‘알바 아드리아티카(Alba Adriatica)’란 조그만 타운이 있다. 이름에서도 보듯이 이 아드리아해에 면해 있는 리조트 타운이었다. 몇년전 바로 이곳에서 똑같은 호텔에 묵었었다. 그땐 베란다에서 푸른 바다를 그대로 볼수 있는 방을 배정 받았지만 이번엔 운이 따르지 않았다. 건너편 바다넘어 신기한 나라들을 상상하면서 해안을 걸었다. 여름 성수기를 지난 10월초라 한적한 해안길 옆에 경주 삼릉숲 노송들처럼 높이가 7-8 미터나 되는 위로 쭉쭉뻗은 소나무 숲이 있었다. 그 숲에서 찬바람이 일기 시작했고 어둠이 밀려나왔다.


이튿날 새벽 일찍 아침을 먹고 ‘산 죠반니 로톤도(San Giovanni Rotondo)’로 향했다. ‘파드레 비오 성인(삐오. St. Padre Pio)’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한적한 시골에서 또다른 시골을 향해 몇 시간을 오늘도 고속도로 위에서 보내야 했다. 우리나라 동해안 고속도로처럼 이태리 반도의 오른쪽 해안 고속도로인 A14번 도로를 내리 달렸다. 왼쪽으로 푸른 바다가 가끔 감칠맛 나게 언뜻언뜻 보였다가 사라졌다. 중간쯤 가다가 언덕위에 솟은 '로레또 성모님(Our Lady of Loreto)'성당도 보였다. 전설에 의하면 이 성당안에 천사들이 베들레헴의 성 요셉과 성모 마리아 그리고 아기 예수님이 사시던, 즉 성가족(The Holy Family)이 머물던 집을 이곳 언덕으로 ‘고스란히’ 옮겨왔다고 한다. 그러나 역사가들은 십자군 전쟁때 십자군들이 베들레헴의 성가족 집을 하나하나 분리해 옮겨왔다고 하니 과연 천사가 옮겨 온 것이나 별반 다름이 없다고 생각했다. 십자군들은 성지를 지키려 성지에 갔지만 주체할수 없는 신앙심으로 집 전체를 몽땅 이곳으로 옮겨 온 것이다. 그리고 그 위에다가 멀리서 달리는 고속도로에서 보아도 아름다운 성당을 지었다. 신앙만으로 할 수 없는게 뭐가 있을까?


코치(Coach)안에서 비오 성인의 기도 상본(prayer card)에 있는 그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전형적인 남부 이태리인의 얼굴을 지닌 분이셨다. 수염과 뭉뚝하게 솟은 코 그리고 미소짓는 인자한 할배같은 분, 거기에다 프란치스코회의 후드가 딸린 짙은 고동색 수도복을 걸친 성인의 모습은 평생을 단촐하게 사신 검소한 프란치스코회 수도사의 모습 그대로였다. 목적지인 '산 죠반니 로톤도'가 가까워 오자 코치는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방향을 왼쪽으로 틀었다. 조금 더 달리니 거기엔 산 마르코(San Marco)란 타운이 나왔다. 높은 산과 산 사이에 위태하게 서있는 오래된 집들이 보였다. 좁은 도로도 위태하게 꼬부랑 길이었다. 지금부터 고속도로를 씽씽 달리던 코치는 겸손하게 속도를 줄일수 밖에 없었고 런던의 버스처럼 오래되고 좁은 도로를 이리저리 요령있게 달렸다. 중세 산마을의 길가엔 노인들이 노천카페의 테이블을 둘러싸고 담배를 피우며 담소하고 있었다. 남부 이태리의 평화롭고 여유로운 풍경이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비가 내렸다. 아니 폭우처럼 삽시간에 내리 쏟아졌다. 산복도로를 기어 올라가는 50명을 태운 코치가 속도를 더 줄일 수 밖에 없었다. 어슬렁거리며 기어 올라갔다고 해야할까. 산에서 내려온 개울물이 좁고 오래된 도로위를 쏜살같이 흘러 내려갔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갑작스런 소낙비로 뜨겁던 대지에 안개가 뭉게뭉게 피어올라 뿌옇게 변했다. 세상이 갑자기 온통 뿌연 안개로 뒤덥였다. 거기로부터 멀지 않은 '산 죠반니 로톤도'까진 소경처럼 아무것도 창밖으로 볼수 없었다. 신비로왔다. 비오 성인의 순례성당에서 가까운 호텔에 여장을 풀때까지도 빗줄기는 약해졌지만 비는 여전했다. 비를 맞은 우리가 호텔 로비에 들어섰을 때 호텔 벽의 비오 성인 사진이 우리 순례자 일행을 반기듯했다. 간단히 방을 점검하고 내려와 점심을 기다리며 로비의 소파에 앉아 있는데 이태리 노인 순례객들이 떼로 모여 앉아 있었다. 그들은 오래된 거대한 몸통의 LG 텔레비젼 화면속의 프란치스코 교황의 모습을 일거수 일투족 시청하고 있었다. 아, 여기가 남부 이태리로구나. 그제야 실감이 들었다.


비오 성인은 '비오 신부님'이란 글자 뜻 그대로 친근하게 ‘파드레 비오(Padre Pio)’로 잘 알려져 있다. 성인은 이곳 남동쪽 이탈리아의 작은 시골인 ‘피에트렐치나(Pietrelcina)’란 마을에서 1887년 5월 25일에 태어나셨다. 그래서 정식 이름은 ‘피에트렐치나의 비오 성인(St. Pio of Pietrelcina)’이다. 원래 이름은 ‘프란치스코 포르죠네(Francesco Forgione)’였고 부모님은 가난한 농부였다. 위로 형이 한명 있었고 아래로 여동생 세명이 가난한 가정에서 줄줄이 태어났다. 그 외에도 두명의 형제가 더 있었으나 유아기때 모두 죽었다고 한다. 일제시대와 6.25 전후 한국처럼 당시 남부 이태리의 가난했던 생활상을 보여준다.  


비오 성인이 사셨던 프란치스코회 수도원이 있던 산 죠반니 로톤도는 산등성이에 걸터 있었다. ‘비오 성인 순례 성당’도 그 산 중간쯤에 위치해 있었다. 그래서 그리 가파르지 않은 언덕을 아래쪽의 호텔에서부터 올라가야 성당과 광장이 나왔다. 점심을 먹고 다른 일행보다 일찍 그리로 올라갔다. 성당으로 올라가는 언덕은 ‘알바 아드리아티카’에서 본 키 큰 노송과 같이 쭉쭉 하늘로 솟은 사이프레스 나무가 두줄로 정렬해 있어 마치 대통령이 군대 사열을 받을 때 부동자세로 서있는 군인들 같았다. 고흐의 작품에 나오는 높이 솟아 타오르는듯한 사이프레스가 떠올랐다. 성당 광장에 다 올랐을땐 숨이 찼다. 나이는 못속이는가 보다. 잠시 숨을 고르고 산 아래를 내려다보니 자그마한 언덕들이 멀리 펼쳐져 있었다.


비오 성인, 속명인 ‘프란치스코’는 어렸을때부터 신앙심이 깊었다고 한다. 내려오는 말로는 겨우 5살때 하느님께 자기의 전생애를 바치겠다고 결심을 했다고 한다. 겨우 다섯살 꼬마가 어떻게 그런 생각까지 다 했을까? 진짜일까? 기특하다 못해 의심이 갔다. 5살 꼬마라면 한창 응석부리는 나이인데 성인이 될 아이는 어릴때부터 다른가? 산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평화로운 남부 이태리의 농촌 풍경이었다. 오전의 폭우때문에 내려다 보이는 풍경은 더 깨끗하게 느껴졌고 하늘은 더 맑았다. 기적을 많이 보여주신 비오 성인이 우리 일행의 순례를 위해 비를 멈춰 주셨을까? 아니 비를 내려주셔서 아래에 보이는 언덕과 나무들과 꽃들을 깨끗하게 씻어주어 나의 눈에 싱그럽게 보이도록 하신 걸까? 이것도 아니라면, 혹시 내 속세의 눈을 씻겨 주셔서 성인이 사셨던 이곳에서 깨끗한 HD고화질로 이 풍경을 바라볼수 있게 하셨을까? 그래서 자연스레 하느님의 창조물에 경의를 표하도록 하셨을까? 기적이 평생을 따랐던 비오 성인이 사셨던 이곳에서 모든 걸 기적으로 연결시키려는 내 욕망이 강렬해졌다. 그런 한편으로 의문도 하늘로 솟아오른 사이프레스 나무처럼  솟구쳤다.


풍경 사진을 몇장 찍었다. 그리고 찍은 사진을 살펴보았다. 내가 직접 경험한 비 온뒤의 깨끗한 언덕과 마을 풍경, 그 깨끗함을 사진이 다 담아낼수 있을까? 또 내 사진을 본 이들이 내가 느낀 만큼 풍경 사진을 머리속에 그대로 재현하며 깨끗하게 볼수 있을까? 유아기 5살이면 눈에 보이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시기이다. 그럼으로 마음과 영성의 눈도 깨끗하고 맑다고 한다. 그래서 예수님도 성서에서 어린애처럼 되질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수 없다고까지 하셨지 않았는가?  물질에 찌든 속세의 '카타락스'가 얼기설기 늘어붙은 초점 잃은 눈이 아닌 맑고 청정한 새벽 샘물같은 영성의 눈으로 보란 말씀일 것이다. 한편, 프로이트든 라깡이든 정신분석학에선 유아기의 중요성을 무척 강조한다. 우리의 유아기가 우리 생애 전체를 좌우한다고 해도 이들에겐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영국으로 건너 온 ‘멜라니 클라인’은 아예 유아기 정신분석에만 몰두했다. 라깡의 공헌(?)도  유아 성장기를 거울을 이용해 정신분석학 용어로 만든 ‘미러 시기(Mirror Stage)’였다. 그러나 이런 정신분석학이 도움은 되겠지만 오묘한 '인간 존재의 신비'를 과연 풀어 낼수 있을까?


어린 프란치스코는 신앙심이 깊은 부모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리라. 절대적 영향을 준 그의 부모님은 사실 글자를 모르는 문맹이었다. 까막눈이란 옛 노인들의 말씀이 생각났다.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지만 당시 남부 이태리는 산업화된 토리노와 밀라노 중심의 북부 이탈리아에 비해 생활과 교육수준이 많이 낮았다. 그렇지만 문맹인 그의 부모들은 신구약 성서의 이야기들을 낱낱이 꿰고 있었고 자녀들에게 항상 들려주었다. 그건 어느 교리 교사보다도 어느 신학자보다도 가장 효율적인 최고의 교육이었다. 단언컨데 프란치스코의 부모들은 도회의 교육받은 사람들보다 더 성서의 말씀을 가슴에 그대로 담았고 믿었으리라. 그들은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신앙의 신비를 이해했다. 그들은 또 훌륭한 ‘이야기 꾼(storyteller)’으로 성서의 이야기들을 풀어내 어린 프란치스코와 그의 형제들에게 들려주었다. 특히 성모신심이 특별했던 훗날 성인 비오 신부도 어릴때부터 이런 성서의 이야기를 되뇌며 가슴에 담았기에 가능했으리라. 이 화목한 가족들은 모두 매일 미사에 참석했으며 어린 프란치스코는 본당의 복사로 봉사했다.


어렸을 때부터 부모의 영향으로 이 순수하고 신앙심 깊은 프란치스코 어린이는 특별한 은사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그는 가끔 수호 천사를 보기도 했고 성모님과 예수님을 직접 보고 대화까지도 나누었다고 한다. 이런 특별한 경험이 어린 프란치스코에겐 특별하지 않다고 느낀건, '그가 으레 다른 사람들도 그처럼 그렇게 하는 줄' 알고, 다른 이에게 특별히 이런 그의 경험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신심깊은 성가정이었으나 프란치스코의 부모는 너무도 가난했다. 그래서 어렸지만 프란치스코는 산과 들에 나가 일을 해야만 했고 가족 소유의  몇마리 가축을 들판에서 돌보는 일을 했다. 그래서 제때에 정규교육을 받을 학교에 갈수 없었다. 또래의 다른 동네 애들이 학교에서 수업하고 운동장에서 뛰어노는 동안 바위들이 이곳 저곳 솟아있는 비탈진 언덕에서 어린 프란치스코는 가축을 돌보았다. 목동이란 참으로 낭만적인 단어지만 야산에서 가축을 돌보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으리라. 그리고 그는 아직 어린애였다. 엄마품안에 재롱을 부려야 하는...


카메라를 집어넣고 다시 얕은 산아래 언덕들을 내려다 보았다. 푸른 바다와는 또다른 자연의 풍광이 펼쳐졌다. 프란치스코가 가축들을 돌보았던 언덕들도 비슷했으리라. 아름다웠다. 속세의 때묻은 나도 이런 아름다움을 느끼는데 어린 프란치스코는 오죽했으랴. 프란치스코는 하루 종일  가축을 풀어 놓고 언덕의 바위위에 앉아 이 아름다운 대자연과 같이 호흡하며 대화를 했으리라. 그리고 계절마다 바뀌는 들판과 언덕위의 색깔들을 신비한듯 감상하고, 날마다 자라는 나무와 풀들을 관찰하며 높고 푸른 하늘 아래에서 잠자리전 부모가 들려주던 성서의 이야기들을 되새김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이 아름다운 자연을 지어낸, 사계절을 관장하시는 그분에 대한 호기심도 발동했으리라. 문맹인 부모가 들려주는 성서의 이야기들을 이 대자연에 자연스레 연결시키고 창조주 하느님과 그분의 구원사업의 깊은 뜻을 직관(intuition)으로 알아차렸을 것이다. 어린 프란치스코의 백지처럼 하얀 순수한 영혼은 솜이 물을 흡수하듯 이 대자연의 신비로움과 구전으로 전수받은 성서의 말씀으로 세상과 인간의 신비를 보는 영성의 눈은 더욱 밝아졌을 것이다. 나는 왜 그분을 위해 평생을 살겠다고 이 어린 꼬마가 당돌하게 말했는지 이해가 갔다.


하지만 이런 특별한 프란치스코에게도 하느님이 모든 걸 주시진 않았다.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듯이 순수한 영성의  눈으로 세계와 자연을 바라본 프란치스코의 영혼과는 달리 그의 육체는 병약했다. 겨우 6살때 위장염(gastroenteritis)으로 고생했고 10살땐 장티푸스(typhoid fever)를 앓았다고 한다.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힘든 고통이었을 것이다. 왜 이런 시련을 가난하고 착한 어린애에게 주셨을까? 하느님의 신비를 인간의 논리로 대입해 수학문제 풀듯 풀기는 힘들다. 가난한 가정에다 병약한 몸까지, 역설적으로 어린 프란치스코가 경험한 고통은 훗날 비오 성인이 고통받는 이들을 누구보다 더 깊이 이해하는 원인을 제공했으리라. 또 여기에 성인의 싹이 있었으며 그 성인본성이 있었지 않았을까? 한편 하느님은 신심이 깊어도, 순수한 마음을 지녀도 이렇듯 가차없다. 그러나 누가 그 분의 깊은 속뜻을 헤아릴까?


욥의 별 도움 안되는 친구 ‘초파르’까지도 이렇게 말한다.


“자네가 하느님의 신비를 찾아내고 전능하신 분의 한계까지도 찾아냈단 말인가?    

그것이 하늘보다 높은데 자네가 어찌하겠는가? 저승보다 깊은데 자네가 어찌 알겠는가?”

(욥기 11:7-8)



늦게야 학교로 간 프란치스코는 3년의 정규교육을 겨우 받은 1897년 그의 부모에게 처음으로 수도사(a friar)가 되고 싶다고 고백했다. 신심깊은 부모는 기뻤다. 당장 멀지않은 수도원을 찾아갔고 아직도 어린아이인 아들의 입회 여부를 알아보았다. 수도원 측에선 프란치스코가 어리지만 충분히 자격이 있음을 심사후에 전했다. 다만 학교 교육연한이 짧아 몇년의 교육을 더 받은 뒤라야 입회할수 있다고 단서를 달았다. 프란치스코의 수도원 입회를 준비시키기 위해 그의 부모는 그에게 개인교습을 시켰다. 그러나 가난한 농부인 부모가 감당하기 힘들어 학비를 벌기 위해 아버지가 대서양 넘어 멀고 먼 미국으로 떠났다. 당시 남부 이태리 사람들은 이민을 많이 갔다. 미국으로, 남미로, 그리고 후에 산업화된 독일과 영국으로 더 나은 삶을 찾아 떠났다. 머나먼 이국에서 아버지가 번 돈으로 프란치스코는 교육을 더 받을 수 있었다. 마침내 15살이 된 해에 고향집에서 멀지 않은 모르코네(Morcone)에 있던 프란치스코회 카푸친회(the Capuchin friars)에 프란치스코는 수련수사로 입회했다. 그리고 나중에 그의 수도명을 교황 비오 1세를 따라 ‘비오(Pio)’로 바꾸었다. 어린 프란치스코에서 이젠 어엿한 ‘수사 비오’가 된것이다.


그러나 그의 육체적 고통은 계속 따라다녔다. 비오 수사가 17세 되던 해에 또다시 몸이 심하게 아팠다. 당시 그의 몸은 너무나 약해져서 오직 우유와 치즈만 소화할수 있었다고 한다. 공기 좋은 산으로 거처를 옮겨 봤지만 나아지지 않자 수도원은 그를 고향집으로 되돌려 보냈다. 그렇지만 사제서품을 위한 공부는 거기서도 계속되었다. 1910년 우리나라가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합병되던해에 비오 수사는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렇지만 건강은 계속 좋지 않고 그를 괴롭혔으며 그래서 특별히 고향집에 머물며 다시 건강할 수 있도록 허락되었다고 한다.


그후 다시 수도원으로 돌아온 비오 신부는 어느날 고백성사를 듣는 도중 손과 발에 심한 통증을 느꼈고 그게 오상(the stigmata)임을 알았다. 피가 흘러내리는 오상의 경험은 몹시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하지만 오상의 냄새는 향기로운 장미의 냄새였다. 피는 계속 흘렀음에도 감염되는 일은 없었다. 어릴적 수호천사를 만났던 비젼(vision)을 남에게 말하지 않았던 것처럼 이 오상도 처음엔 남에게 말하지 않았고 숨겼다고 한다. 오상의 기적이 알려진 뒤에 이름난 의사들이 이를 조사 검진하였고 오상의 흔적부분이 완전하게 동그랗다는 것에 매우 놀랐다고 한다. 이 오상의 기적이 알려지자 많은 사람들이 멀리에서부터 몰려들었다. 그들은 고백성사를 보았으며 그의 미사에 참석했다고 한다. 점점 이 기적의 프란치스코회 신부의 이름이 알려졌고 엄청난 인기에 바티칸 당국은 당연히 염려했으며 그와 관련된 일들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의 활동도 잠시 제한시키고 사제로서의 성무활동도 중단시켰다. 그렇지만 비오 성인은 항상 가톨릭 교회 당국에 복종했으며 자신에게 일어난 오상과 다른 기적에 대한 모든 조사에 적극 협조하였다. 후에 바티칸의 조사결과는 이런 오상과 기적이 날조와 속임수가 아니라고 발표하였다. 그 후에도 그의 기적과 치유가 계속되자 ‘교황 바오로 6세(Pope Paul VI)’가 다시 정확하게 이 현상과 기적을 조사할 것을 지시했고 그 결과발표에는 이런 현상에 우려할 위조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비오 성인은 사제로선 처음으로 그리고 프란치스코회의 창시자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처럼 이 오상의 은사를 받은 것이었다. 또다른 많은 기적들도 목격이 되었는데 한번은 동료 수도사가 비오 수사가 엑스타시로 공중에 붕 뜨는(levitation)것을 직접 목격했다고도 한다.


1947년 훗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된 ‘카롤 보이티와 신부(Fr. Karol Wojtyla)’가 이 산 죠반니 로톤도에 계신 비오 신부를 찾았다. 이때 비오 신부는 예언했다. ‘카롤 신부는 훗날 가톨릭교회의 수장이 될것이다’라고... 1978년 거짓말처럼 이 폴란드 신부는 교황에 선출되었고 그럼으로 비오 성인의 예언은 적중했다. 그런 관련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2002년 6월 16일에 이 오상의 비오 성인을 성인품에 올렸다.


또 많은 사람들은 이 비오 성인을 오상의 기적만을 기억하지만 사실 그에게 일어난 기적뿐만 아니라 그는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한 병원도 산 죠반니 로톤도에 1956년 세웠다. 지금 순례성당 광장의 위쪽 산등성이에 보이는 병원이며 큰 병원 건물이 몇개 동으로 나뉘어 서있었다. 비오 성인은 1968년 9월 23일에 선종하셨다.  그의 장례식엔 십만명이 넘는 사람이 참석했다고 한다.


난 원래 프란치스코회 수도원 성당이 있던 곳으로 갔다. 예약한 미사가 오후 4시에 있었다. 우리 일행 50여명이 자리에 앉자 성당이 꽉찰 정도로 작았다. 바로 이 성당이 원래 비오 성인이 매일 미사를 드리던 바로 그 성당이었다. 곳곳에 그분의 흔적은 남아 있었다. 순례자들이 넘치자 바로 그 옆에 더 큰 성당이 지어졌다. 수많은 사람들이 비오 신부의 미사에 참석하고 그의 강론을 들으러 몰려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이 새 성당까지도 몰려드는 순례자들을 감당할수 없자 한 100미터 떨어진 곳에 더 큰 순례자 성당을 세웠다.


미사가 끝난 후 우리는 박물관처럼 개조한 성당 뒤편의 옛 수도원을 방문했다. 비오 성인이 생전에 쓰시던, 그래서 지금은 유물(relic)이 된 유품들을 전시해 놓았다. 성인의 소박한 침실도 있었고 여러 쓰시던 유품도 전시돼 있었다. 우리 일행은 또 특별히 성인에 관한 기록 영상을 보았다. 그리고 미국인 담당자가 성인이 평소에 쓰셨던 십자고상과 미튼(mitten. 손가락부분을 자른 장갑. 옛 버스 안내양들이 쓰던 장갑과 비슷. 비오 성인이 오상으로 피가 흘러내리자 이 장갑을 사용하셨음.)을 보여주셨다. 난 이 성인이 쓰신 고동색 장갑과 십자가를 내 가슴에 대었다. 뭔가 형언키 어려운 따뜻함이 몰려왔다. 성인의 오상을 감싼 이 장갑이 거창한 기적의 흔적을 간직한 유품이라기 보다도 먼저 내겐 고통의 상처를 감싼 장갑이었다는 것에 또 병원에 일하면서 고통받고 상처받은 환자들을 감싸는 일을 하는 사제로 나에겐 상징적이었고 특별하였다.


광장을 가로 질러 순례성당으로 걸어갔다. 광장 왼편에 높은 십자가가 서있었고 8개의 대형 종들이 걸려있었다. 산쪽엔 이 지방의 상징인 올리브 나무와 물이 졸졸 흐르는 인공 개울물이 지나고 있었다. 그리고 광장의 끝에 둥글 둥글 로마네스크 아치들이 보이는 현대적 성당이 있었다. 파리의 퐁피두 미술관, 일본 간사이 공항, 뉴욕 타임즈 본사 건물 그리고 런던에서 가장 높은 빌딩 ‘샤드’를 설계한 유명한 이탈리안 건축가 ‘렌조 피아노(Renzo Piano)’의 설계로 건축된 ‘비오 성인 순례 성당(St. Pio Pilgrimage Church)’이었다. 성당 오른쪽에 내부 지하 성당으로 내려사는 입구가 있었다. 긴 복도 양편으로 오른쪽에는 비오 성인의 일대기가 왼쪽에는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일대기가 화려고 은은한 모자이크가 벽에 부착돼 있었다. 한장면 한장면 그의 생애를 상기하며 걸어내려갔다. 마치 성인의 일생이 순례자를 인도하듯 느껴졌다. 지하 성당엔 아니나 다를까 성인의 일생에 감동받은 수많은 순례자들이 성당 정면 유리벽 안에 안치된 비오 성인의 유해를 보기 위해 긴 줄을 지어 서있었다. 워낙 순례자들이 많아 줄은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질 않았다. 지하성당은 모자이크 벽화처럼 은은하면서도 화려했다. 역시 똑같은 금박으로 입힌 천장엔 99개의 램프가 천장으로부터 내려와 공중에 붕 떠 순례자들을 비추고 있었다.


비오 성인의 유해가 드디어 보였다. 그러나 내리 밀며 몰려드는 내 뒤의 많은 순례자들 땜에 그 앞에 오래 머물질 못하였고 지나가면서 볼수밖에 없었다. 유리창 안에는 프란치스코회의 고동색 수도복을 입은 비오 성인의 육신이 반듯이 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계셨다. 얼굴부분은 생전의 모습 그대로 재현한 특별 가면이었고 장갑(mitten)을 쓴 성인의 손가락 부분은 검게 보였다. 순례자 대부분이 성인의 유해 사진을 찍었다. 스테프가 있었지만 특별한 제지도 없었다. 돌아가셔도 성인은 여전히 유명인사였다. 그리고 많은 순례객들이 여기에서 치유를 받았다고 전한다. 순례객에 떠밀려 성당밖으로 나와 뒤를 돌아보니 뒤따라 오던 이태리 할매는 눈물을 펑펑 쏟고 계셨다. 안타까왔다. 무엇때문에 이 할매는 울고 계실까? 비오 성인이 경험한 고통을 돌아보면서 우실까? 아니면 자신이 경험한 고통을 돌아보며 비오 성인을 보자 그만 와락 울음이 터져 나왔을까? 가만히 할매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좀전 수도원에서 비오 성인의 ‘장갑’으로부터 받은 따뜻함을 할매에게 전하고 싶었다. 다시 지하 성당의 벤치로 돌아갔다. 그리고 죽은자를 보러 길게 늘어서서 조금씩 앞으로 움직이는 산자들의 행렬을 물끄러미 보았다. 저마다 가슴에는 무슨 무슨 그들만의 지향(intention)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나도 런던으로부터 많은 신자들의 지향들을 들고 왔다.  가족의 건강, 자신의 건강, 돌아가신 부모님을 향한 기도, 앞으로 살아갈 자식들을 위한 기도…  기적처럼 모든게 잘 되리라 가슴에 품은 지향을 쏟아부으며 순례자들은 마음속으로 비오 성인과 대화하고 있을 것이다. 왜 그럴까? 왜 이 돌아가신 성인에게 말을 걸까? 또 우리 사정을 얘기할까? 왜 또 이 성인은 죽었음에도 이토록 친근할까? 말 못할 사정을 가장 신뢰할 수있는 친구에게 털어 놓듯, 이 친근한 성인에게 무엇이든 털어 놓으면 이분이 하느님께 간구해 성사시켜 주리라는 믿음이 일어났다. 왜 그럴까? 먼저 기적이나 치유를 말하기 전에 이 비오 성인만큼 평생을 고통받은 사람은 별로 없다는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비오 성인은 50년이란 긴 세월을 오상으로 고통받았다. 오상은 기적의 기쁨이기전에 그에겐 육체적 고통이었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 오상의 대못을 상상해 보라. 끔찍하다. 말그대로 고통이란 고통이다. 쾌락이 아니다. 병약했던 성인이었고 오상의 고통을 받은 성인이기에  그만큼 고통받는 이들을 이해하고 감싸주는 은사도 받았다고 믿는다. 그랬기에 살아 생전에도 구름떼같은 순례자들은 성인을 믿고 고통의 완화를 위해 이곳을 오지 않았던가?


저녁을 먹은 뒤 호텔을 빠져나와 다시 광장으로 올라갔다. 루르드나 파티마처럼 촛불행렬기도가 있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토요일 밤에만 행렬이 있고 그날밤에 행렬은 없었다. 지하 성당에서 로자리오 기도가 있다고 누군가 일러줬다. 다시 모자이크 성화들을 양편으로 읽으며 지하성당으로 내려갔다. 이태리어로 기도가 시작되어 도통 이해할수 없었다. 성당에 앉을 자리도 없이 순례자들로 꽉차 있었다. 뒤편에 서서 가만이 이태리어 로자리오 기도의 낭낭한 소리를 즐기고 있었다. 중앙의 제대 뒤 유리벽 안엔 비오 성인이 그대로 누워계셨다. 기도가 끝나고 광장으로 올라오자 밤이 더욱 짙어 졌다. 낮에 보았던 그 언덕과 들판도 몇개의 불빛이 듬성듬성 보일뿐 런던의 야경과는 비교도 안될만큼 어두웠다. 이 어둠속에서 병원에서 고통받는 환자들이 떠올랐고 다른 말못할 이유로 고통받는 이들도 기억했다. 고통받는 이들은 어둠속에서 빛을 갈구한다. 진보된 의료기술과 과학으로도 치료안되는 육체의 병은 아직도 엄청많다. 마음의 고통은 말할 것도 없다. 그래도 오직 현대 의료기술과 과학만이 ‘빛’이며 ‘치유’라고  순진하게 믿고있는 사람들도 수두룩하다. 그러나 선진국인 영국의 병원도 아픈 사람들로 항상 만원이다. 세상에 그만큼 아픈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이 고통의 만병 치유약은 없을까? 이런 커다란 의문이 뜬금없이 일었다. 그렇기에 비오 성인의 오상이 뜻하는 고통을 신학적으로 풀어보면 어떨까? 사실 여길 찾는 수많은 순례객 모두가 병의 치유를 위해 순례왔다고 할수는 없다. 하지만 고통은 누구나 다 겪었고 또 겪을 것이다. 인간이 완전하지 않는 이상 고통은 필요악(necessary evil)인 건 진리이다.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는 성서의 말씀을 다시한번 묵상했다. 왜 그리스도는 우리 모두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만 '자기 제자'라고 하셨을까? 무겁고 거추장스러운 십자가를 벗고 따를 순 없을까? 무엇보다 고통을 사라지게 할순 없을까? 그러나, 우리 인간에겐 운명처럼 주어진 이 십자가를 내던져 버릴 순 없다. 구약성서의 예언자 '요나’처럼 세상 끝까지 고통을 피해 도망가도 나의 십자가는 거기에 우뚝 서있을 것이다. 한숨이 슬쩍 터져 나왔다. 눈을 감았다. 어둠속에서 다시 생각했다.


'혹시 자신의 십자가를 평생에 걸쳐 묵묵히 지고 가신 비오 성인은 이 고통의 치유를 ‘고통’으로 극복하신게 아닐까?'


사라지길 바라는 그 고통이 나의 '적'이고 그 원인이 집착이라면 칼을 들어 끊어버리면 그만일까? 다시 고통이 일어나지 않을까? 왜 그리스도는 그 고통(십자가)을 지고 가야한다고 하셨을까? 십자가가 ‘고통의 상징’이라면 바로 그 십자가가 ‘치유의 약’도 되는게 아닐까? 예수님이 죽음으로 죽음을 극복했듯, 고통을 고통으로 극복하는 '역설'이 진리 아닐까? 이걸 비오 성인은 일찍이 깨달았음에 틀림없다. 다시 비오 성인의 유물인 피묻은 장갑과 관상하시던 십자가를 떠올렸다. 


그렇다! 나의 십자가는 나의 십자가로 극복한다는 역설이 여기 있었구나 생각했다. 십자가의 고통은 십자가의 희망이고 치유이다. 그래서 돌아가신 지하성당의 비오 성인이 이렇게 말씀하시는게 들렸다.


‘고통만 보지말고 희망도 같이 보아라.’


박필립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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