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희준
#3. 막내아들의 직업은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갑자기 돌아가셨고,
나는 내가 세 달 동안 아무 일 하지 않아도 문제가 생기지 않는 인간임을 깨달았다. 왜 세 달이나 걸렸냐고? 항상 아웅다웅 살았어서 그 사실을 깨달을 새가 없었다. 자그마치 십 년이나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십 년 동안 글을 써서 번 돈은 얼마 되지 않았다. 상금으로, 국가지원금으로, 드문드문 부수입으로 구멍을 메우며 살았다. 그것도 옛날 얘기였다. 어느 날 돌아보니 나는 수입이 맥도날드 아르바이트생보다 적은 시간강사였다. 돈 안 되는 소설까지 쓰느라, 동료들보다 훨씬 더 힘들게 살아야 하는 시간강사였다. 소설을 안 쓰면 되지 않았겠냐고?
나는 몇 군데 문예창작학과에서 소설 창작 강의를 맡아 하고 있었다. 강의를 할 수 있는 소설가는 많았고, 활동이 뜸한 작가를 강사로 쓰는 곳은 없었다. 강의를 맡기 위해서라도 써야 했다. 책 한 권을 쓰면 삼백만 원 정도를 벌 수 있었다. 문단에는 동료들에게 신간을 나눠주는 미풍양속이 있었다. 나도 받은 책이 많으니 되돌리는 건 당연했다. 여기저기 책을 보내고 나면 백오십 정도가 수중에 남았다. 장편을 한 편 쓰려면 꼬박 일 년이 걸렸다. 강의하는 날을 빼고 하루에 여덟 시간씩 썼다. 어느 날, 부산에서 폐지를 줍던 할머니가 차에 치여 돌아가셨는데 하루 수입이 만 원이었다는 기사를 보았다. 이상하게도, 조금도 슬픈 마음이 들지 않았다.
아버지는 갑자기 쓰러지셨다.
응급실에 들어가셨다가 일주일 만에 일반 병실로 나오셨다.
직장인인 누나가 주말을 맡았고, 평일은 형과 내가 이 교대했다.
나는 주로 밤 시간을 지켰다. 나는 그때 나의 새 장편을 사 분의 삼 가량 완성해두고 있었고, 결혼하려던 여자와 헤어진 지 일 년이 채 안 된 시점이었고, 언제 굶어 죽을지 모르는 작가 따위 때려치울까를 심각하게 고민하다가, 오 인실의 밤이 찾아오고, 커튼이 쳐있어 얼굴조차 모르는 환자들의 신음소리와 숨소리에 매일매일 조금씩 더 익숙해지다가, 어느새 어둠 속에서 소설의 결말을 고민하고 있는 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곤 했다. 이대로 아버지가 돌아가신다면 죄책감을 느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아버지는 오 인실에 이주일가량 계셨다. 일주일간은 회복기였다. 분명 좋아지고 있었고 종종 멀쩡해지셔서 농담까지 하셨다. 하지만 내가 나이트를 맡게 된 두 번째 주에는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낮에는 잔잔하다가도 밤만 되면 파도가 높이 일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신음했고, 심하게 기침했고, 자꾸만 코와 가슴에 달린 호스를 잡아당겼고, 좀 가라앉으면 침대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려고 했고, 나가기는커녕 침대 위에 앉는 것조차 하지 못했지만 나에게 나쁜 놈이라고 욕을 해댔고, 허공을 가리키며 저 사람은 누구냐며 벌벌 떨었고, 그 와중에, 띄엄띄엄, 정지관, 수첩, 급해, 중요해, 시간이 없어, 3, 7, 8, 어쩌고저쩌고 등등의 발음들을, 내 소매를 잡아당기며, 나쁜 놈이라고 뺨을 치며, 반복했다. 반복이라고는 하지만 아버지의 말은 매우 띄엄띄엄 튀어나오는 데다 발음도 거의 되지 않아서, 알아듣기는커녕 말 임을 알아채기조차 어려웠다. 내 얼굴에 초점을 맞추려 애쓰는 눈빛으로, 내 소매를 잡아당기는 미약한 힘의 차이로, 아 지금 이건 신음이 아니라 말이구나, 눈치챌 수 있을 따름이었다.
나는 담당 의사에게 지나가는 말로 물었다. 이곳에 남기는 환자분들 중 또렷한 유언을 남기는 분이 얼마나 되냐고. 담당 의사는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용케 그 질문을 기억하고 있던 간호사가 나중에 말해주었다. 사망 증명서를 받으러 갔을 때였다.
- 저기… 지난번에 물어보셨던 거요…, 거의 없다고 보시면 돼요.
- 뭐가요?
- 그… 유언 말이에요.
- 아… 그거요….
- 뭐라고 하기는 많이들 하시는데 대부분 못 알아듣거든요.
- 그런가요?
- 입에 담지도 못할 욕만 하다 돌아가시는 분도 많아요.
- 그렇군요.
간호사는 내가 일종의 결핍에 시달릴까 봐 염려했던 모양이었다. 유언을 듣지 못했다는 일종의 박탈감? 몹시 고마웠지만 고맙다는 말밖에는 하지 못했다. 병원은 그런 곳이었다. 어떤 감정이건 짧고 간략하게 표현하는 편이 예의 같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아버지가 나를 알아본 건 응급실을 나와서 오 일간이었다. 내가 나이트를 보는 동안 아버지는 나를 의사양반이라고 불렀다. 아버지는 유독 나만 기억하지 못하셨다. 엄마도, 형과 누나도, 조카들도 다 기억하면서 나만 보면 의사 양반이라고 불렀다. 의사 양반, 전화, 급해, 정지관, 이 나쁜 놈아, 내가 너 고소할 거야, 나한테 무슨 짓을 했어, 등등의…. 나한테 하는 게 아님을 알면서도, 마음속을 싸리비로 박박 쓸어내듯 들어야 했던 말들.
돌아가시기 이틀 전 어느 저녁, 마침내 폭풍의 눈이 아버지의 지친 대지 위에 찾아왔을 때, 아버지는 봄볕처럼 부드러운 눈빛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의사 양반이 내 두 번째 아들을 정말 많이 닮았다고. 두 번째 아들이 나이가 들면 꼭 의사 양반처럼 될 것 같다고. 나는 더 듣고 싶었으나 아버지는 화제를 전환했다. 부탁이 있다고, 내일 아침에 노 교수가 병원에 올 텐데 그에게 잊지 말고 정지관이라는 사람한테 전화를 해야 한다고 전해달라고, 기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급한 일이라고. 나는 알면서도 노 교수가 누구냐고 물었고 아버지는 씩 웃으며 당신의 첫 번째 아들이라고 대답했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뭔가 찜찜해진 나는 아버지에게 두 번째 아들은 무슨 일을 하시는 분이냐고 물었는데 그러자 아버지는….
한때는 내가 교수가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 선배들이 있었다. 석사 과정일 때부터 그랬다. 박사학위 소지자는 널렸지만 그중에 소설가는 몇 없기 때문에 교수 될 인간은 우리 중 너뿐이라는 논리였다.
- 아유 뭘 두 손으로 따르고 그래, 어디 네가 날 선배로 보기나 하겠어?
- 소설가가 소설만 열심히 쓰면 되지, 뭔 욕심이 그렇게 많아.
- 빨리 가려고 하다 더 늦게 가는 수가 있다.
갈구는 것보다 더 힘든 건 역이용이었다.
- 앞으로 잘 될 사람들이 맡아서 해야지 뭐 나는 교수 될 일도 없고….
-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는 와야지,무슨 소리야?
- 어째 너 좀 거만하게 구는 것 같다?
뒤늦게 대학원 석사과정에 입학한 동갑내기 소설가로부터 장문의 편지도 받았다. 그 편지의 말미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나는 무거운 짐을 정상까지 가져가는 산악인을 본 적이 없다. 진정한 승부의 세계에 들어오고 싶다면, 네가 언젠가는 돌아가기 위해 들어놓은 그 수많은 부실 보험과 낡은 안전망들을 버릴 것을 충고하는 바이다. 아마도 그것들은 부메랑처럼 너에게 돌아와 얼마 있지도 않은 너의 자산을 산산조각낼 것이기 때문이다.]
심각한 반응들은 그런대로 참을만했다. 쿨하게 무시해버리면 됐으니까. 가장 괴로운 것은 별 뜻 없이 내뱉는 동료 문인들의 말이었다.
- 오빠, 정말 몇 년 뒤에 교수 돼?
- 누가 그래,또?
- 아니,오늘 어디서 우연히 들었는데 될 사람은 오빠밖에 없다던데?
- 그냥 굽히고 살아라..
- 뜬금없이 뭔 소리예요?
- 너무 자존심 세우지 말고 적당히 잘하란 말이야. 임마.
별 뜻 없이 하는 말에, 심지어 잘 됐으면 한다는 말에 핏대를 세울 수는 없었다. 하지만 가볍게 던진 말이라고 해서 가볍게 받아낼 수 있지는 않았다. 배드민턴 공은 가볍지만, 그 공을 넘기려면 사력을 다해야 하는 것처럼.
그 시절 내 가슴속에는 미처 받아넘기지 못한 배드민턴 공들이 사방에 떨어져 있었다. 뙤약볕 아래에서 새하얗게 빛나며, 산들바람만 불어도 여기저기서 깃털을 살랑거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