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데카당스 Mar 15. 2024

절에서 공부해 대학 간 이야기

합천 해인사 원당암에서 있었던 일

미국에서 MBA를 할 때였다.


중고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한 사람씩 나와 "장기자랑"이나 자신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라고 했다.


안 되는 영어로 어떻게 사람들을 재미있게 할까 고민하던 중에, 어느덧 내 차례가 다가왔다.


내 앞의 친구가 재미있는 이야기에 자신이 없다며 제자리 덤블링(!)을 하는 바람에 잔뜩 사람들의 관심이 몰린 상황. 나는 운을 띄웠다.


"저는 2달 동안 절에서 산 적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야 불교 인구도 많고 절이 흔하지만 미국에서야 완전히 생소한 이야기다. 그렇게 흥미를 끄는데 성공하고 펀치라인을 날린다.


"미리 알았다면 아마 안 갔을 겁니다. '채식주의자' 절이라는 사실을요."


그렇다. 나는 두 달 동안 채식만 하며 절에서 묵었다. 그 얘기를 풀어보고자 한다.




머리가 참 좋았다.


중학교 때 했던 아이큐 검사에서 149라는 점수가 나왔다. 1점만 더 높았으면 멘사에도 도전해 봤을 텐데 아무튼 학교에서 제일 머리가 좋다고 했다.


워낙 자랑거리가 없는 학교인지라 학교가 발칵 뒤집어졌다. 담임 선생님은 어머니를 모셔다 놓고, "서울대를 못 가면 엄마의 잘못"이라고 반쯤 협박을 했다.


그때부터 동네 약국집 아들인 서울대 형아의 과외가 시작되었다. 나는 공부보다는 선생님이 들려주는 다른 이야기에 더 관심이 있었다. 밀리터리 마니아였던 과외 선생님의 전쟁 이야기는 당연히 수학의 정석보다 훨씬 흥미진진했다.


아마 이쯤에서 눈치챘으리라. 나는 공부를 못했다.


공부에 관심이 전혀 없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참고서보다는 소설이 좋았고, 락음악에 빠져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는 음대를 들어가겠다며 대학로에 있는 "재즈 아카데미"에 기타를 메고 혼자 다니기도 했다.


아마 겉멋이 들었던 것 같다. 하루는 사촌 형이,


"음악으로 대학 가는 것도 멋있지만 좋은 대학을 가서 음악을 하면 더 멋있지 않을까?"


라고 툭 던지듯 하는 말에 그날로 음악을 그만뒀다. 기타 연습이 지겹기도 했다.


그렇게 공부로 전향한 것이 고등학교 2학년 때의 일이다. 내신은 이미 7등급으로 바닥을 기고 있었고, 수학은 삼각함수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다행히 국어는 책을 많이 읽어서 그런지 공부를 안 해도 점수가 잘 나왔다. 영어도 조기교육 덕분에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너무 없었다. 앞으로 수능까지 2년도 채 남지 않은 상황.


그래서 특단의 조치로 절에 들어갔다.




부모님의 수소문 끝에 합천 해인사에 딸린 원당암이란 암자에서 방학 동안 머물며 친구 하나와 공부를 하기로 했다. 사시 합격자들을 많이 배출한 암자로도 유명했다.


짐을 풀고 부모님들이 떠나자마자 우리를 담당하는 행자 스님이 우리를 불러냈다. 공부에 대해 무언가 조언을 해주려나보다 했더니, 그게 아니었다.


"자, 오늘은 가볍게 풀부터 뽑아보자."


그는 공부하러 온 우리에게 일을 시켰다. 처음에는 그냥 한두 시간 운동삼아 일을 시키려나 싶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우리는 그렇게 몇 주 동안 풀타임으로 일만 했다.


하루 종일 풀을 뽑거나 청소를 하거나 장작을 팼다. 아니면 보수공사를 하거나 절에서 하는 다른 일을 도왔다.


그렇게 일과가 끝나고 공부를 하려고 막상 책상 앞에 앉으면 졸음부터 쏟아졌다. 온몸이 쑤시는 것을 참으며 간신히 잠을 청하면, 새벽 3시에 일어나 108배와 함께 새벽 불공을 드려야 했다.


108배가 그렇게 힘든지 몰랐다. 50배쯤 하면 다리가 덜덜 떨리기 시작하다가, 70-80배부터는 한 배 한 배가 새로운 고통의 연속이었다. 108배를 마치고 나면 후련한 마음도 있었지만 온몸이 저렸다.


한 번은 제사에 쓰이는 놋쇠 그릇을 닦은 적이 있다. 반짝반짝 윤이 나게 닦아야 하는데, 그릇은 또 얼마나 많고 윤 내는 건 왜 이렇게 힘이 드는지...


놋쇠 그릇 닦기를 마치자 고생했다며 처음으로 밖에 나가 점심을 먹었다. "구원반점"이라는 중국집이었는데, 거기서 먹은 탕수육은 정말 구원의 맛이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벌써 몇 주가 지났는데 공부는 거의 손에도 못 댔던 것이다. 혹시 공부가 아니라 일을 하러 팔려온 것은 아닌가?




정말 공부가 하고 싶었다.


풀을 뽑으면서도 곁눈으로 영어 단어장을 들여다봤고, 일을 하느라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억지로 참고서를 읽었다. 그러나 피곤한 몸으로 제대로 공부를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런데 그렇게 몇 주가 지나자 기적이 일어났다.


장마철을 맞이해 비가 오기 시작한 것이다.


비가 오면 좋은 점은? 바로 풀을 못 뽑는다는 것.


그렇게 풀 뽑는 일에서 제외되자 시간이 생겼고, 그 시간을 정말 아껴가며 공부를 했다. 얼마나 공부가 하고 싶었는지, 앉은뱅이책상을 펴놓은 채로 그대로 잠을 자고, 바로 일어나서 공부를 했다. 하루에 200페이지가 넘는 문제집을 한 권씩 풀었다.


마치 막혔던 댐이 무너지며 물이 쏟아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소나기가 2주 동안 쉬지않고 내렸다. 아마 내 인생에서 공부를 가장 많이 했던 2주가 아니었을까.


그렇게 공부에 몰입할 수 있게 되자 더 이상 절에서도 일을 시키지 않았다. 남은 시간에도 미친 듯이 공부를 했다. 절을 떠날 때가 되니 다 푼 문제지가 어른 키만큼 쌓여있었다.


나중에 얘기를 들어보니, 내 공부 때문에 어머니께서 원당암의 주지스님에게 고민 상담을 한 적이 있다고 했다. 주지스님은 어머니의 고민에 껄껄 웃으시며, 올해에 글문이 들어와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이제 생각해 보면, 처음에 공부를 못할 정도로 일을 시켰던 것도 모든 것을 내다보고 있던 주지스님의 큰 그림이 아니었을까 싶다. 자연스럽게 공부를 할 마음의 준비가 되었으니까.




학교가 발칵 뒤집혔다.


절에 다녀온 후 있었던 첫 모의고사에서 전교 3등을 했다. 내신 7등급에 수도권 대학도 어려운 모의고사 성적이었던 학생이 갑자기 순위권에 들어가니 선생님들은 처음에는 의심을 했다.


모의고사 문제가 유출된 것은 아닌가 하는 이야기가 돌았고, 그래서 그 달에만 모의고사를 한 번 더 쳤다. 두 번째 친 모의고사에서는 등 수는 비슷했지만 오히려 더 높은 점수가 나왔다.


정말 재미있는 일은, 그렇게 높은 모의고사 점수가 나온 후로 선생님들의 특별 관리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강제로 하는 야간 자율학습도 나는 면제를 받았다. 하루는 담임선생님이 따로 부탁을 해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야간 자율학습에 참여를 했는데, 선생님이 내가 야자를 한다며 기념으로 반 아이들에게 아이스크림까지 돌렸다.


내신이 좋았다면 정말 서울대를 갔을지도 모르겠다. 내신이 형편없었던 나는 당시 내신 비중이 적었던 서울에 있는 4년제 명문대에 들어갔다. 그 후로 모두가 꿈꾸던 좋은 회사에 들어갔고, 인생은 흘러 흘러 지금은 런던에서 일을 하고 있다.




지금도 한 번씩 그때 생각을 한다.


그렇게 모든 것을 불태워 공부만 했던 적이 있었을까. 그토록 무언가를 간절히 원했던 적이 있었을까.


무언가 간절히 바라기에는 내 삶은 이미 너무 복잡해졌고, 생각은 너무 많아졌다.


그때는 단지 "공부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 행복했을 따름이지만, 지금의 행복에는 이런저런 조건이 붙는다. 가장이 되니 어깨 위가 너무 무거워 목을 움츠리고 산다. 이게 나이 먹는 거라면, 어른이 되는 대가라면, 너무 서글프다.


그때처럼 조건 없이 무언가에 몰입할 수는 없을까. 내 삶에 소나기는 언제 다시 오는 것일까.


그저 지금은 풀을 뽑는 중이라며, 굽은 허리를 한 번 쭉 펴고, 소나기가 오기를 바라며 하늘을 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