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희준
#2
- 독특하고 재밌는 것들을 알려주는 회사를 만드는 거지! 이를테면, 이를테면….
- 오빠, 오빠. 난 글씨쓰는 거, 그 뭣이냐 캘리그라피, 그거 열어줘.
- 그러니까… 음… 뭐가 있을까….
- 쨈 만드는 교실은 어때. 요즘 사람들은 끈기가 없어서 원데이 클라스 좋아하잖아. 잘생기고 잘 터는 애 하나 뽑아서 실컷 과일 분쇄하면서 스트레스 풀고, 쨈 끓이는 동안에는 웃겨주고, 끝나고 나면 만든 쨈 가져가고.
- 오, 그거 좋다.
좋긴 뭐가 좋아, 아무리 장난이어도 뜻깊은 걸 해야지.
- 사람들의 숨은 재능을 찾아주는 미술프로그램을 여는 것도 좋겠어.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부분 미술교육을 제대로 못받았거나 입시미술에 쩔어 있잖아? 그래서 구상화를 못 그리면 재능이 없는 거라고 단정 짓는 경향이 있단 말이야. 그런 건 공간감각이 뛰어난 것일 뿐 풘다먼털 퇄렌드(fundamental talent)와는 거리가 있다는 걸 가르쳐주는 거지. 모르긴 해도 백 명 중에 한명은 천재로 거듭날 걸?
그랬다. 멋모르고 나댈 때가 있긴 해도 현지에겐 무시할 수 없는 구석이 있었다. 나에게 모처럼 경쟁의식을 느끼게 한 것만 봐도.
- 자유롭게 그림을 그리게 하고 그 그림으로 의사와 심리상담도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꾸리면 어떨까? 아직 한국은 정신건강의학과에는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어야 간다는 인식이 강하니까. 가벼운 마음으로 그림도 배우고, 정신건강도 챙기고….
- 그렇지, 그런 게 통섭이지!
헌승은 건배를 청했으나 현지는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 꼭 그런 어떤 효과가 있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버려. 그냥 기쁘고 즐거우면 그만이야. 프래그마티즘 이즈 디 퐈우 오브 더 퐈인 알츠!(Pragmatism is the foe of the Fine Arts!) 실용음악과 애들이 음악 제일 못하는 거 보면 모르겠니?
실용음악과를 나온 밤비가 불쾌한 표정을 지었으므로 나는 잽싸게 현지에게 반박했다.
- 실용음악과의 실용은 프래그머틱(pragmatic)이 아니라 프랙티컬(practical)이거든?
- 프래그머틱이나 프랙티컬이나 잇츠 낫 마이 커언선.(Which sides It’s not my concern.) 위치 사이드 애니웨이(Which side anyway)…
현지에게는 민망하면 영어를 더 많이 쓰는 경향이 있었다.
- 일반인들이 꼭 순수예술을 해야 하나? 경쟁사회 나쁘다면서 순위 매길 게 아니라면 재미도 있고 실용성도 있으면 좋지 그게 왜 나빠? 순수예술도 실용예술에서 탄생했다는 거 몰라?
밤비에게는 성질을 좀 건드려야만 똑똑해지는 경향이 있었다.
- 삶의 질을 높여줄 정도로만 가르쳐주는 음악 클라스는 어때? 노래방에서 남들에게 쪽팔리지 않을 정도로만, 남들 앞에서 한 곡쯤은 멋들어지게 연주할 정도로만, 결혼식 축가를 완성해준다든가 프로포즈 곡을 만들어준다든가.
- 오 좋네, 좋아.
- 훌륭한 생각이야. 사실 나도 피아노를 배우러 갔을 때 너무 완벽을 추구하는 선생님 때문에 당황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야, 나는 피아니스트가 될 게 아니라….
- 생초보 시리즈로 가면 되겠다. 뤄어 놔비스 서리즈.(Raw novice series)
- 생초보 딱 한 곡만 잘 부르기?
- 딱 한 곡은 좀.
- 그럼 세 곡만 잘 부르기?
- 그냥 두 곡으로 하자.
- 그래, 생초보 두 곡만 잘 부르기.
- 생초보 작곡하기 어때?
- 오, 그거 좋다. 채보가 안돼서 그렇지 의외로 즉흥노래 잘하는 사람 많아.
- 내가 그렇잖아! 머릿속에 교향곡이 맴도는 사람이야 내가!
- 생초보 누드크로키!
- 생초보 펠라치오?
- 언니 왜 그래요 부끄럽게?
- 뭐가 부끄러워? 너 혹시 그거 생초보야?
- 언니 정말 왜 그래요.
- 내가 뭐.
밤비는 쑥스러운듯한 표정을 확 바꾸며 말했다.
- 어디서 생초보인척하는 방법은 안 가르쳐주나?
현지는 갑자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 오 예, 라이커 어 버진~~.
둘은 아예 마돈나의 노래를 합창하며 허리를 돌리기 시작했다. 주위사람들이 우리자리를 모두 한 번씩 흘끗거렸다.
이러니 헌승과 나는, 표정 없이 둘이서 건배를 하는 수밖에. 건배를 하고, 약속이나 한 듯 스마트폰에 고개를 묻는 수밖에. 페이스북을 보다가 같이 아는 사람의 포스팅에 대해 얘기하고, 건배하고, 기억나지도 않을 이야기에 낄낄거리다, 다시 건배하고, 어느 순간 내가 왜 전화기를 만지작거리고 있지? 의아해할 정도로 취해버리는.
언제나처럼 그런 술자리였다. 모처럼 건설적인 대화를 한 것은 우연이었지만, 무슨 대화를 하건 페이스북 타임라인처럼 될 것은 필연이었다. 회고해보건대, 우리가 지금까지 뭔들 못 해낸 게 있었던가?
빈 라덴의 거처도 세 번쯤은 알아냈고, 천안함 폭침과 세월호 침몰의 원인도 다섯 번쯤은 밝혀냈지. 열 번쯤은 동북아의 역사를 다시 썼으며, 스무 번쯤은 먼 외국으로 여행을 떠났다 왔지.
술자리에 앉은 채로, 말로만.
- 뭐가 문제야. 하면 되지.
라고 익숙지 않은 목소리가 말하기 전까지는. 심지어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옆트임 있는 원피스 차람에 단정한 하이힐을 신고 있었다. 군계일학이라기보다는, 군계일펭귄이랄까, 꽤 귀엽게 생긴 여자애였다.
- 그런 거 차릴라면 공간이 있어야 하잖아?
- 요즘 누가 공간을 점해? 월세가 얼마나 비싼데?
- 그럼 공간도 없이 어떻게 해?
- 주변에 작업실 많잖아? 대낮에 놀고 있는 스튜디오도 많고. 십만 원 정도만 내면 빌릴 수 있는 카페나 강의실도 많아. 필요할 때만 쓰고 빠져야 이윤이 남지. 집에 남아도는 방도 쉐어하는 스마트한 세상에 무슨 통임대를 해?
오랜만에 들어보는 현실성 있는 얘기였다. 근데 넌 누구니? 어디서 나타난 거니?
- 그러니까 우리끼리 사업을 하잔 거야?
- 아이템만 좋으면 못할 거 없지?
- 법인 같은 거 만드는데 돈 많이 들지 않나?
- 돈 많이 안드는데?
- 그래도 몇 천만 원은 있어야 하지 않아?
- 아닌데? 처음 개설할 때만 법인통장에 천만 원 정도 집어넣었다가 도로 빼면 되는데?
- 아, 정말? 그럼 돈 한푼 없어도 법인을 할 수 있다는 얘기네?
- 처음에 등록할 때 한 백만 원 깨질 거고. 법인 기장료 한 달에 십만 원 정도 들 거고.
- 그 정도쯤이야, 여러 명이서 하면 못할 거 없지.
- 펀딩이라는 게 있잖아. 요즘 누가 자기 돈으로 사업을 해.
라고 말하며 뉴페이스는 우리 모두를 향해 건배를 청했다. 나보다 몇 살 어린 여자애 같았는데, 눈빛에서 뭔가 무시 못 할 경험치가 느껴졌다. 그리하여 현승과 나는, 자석에 클립이 딸려가듯 묻지도 따지지도 못한 채 건배를 하고 말았는데, 건배를 하고 나서도 언제 끼어들어야 할지를 몰라 둘이 눈빛만 주고받고 있었는데,
알았으니까 너네끼리 얘기 그만하고,
너는 어디에서 온 펭귄인지 오빠한테 소개부터 좀 해보지 않으련?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