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가 노희준의 전국책방탐방 프로젝트3
대전에 도착한 것은 늦은 점심 무렵입니다.
무척 배가 고팠던 관계로, 도착하자마자 냉면집으로 향합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저로서는 말로만 듣던 <사리원 면옥>집입니다.
"사리"가 고유어라는 거 알고 계셨나요? 많이들 일본말로 아시던데. 왜 "몸사리다"라고 하잖아요? 사리는 "무언가를 동글게 말다, 감다"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털실사리라고 하면 털실 한 뭉치를 뜻하게 되겠죠.
그래서, 고로, "사리면"은 "역전앞"처럼 중복된 말이 아니라 문법에 맞는 표현이라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라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문법이야 어쨌건간에 제 입맛에는 딱 맞았다는 것입니다. "사리원 면옥" 냉면의 특징은 "사리"에 있었습니다. 정말로 참말로 쫄깃쫄깃합니다. 함흥냉면은 너무 잘고, 평양냉면은 압착면의 묘미가 없다고 생각하시는 분이라면 정말 감동하실듯합니다.
어찌나 감동했는지 후다닥 다 먹어버린 저는 이래서 지역문화는 중요한 거라는 일장연설마저 하게 됩니다. 냉면 한그릇에 참으로 침소봉대라고 하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지역문화(Localism)는 곧 다양성(Diversity)이기 때문이죠. 간판만 다를뿐 다 거기서 거기인 서울의 음식점들을 생각해본다면 "사리원 면옥"이건, "사리사리면사리옥"이건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어쨌거나 특색있는 냉면 한그릇에 대전의 이미지가 급상승합니다. 사실 경유지로 몇번, 프로젝트 회의 때문에 한번 들러본 것 빼고는 대전에 온 적이 많지 않습니다. 그동안 대전은 저에게 여행지로서는 뭔가 부족한 곳이었던 셈이지요.
하지만 대전은 뭔가 심심할 것 같다는 저의 선입견은 <도어북스>에 도착하자마자 두번째 주먹을 맞게 됩니다. 훅에 뒤이어 스트레이트를 맞게 된 거죠.
좌측하단에 저 자랑스러운 설명서 보이십니까? 그렇습니다.
<도어북스>는 남한에 있는 독립출판물 전문서점입니다.
독립출판물이야 많이 보았지만, 오직 독립출판물만을 취급하는 서점은 처음 보았습니다. 그제야 제가 독립출판물을 훌륭한 시도라고 생각하면서도, 알게 모르게 얕잡아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냥 반재미삼아 갖다놓는 것이지, 진지하게 이윤을 바랄 수는 없을 거라는 건방진 선입견이 마우스피스처럼 입밖으로 튀어나갑니다. 이후 저는 줄곧 입을 벌린 채 서점 안의 책을 구경하게 되지요.
사진을 보셨으니 아시겠지만 <도어북스>에 있는 독립출판물의 퀄러티는 매우 높습니다. 독립출판물이 기존 기업형 출판물의 모방이 아니라 대안이자 미래로 형성되고 있는 것임을 알려주는 대목입니다. 이들은 기업보다 책을 더 "잘" 만들 수 있습니다. 다만 기업형으로 책을 만드는 것을 "싫어할" 따름이죠. 왜냐하면 기업에서 만든 책들은 지루하거든요. 많이 팔릴 것을 염두에 두느라 내용도 형식도 독특한 점이라곤 찾기 힘들죠.
아무도 예상못한 7호라니. 빵 터졌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잡지 제목 정말 맘에 듭니다.
이것은 도마입니다.
이런 잡지들은 80년대에 무크(Mook)지를 떠올리게 합니다. 출판사를 거치지 않은 비정기간행물의 출현이 독재정부의 검열 때문이었음을 생각해본다면 독립출판의 활성화는 "이윤이라는 지루한 괴물"에 맞서싸우기 위한 것이 아닐까, 또 한번 침소봉대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렇듯 섹시한 인문학 잡지도 있네요. 출판사들은 왜 이렇게 못만든답니까?
농담처럼 한 말이지만 제가 이렇게 생각하는데는 나름의 맥락이 있습니다. 이들은 결코 기성세대처럼 디지로그(Digi-log)하지 않다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젊은 세대 중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디지털에 등을 돌리고 아날로그로 복고하고 있는 것이라는 평가를 만약에 내린다면, 그리하여 전자책이 웬말이냐 책은 여전히 종이책이라는 판단을 하고 있다면 기성세대의 견강부회라 이 말씀입니다.
제 가슴을 덜컹거리게 만든 <오빠일기>라는 책입니다. 뭐 이런 책이 다 있나 신기해서 집어들었더니 서점주인장이 설명을 해주십니다. 젊은 나이에 오빠를 잃은 여동생이 낸 책이라고요. 오빠가 어린 시절에 썼던 일기가 그대로 수록돼 있습니다.
엄마 이름의 한자가 무슨 뜻인지 몰랐던 딸이 낸 책이라고 합니다.
내용은 물론 여행지에서 엄마에게 보냈던 편지와 가족의 소소한 일상입니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런 개인적인 내용을, 더구나 아이가 쓴 일기를 왜 책으로 내냐고요. 이 책이 서로 다른 경험을 가진, 혹은 당신을 잘 모르는 사람에게 어떤 공감을 가져다줄 수 있겠냐고 말이지요.
하지만 정말 그렇습니까? 우리는 이미 사이월드에, 네이버 블로그에, 그리고 트위터와 페이스북에, 개인적인 이야기를 많이 써오지 않았습니까? 개인일기장을 공개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은 영문을 알 수 없는 넑두리를 올리는 일도 흔하지요.
그렇습니다. 이런책들은 종이책이지만 그 감수성은 분명 인터넷의 경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보편타당한 공감의 법칙에서 벗어나 개인적이고 규격화되지 않은 방식으로 교감하고 소통하려는, 분명히 이전의 세대와는 구분되는 형식의 출판물입니다.
복고 같지만, 이것은 복고가 아닙니다. 디지털에 매력을 못느낀 청춘들이 아날로그로 돌아가려는 무의식을 표출하고 있는 게 아니라, 기업형 출판사와 포털사이트가 좌지우지하는 시장에 희망이 없음을 깨달은 인재들이 자신의 뜻을 펼치기 위해서 찾아낸 방식이 아날로그 책방일 따름입니다.
지난주 천안에서 보셨던 <허송세월>과 마찬가지로 이곳은 책방이자 작업실입니다. 이들은 모두 실력있는 편집자이자 북디자이너로 소속되거나 착취받지 않으면서 자신의 작품에 몰두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 것뿐입니다. 이를테면 다국적종자회사로부터 독립하여 근거리 유기농(Local organic)을 달성한 것과 하등 다를 바 없는 성과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성과가 5년 뒤, 10년 뒤에 만성적인 출판계불황을 타파할 강력한 무기가 될 것임을 저는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분명히 말해두지만, 종이책의 영역에서가 아니라 디지털책의 영역에서 말이죠.
5년 뒤에 기존의 출판시장은 심각한 지각변동을 겪게 될 것입니다. 스마트폰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웨어러블과 플렉서블 디스플레이가 차지하게 되면 말입니다. 이미 휘거나 접히는 디스플레이 개발에 성공하였고 이 기술은 결과적으로 스마트폰을 쓰던 모든 사람들이 비닐처럼 얇은 전자노트를 들고다니는 현실로 나타날 것입니다.
10년 뒤가 되면 대부분의 국민들이 종이책과 매우 흡사한 형태의 사물-인터넷-책을 소유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기업형출판과 인터넷서점은 입지가 불안해지고, 독립출판의 형식으로 만들어진 전자책을 서비스하는 플랫폼이 부상하게 됩니다. 한마디로 지금은 정당한 대가를 받고 있다고 말할 수 없는 작가와 프리랜서 책 제작자, 일러스트레이터들의 세상이 새로운 디지털 환경에서 구현될 거라 이 말입니다.
이것은 디지로그가 아니라 아나디지털(Ana-Digital)입니다. 물론 아날로그의 약자입니다만, "Ana"에는 "반대한다"는 뜻과 "반반씩"의 뜻이 모두 있지요. 현재에 반발하여 과거로 돌아간다면 그것은 회피거나 퇴보일 뿐입니다. 진정한 혁명은 "기존의 기준을 무력화"시키는데 있지요.
이들은 자신들만의 오프라인 경험을 토대로 기성의 아날로그 세대는 결코 해낼 수 없는 혁신을 이룩할 겁니다. 물론 오프라인 영역에서가 아니라 온라인 영역에서 말이죠. 혹은 두 가지 영역이 연결된 Off-line to On-line의 영역에서 말이지요.
미래의 빛을 향해 헤엄치는 저 자유로운 몸짓을 보십시오.
삼포 세대를 넘어 오포 세대라고요? 하지만 이분들의 슬픔은 보랏빛입니다. 제가 봤을 때는 조금도 비관적이지 않아요.
자, 지난번에 말씀드렸듯이 저는 4월 30일부터 5월 8일까지 약 열흘에 걸쳐
이곳 <도어북스>에서도 할 예정인데요, 두곳으로 분할된 공간을 애매해하는 저에게 책방주인이 아이디어를 줍니다. 무대를 사각형의 모서리 지점에 두면 된다고 말이죠.
자, 바로 이 각도에 두면 많은 두 공간을 모두 객석으로 사용할 수 있겠죠.
다음주에는!
전국책방순회콘서트의 정확한 일정과 시간을 공개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