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원에 대한 한 염세주의자의 비판
우리는 참 많은 소원을 빈다.
장사 대박 나게 해 주세요. XX랑 잘되게 해 주세요. 시험 붙게 해 주세요. 부자 되게 해 주세요 등등....
소원이 안 이루어지면 소원을 들어주는(줘야 하는) 주체를 원망하기도 한다. 우주적 스케일에 비하면 먼지와도 같은 우리가 할 수 있는 반항의 몸부림이랄까.
그러나 소원을 들어주는 입장에서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신 (방년 138억 세)
"내가 왜 니 소원을 들어줘야 돼?"
당신은 신이잖아요? 우리를 만들었으면 끝까지 책임져야 하지 않아요? 우리는 "행복해질 권리"가 있다구요!
"웃기지 마. 나는 너희들에게 '행복해질 기회'를 충분히 줬어. 얌체같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행복해지기만을 바라지 마."
행복해질 기회? 나는 불행한 가정에 태어났고 재산도 없고 직업도 형편 없는데요?
"네게는 아직 '삶'이라는 '행복해질 기회'가 있잖아? 그러나 잔말말고 움직여! 기회를 잡으라고!"
나도 참 소원이 많았다.
소원을 빌 때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내가 아는 신 이름을 다 불렀다. 하느님, 부처님, 알라님, 날으는 스파게티님 등등...
기도가 분산되어 그런지 내 기도는 한 번도 이루어진 적이 없었다.
아니, 내 기도는 얌체의 기도였다. 신들도 내 기도를 듣고는 소원을 이루어주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졌을 것이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지기를 기다려서는 안 된다고. 사과를 먹고 싶으면 나무를 흔들어야 한다고.
그 날부터 나무를 흔들기로 결심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바라기만 하면 안 된다고. '소원'만큼 과대평가된 단어는 없다고.
문득 나 자신의 타고난 게으름이 나를 다시 '소원'의 영역으로 밀어 넣을 때면 이 사실을 다시 떠올리자.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소원은 만들어가는 거라고.
소원 따위 빌지 말자. 우주적 존재는 내 소원 따위엔 관심조차 없다.
움직이자. 원하는 바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적어도 삶은 더 만족스러워질 것이다.
정 소원을 빌고 싶으면 다른 이를 위해 빌자. 그건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이니. 신들도 이는 기특하게 여길 것이다.
행복하자. 기회는 언제나 있다. 삶이란 행복의 기회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