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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희준 Apr 07. 2016

재미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가르쳐드립니다 합자회사  1화

노희준




#1. 남극곰과 북극펭귄  



그날 밤 혼자가 둘이 된 건 우연이었다. 하지만 둘이 넷이 된 건 김치전에 김치가 들어가듯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 왜 펭귄은 북극에 안 살아? 왜 북극곰만 있고 남극곰은 없지? 


하고 뜬금없는 질문을 날린 건 똘끼의 욕망으로 가득 차 있지만 비교적 건전하고 진부한 사고밖에 할 줄 모르는 싱어송라이터 밤비였고, 이제는 제발 그만두자, 그만두자 하면서도 예쁜 여자가 지나가면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돌리듯 모태 설명충 DNA의 명령을 어기지 못한 것은 나였다. 와중에도 좌중을 의식해 최대한 짧게, 핵심만을 전달하는 배려를 잊지 않았으나 그럼에도, 그런 나의 갸륵한 성의를 현지가 그냥 보아 넘기지 않은 것은 물론이었다. 


- 데려다가 풀어놓으면 되지. 중국에 샤오미가 있고, 한국에 나 같은 화가도 다 사는데 펭귄이 북극에 못 살 게 뭐야? 와이 낫?  


- 아 저놈의 와이 낫. 잘 알지도 못하면서 뭐든지 깔보는. 


- 남극은 대륙이지만 북극은 바다야. 바다의 표면이 얼어붙은 거라고. 바닷속은 땅속보다 따듯해서 북극의 날씨는 남극만큼 혹독하진 않지. 북극곰이 남극에서 살 수 없는 이유야. 펭귄처럼 수백 마리씩 떼로 다닌다면 모를까. 


- 떼로 다니면 되지. 


- 너 북극곰 한 마리가 얼마나 먹어대는 줄 알아? 


나는 한번 더 짧고 정확의 내공을 선보였으나 물론, 재미없으면 진리 따위 개도 안 줄 인간들이 귀담아들을 리 없었다. 이 동네에서 진지로 먹고 들어가려면 ‘덕’스럽기라도 해야 했다. 전업 음모론자 헌승처럼. 


- 북극에 펭귄 풀어놓은 적이 있는 걸로 아는데? 


- 정말? 


- 대박. 


- 성공했대? 


- 성공한 걸로 아는데? 꽤 오래된 얘기지 아마? 


나는 스마트폰을 애들에게 보이지 않게 기울여 인터넷을 검색했는데 그럼 그렇지, 오래된 건 맞는데 그건 1938년에 출간된 <파퍼 씨의 열두 마리 펭귄>이라는 동화의 내용이었다. 리처드 옛워커의 마지막 작품으로, 2011년 짐캐리 주연의 <파퍼씨네 펭귄들>로 영화화된 바 있다…. 그러든지 말든지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기의 귀재인 현지가 타이밍을 놓칠 리 없었다. 


- 그것 봐. 그럴 줄 알았어. 역시 펭구인은 마이 쎄임 훼덜! 


설마 내가 네 영어를 못 알아듣는다고 생각할까 봐 앞으로 네 모든 영어의 스펠링을 밝히도록 하겠다. 그러니까 Same Feather라니, 펭귄이랑 너랑 같은 종류면 너도 귀엽다는 말이니? 


길이 아니면 어디로든 가는 건 친구들의 천성이자 습속이었다. 얘기는 남극곰 같고 북극펭귄 같은 주변의 아는 애들 얘기로 한참이나 전개됐다가, 아티스트에게 북극 탐사를 시켜주는 국가지원프로그램이 있다는둥, 북극 빙하로 조각을 하면 녹을까 안 녹을까 내기하자는 전혀 실현가능성 없는 제안을 거쳐, 뭐 좀 재미있는 일 좀 없을까에서 잠시 땀을 들였다가 한국의 X같은 문화예술풍토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갔다. 


- 교육의 실패야. 겟 아웃 오브 더 커보드! (Get out of the cupboard!) 


- 실패가 아니라 성공이 아닐까. 


- 스트리밍 서비스는 왜 해가지고. 건당 삼전이라니. 나는 일원 짜리도 못 보고 자랐는데. 지금이 일제강점기냐, 전을 쓰게? 


- 아 씨발 요즘 왜 통 그림이 안 팔리지. 


- 얼마 전에 디자인 의뢰 들어왔다매. 


- 틀어졌어. 


- 왜? 


- 내가 너무 고퀄이라 부담스럽대. 크크크. 


- 가격 낮추려고 수작 부린 거 아닐까? 


- 그게 아니라 지네 디자인 컨셉이랑 안 맞는다잖아. 커먼(common)들한테는 어려울 거라고. 촌스러운 게 컨셉이라는데 어쩌겠어. 


- 얼마 전에는 강남에 있는 재즈클럽에서 노래하는데 주인이 오더니 손님이 대화에 방해되니까 볼륨 좀 줄여달라고 했다더라. 내가 무슨 텔레비전 스피커냐 볼륨을 줄이게? 


- 말하는 놈이나 전달하는 놈이나 쯧쯧. 


- 그럴 거면 뭐 하러 클럽에 오고, 뭐 하러 클럽을 하냐? 


- 대한민국에서는 나처럼 너무 퀄러티가 높아도 굶어죽는다니까? 


- 클럽에서 디너를 기본으로 팔질 않나. 그럴 거면 식당을 할 것이지. 


- 외국 작가라니까 더블업 와인 오프너(Doble-up Wineopener)를 삼십만 원에 판대도 줄 서는 병신들 크크크. 


- 스테이크 파는 집에서 왜 뮤지션한테는 감자튀김만 주냐? 


- 아, 나도 남편이 그림 사서 그림값 높여줬으면 좋겠다. 브랜드 뉴 미 스위리. (Brand new me, sweety) 


- 맥주도 카스만 갖다 준다니까? 두 병째부터는 돈 내라면서! 


- 하긴 나 같은 고퀄을 알아볼 남자가 쉽겠어? 왓다확! (What the Fuck!) 


- 재즈클럽에서 가요가수를 부르질 않나. 걔네한테는 수입맥주 주고! 


- 프랑스 갔을 때가 좋았는데. 파리에서 동양 여자는 페이버릿(favorite)이지. 한국 남자는 언더덕(under-dog) 중에서도 언더덕이야! 


늘 꼬박꼬박 받아주는 헌승도 입을 다물었다. 세 개 채널 정도는 우습게 동시 시청하는 나로서도 이럴 땐 기브업이었다. 빙긋 웃으며 술이나 마시는 수밖에. 간만에 단둘이 건배 한번 하려는데 헌승이 진지해져 있었다. 이번에는 또 무슨 음모론이냐? 동양 남자가 성적으로 열등하다는 인식은 검거나 하얀 제품밖에 못 만드는 초콜릿회사의 오랜 이데올로기 조작의 소산이다? 


- 내가 오랫동안 꿔오던 꿈이 있는데 말이야, 친구들아 혹시 내가 좀 길게 얘기해도 되겠니?


- 오빠니까 특별히 용서해주께.


- 와이낫? 


헌승은 다소 장황하게 서두를 늘어놓았는데 다행히도 음모론은 아니었다.  





- 그러니까 일층에 커다란 홀을 두고, 거기서 아무 아티스트나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거지. 춤추고 싶은 사람은 춤추고, 연주하고 싶은 사람은 연주를 하고, 그림도 그리고 글도 쓰고….


- 뭐야 그런 아티스트들의 신성한 작업을 퍼포먼싱으로 만들 수 있다는 발상 자체가….


- 아니 아니, 아티스트들의 작업실은 위쪽에 따로 있지, 건물 제일 위쪽에 둘 거야. 홀은 그냥 아티스트들이 즉흥으로 뭔가를 할 수 있는 공간이고, 뭐 물론 쇼케이스나 북토크 같은 정규적인 행사를 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일층에는 홀을 두고 카페에서 사람들이 그 광경을 볼 수도 있게 하고, 홀 주변에는 상점들을 두어서 책과 음원과 수공예품 등등을 살 수 있도록 할 거야. 


이층에는 고뇌에 빠진 예술가를 바라보며 술을 마실 수 있는 바를 두고, 삼층부터는 강좌를 열 거야. 인문학 강좌, 음악, 미술, 예술에 관한 재미있는 프로그램을 많이 만들어서. 선생님은 건물에 상주해있는 예술가들이 맡아도 되고, 물론 외부에서 초빙해와도 되지만, 어쨌든 강좌를 맡아주는 선생님들께는 꼭대기 층에 있는 개인 작업실을 공짜로 쓰게. 여러 장르의 아티스트들을 한데 모아놓는 게 관건이야. 그래야만 인위적으로는 만들 수 없는 시너지와 장르 믹스가 발생할 거라는 판단이 들거든. 서로 다른 장르의 아티스트들끼리 도움을 줄 수도 있고, 이를테면 소설가 작품에 일러스트레이터가 그림을 그려준다든지, 시인에게 영감을 받아 작곡을 한다든지, 배우러 오는 사람 입장에서도 자신의 목적에 따라 여러 가지 수업을 한 곳에서 해결할 수 있겠지. 


예를 들어 싱어송라이터가 꿈인 애라면 굳이 대학에 갈 필요 없이 우리 센터에 와서 작사를 위한 시 창작 수업과 작곡을 위한 음악수업을 동시에…. 동화작가가 그림을 배우러 오거나, 그림작가가 동화 쓰기를 배우러 올 수도 있겠고… 


헌승의 말은 훨씬 더 장황했으나 이쯤에서 적당히 생략하기로 하고, 어쨌거나 헌승이 한 말치고는 상당히, 아니 매우 그럴듯해서 나로서는 한마디 안 할 수가 없었다. 


- 트랜드에는 맞아떨어지는군. 때는 바야흐로 미디어믹스와 분야 간 통섭의 시대니까. 


- 통섭? 왓 더즈 잇 민? 


- 서로 이질적일 것 같은 분야를 연결해서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는 거야. 영어로는 컨실리언스(consilience)라고 하지. 


하지만 말귀를 한 번에 알아들을 것 같으면 밤비가 아니었다. 


- 학원을 차리자는 거야? 그 지긋지긋한 학원을? 세상에 학원이라면 실용음악학원만으로도 충분해! 대한민국 학원 다 X까라고 하라고! 


한편으로는 현지가 항상 맹목적인 딴지만 거는 것은 아니었다. 


- 꼭 뭐가 되기 위한 것만 가르쳐야 하나? 엉뚱하고 재밌는 거 가르치면 안되나? 일본에는 욕 가르쳐주는 학원도 있다며. 접시 쌓아놓고 던져서 깨뜨리는데도 있다던데?


- 그렇지. 바로 그거지! 


헌승이 손뼉을 치더니 현지와 하이파이브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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