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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카당스 Mar 21. 2024

먹어야 사는 남자, 살아야 먹는 여자

먹는 것, 행복, 추억에 대한 짧은 이야기

먹어야 사는 남자


영어에 길티 플레져(Guilty Pleasure)라는 표현이 있다.


몸에 안 좋은 음식을 죄책감을 느끼면서 먹을 때 이런 말을 많이 쓴다. 우리나라에는 딱히 비슷한 표현이 없다. 일탈? 배덕감? 이런 단어들이 생각나지만 길티 플레져는 그 정도로 심각한 건 아니다. 웃으며 말하는 "맛있게 먹으면 0칼로리" 같은 느낌이랄까.


처음 일을 할 땐 너무 바빠서 먹을 시간도 없었다. 사무실 건너편에 할머니국수집이 있었는데, 매일 저녁 잔치국수 한 그릇과 가끔씩 수육 하나를 시켜 나눠먹는 것이 사무실 직원들의 일과였다. 얼마나 자주 갔는지 나중에는 앉자마자 시키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음식이 나올 지경이었다.


반면 종로에서 일할 땐 "선택의 홍수"에 묻혀 살았다. 거의 매일 다른 직원들과 약속을 잡고 맛집 탐방을 다녔다. 사내 메신저에는 늘 "여기가 유명하데요." "혹시 거기 가봤어요?"와 같은 대화들이 끊이질 않았다. 맛집을 잘 아는 직원은 인기도 많았다.


회의가 없으면 점심시간 30분 전인 11시 반에 회사 밖으로 나와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뒷골목의 유명한 파스타집 앞에 줄을 선다. 얼마나 인기가 많으면 벌써 만석이다. 괜스레 혼자 앉아 스파게티를 음미하고 있는 혼밥러들을 탓해본다. 건너편에 앉은 혼밥러와 합석하면 줄이 더 빨리 줄텐데!


회식을 한 다음 날 아침엔 만사 제쳐놓고 사무실 근처의 북엇국집으로 간다. 내용물 별로 없는 북엇국집이지만 담백한 맛에 숙취와 금방 이별할 수 있었다. 국물과 밥을 리필해서 김치와 먹으면 그만한 별미가 없었다.


저녁에는 유명한 족발집 앞에서 줄을 선다. 짙은 갈색으로 맛있게 푹 삶아진 족발 한 점과 막걸리를 먹으면 세상에 부러울 게 없었다. 야들야들 입에서 살살 녹는 속살에 세상의 근심까지 녹아 없어진다.


제대로 쓰기 시작하면 아마 365일 내내 먹는 얘기만 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만큼 먹는 것을 사랑했다. 먹기 위해 산다고 할까. 미국으로 가기 전 마지막으로 사무실 근처를 걸으며 제일 아쉬웠던 것은 바로 그 수많은 맛집들이었다. 그 맛집들에 웃고 떠들고 울고 서로를 격려했던 나의 추억들이 방울방울 남아있었다.




살아야 먹는 여자


아내는 나와는 정 반대였다.


아내에게 먹는 것은 자동차에 기름을 넣는 것처럼 귀찮지만 해야만 하는 행위처럼 느껴졌다. 바쁜 일이 있으면 끼니를 거르기 일쑤였고, 입도 짧아서 일단 입에 들어오면 먹고 보는 나와는 달리 젓가락을 깨작거리는 일도 잦았다. 연애하던 시절에는 그 모습도 예뻐 보였다.


아마 열심히 사느라 그랬던 모양이다. 천성이 느긋한 (다른 말로는 게으른) 나와는 달리 일개미처럼 바쁘게 사는 사람이었다. 그 점이 마음에 들어 결혼했지만, 늘 뭔가에 쫓겨 제대로 음식을 맛보고 즐길 여유가 없었던 것은 아닐까 싶었다.


그런 살아야 먹는 여자가 먹어야 사는 남자를 만났으니, 문화충격이 컸을 것이다.


연애라는 게 별 거 있겠는가. 그저 맛있는 음식 먹고, 재미있는 영화를 보고, 차를 한 잔 마시거나 술을 한 잔 하는 거지.


그렇게 우리는 우리의 길티 플레져들을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결혼해서는 동네 근처의 맛집들을 저녁마다 찾아다녔다. 숯으로 초벌구이를 한 삼겹살이 불판 위에서 지글지글 구워지면 입안에 침이 고이고 혀의 미각세포들이 발동하기 시작했다. 마치 온몸이 입안에 들어올 감칠맛 넘치는 삼겹살 한 점을 먹기 위해 준비하는 듯했다.


여유가 넘치는 플로리다로 이사 가면서 살아야 먹는 여자는 잠시 인생의 우선순위에서 삶을 내려놓고 즐거움을 올려놓았다. 해외생활의 어려움은 맛있는 음식으로 어느 정도 달래졌다. 주말이면 미국 남부 바베큐를 먹으러 허물어져가는 맛집을 가거나 다이너에서 브런치를 즐겼다. 다이너에 가면 커피가 무한 리필이라 커피도 엄청 마셨다.


세보지는 않았지만 지금까지 마신 별다방 커피값을 다 모으면 차 한 대는 사지 않았을까. 그러나 플로리다의 뜨거운 햇살 아래, 빵빵한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마시는 별다방 커피만큼 쉽게 행복해지는 방법은 없었다.




아이가 태어나고, 계속된 해외이주와 고된 삶에 여유가 사라지면서, 우리는 먹어야 사는 부부에서 살아야 먹는 부부가 되었다. 런던의 비싼 물가 때문에 외식은 사치가 되어버렸다. 우리의 우선순위는 우리의 행복에서 아이의 행복으로 서서히 바뀌어갔다.


어렸을 때, 부모님은 한 달에 한 번 집 근처 경양식집으로 나를 데려갔다. 근사한 음악이 나오고 고소한 수프로 시작하는 돈가스 정식은 아직까지도 생생한 어린 시절의 행복한 추억이다. 마카로니 샐러드의 오이는 늘 골라냈고, 후르츠 칵테일은 늘 내 차지였다. 함박 스테이크는 조르고 조르면 어쩌다 한 번씩 먹는 특별한 음식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형편이 어려웠던 부모님은 본인들 자신의 행복을 깎아 내 행복을 채워주었다. 부모가 돼서야 그 마음이 이해가 되니, 어른이 되고 철이 드는 건 정말 오래 걸리는 일이다. 아마도 지금의 우리가 그렇듯, 내가 행복하게 먹는 모습을 보고 흐뭇한 미소를 지으셨으리라.


우리는 그렇게 살아야 먹는 사람들이 되었지만, 이제는 아이를 통해서 행복을 느끼게 되었다. 누군가의 행복을 보며 행복을 느끼다니, 인생이란 참 이해하기가 어려운 일들 투성이다.


아직도 맛있는 것을 먹으면 그렇게 내가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면서 행복을 느끼셨을 부모님의 모습이 생각난다. 외국에 살면서 그렇게 제대로 효도도 못하는 내게 이제 맛있는 음식들은 길티 플레져가 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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