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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카당스 Jun 09. 2019

칸쿤: 휴양지가 갖춰야 할 모든 것

완벽했던 칸쿤의 추억

2016년 12월, 미국으로 건너온 지 8개월째. 30년 넘게 살아온 거주지를 옮기는 일은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헥헥거리며 간신히 진짜 짐보따리와 마음의 짐보따리를 풀고 나니, 현기증과 같은 피로가 몰아쳤다. 우리는 입 모아 말했다.


휴식이 필요해.


한 번도 휴양지로 여행해본 적이 없었다. 휴양지 리조트 선베드에서 지지고 볶는 것은 아늑한 집 안의 퀸사이즈 침대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휴양지의 위치도 문제였다. 휴양지에서 휴식을 취하고 다시 비행기를 10시간 넘게 타고 오면 다시 지치기 마련이다. 그럼 다시 휴양이 필요하고, 휴양하고 오는 길에 다시 지치고, 다시 휴양이 필요하고... 벗어날 수 없는 무한궤도가 여기에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휴양지를 선택했다. 마음대로 먹고 즐길 수 있는 올 인클루시브(All Inclusive, 호텔 가격에 식사와 술 등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다)가 매력적이었다. 칸쿤이 플로리다에서 그리 멀지 않은 것도 한몫했다. 비행기 값도 한국에서 가는 것에 비해 5분의 1도 되지 않고, 비행시간도 두 시간에 불과했으니까. 무엇을 더 망설이랴? 그 해 겨울, 우리는 칸쿤으로 떠났다.

가자, 칸쿤으로 고고씽!




어서 와, 칸쿤은 처음이지?


공항은 그 나라의 첫인상이다.


어떤 공항은 그 나라의 첫 냄새(?)를 품고 있는데, 인도 첸나이 국제공항이 그러했고, 뉴욕 JFK 공항이 그러했다. 예전 인천공항에선 마늘 냄새가 났는데, 지금은 마늘 섭취량이 줄은 건지 더 이상 나질 않는다. 오히려 세계에서 가장 깨끗한 공항 중 하나일 것이다. (외국에 살면 가만히 있어도 국뽕이 차오른다) 어쨌든 칸쿤의 공항 또한 첫 냄새를 품고 있었다. 후덥지근하면서도 휴양지 특유의 가볍기 짝이 없는 공기의 냄새였다.

비행기에서 찍은 칸쿤의 풍경

우리가 선택한 비러브드 플라야 무헤레스(Beloved Playa Mujeres) 호텔은, 많이들 가는 호텔존에서 2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 조용하고, 프로모션 덕분에 가격도 합리적이었다. 호텔에 레스토랑이 10개나 있다는 사실도 기대치를 한껏 끌어올렸다. 라디오도 없고 창문도 손잡이를 돌려서 내려야 하는 싸구려 렌터카를 타고, 호텔로 향했다.

호텔로 가는 길. 엄청 깊숙이 들어간다.
호텔의 첫인상

발레 파킹을 맡기고, 체크인을 했다. 호텔은 무척 깨끗하고, 한적했다. 방에 대충 짐을 풀고, 리조트 안을 구경했다. 붐비지 않으니 더욱 특별한 손님이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깔끔한 호텔 로비
방에서 내다본 풍경
애주가는 아니지만 양주도 한 잔 해본다. 양주도 전부 포함.
호텔룸이 모여있는 별채와 식당이 모여있는 메인 빌딩을 이어주는 길
별채에 딸린 수영장. 선베드에 누워있으면 직원들이 돌아다니면서 필요한 것을 가져다준다.
메인 수영장의 전경.
자쿠지에서 사진 한 장. 리조트가 이렇게 한적해도 되는 것일까?

'음주 후 수영 금지'와 같은 흔한 경고문 따위는 없다. 리조트의 수영장에는 아이들을 빼고는 다들 얼큰히 취해있었다. 사람들은 물놀이를 즐기다 목이 마르면 수영장 한가운데 아쿠아 바(Aqua Bar)에서 독한 칵테일로 목을 축였다. 아쿠아 바의 표지판이 마치 '수영 중 음주하시오'라는 경고문으로 보였다. 이런 작은 일탈이 휴양지가 주는 즐거움 아닐까 싶었다.

프라이빗 비치에서.

리조트에는 프라이빗 비치도 딸려 있었다. 생각보다 바다는 깨끗하지 않았지만, 날씨는 우울해서 술 한잔 하기에 제격이었다. 해변에서 직원이 가져다준 음료수로 잠시 시간을 보내니 금세 어두워졌다. 어둠이 찾아오자 리조트는 더욱 빛을 발했다.

낮보다 밤이 더 아름답다. 누군가 사진에 찍힌 것 같은데 다 기분 탓...
메인 바(Bar)로 향하는 계단

메인 바에서 뭔가 시켜보려고 했는데 술 종류를 잘 모르니 고작 맥주를 시키는 게 전부였다. 바에서 온갖 칵테일을 주문하는 다른 손님들이 부러웠다. 어렸을 때는 칵테일 종류를 스무 가지는 알고 있는 멋진 어른이 될 줄 알았는데, 멋진 어른이 되는 길은 아직도 멀었다. 에라 모르겠다. 일단 먹자.

첫날은 가볍게 스테이크. 피카냐를 몰랐던 게 이제 와서 한이 된다.
직원 추천 스테이크. 퀄리티는 무난했다.
뭐였는지 기억나지 않는 요리.
별채에 딸린 작은 바. 역시 잘 몰라서 맥주를 시킨다ㅜㅜ

술도 무제한, 음식도 무제한이니 잔뜩 먹고 마시게 된다. 그렇게 첫날은 과식과 과음으로 마무리를 하고 말았다. 주지육림(酒池肉林)과 무릉도원(武陵桃源)은 사실 뗄레야 뗄 수 없는 사이였던 모양이다.




신나는 칸쿤. 재미나는 칸쿤.


아침이 밝았다. 집에서는 아침도 안 챙겨 먹으면서 아무리 피곤해도 호텔 조식은 반드시 먹어야 하는 나. 좀비처럼 일어나 조식 뷔페를 먹으러 나왔다. 사실 오늘은 미리 예약해둔 워터파크 스칼렛(Xcaret)에 가는 날이었다.

아침 풍경. 날씨가 좋아졌다.
아침은 역시 뷔페가 최고.

꼭두새벽부터 조식을 먹고 스칼렛으로 향했다. 기름을 넣어야 하는데 영어가 안 통한다. 이럴 땐 만국 공용어인 손짓 발짓이 최고다. 가득 채우고 팁도 줬다. 호텔은 화려하지만 그 이면의 보통 사람들이 사는 풍경은 넉넉해 보이지 않았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있다 보니 금세 목적지에 도달했다.

천연 워터파크인 스칼렛(Xcaret). 사진은 잘 나온 게 없어서 구글 펌.

구명조끼를 입은 채 삼십 분 정도 둥둥 떠다니는 액티비티(안타깝게도 고프로가 없어 사진을 못 찍었다)를 하고 나니 배가 고팠다. 올 인클루시브의 정신에 걸맞게 스칼렛 티켓에도 한 끼 식사가 포함되어 있었다. 식사 퀄리티는 그저 그랬다.

대충 이런 느낌. 십 분쯤 지나면 지루해진다.
스칼렛 티켓에는 한 끼 식사가 포함된다.
본토의 멕시칸 요리를 기대했는데 퀄리티는 기대에 못 미쳤다.

시장이 반찬이라 대충 먹고 이 날의 하이라이트인 스누바(Snuba) 미팅 포인트로 향했다. 스누바는 산소통 대신 배에 연결된 긴 호스로 산소를 공급받으며 잠수하는, 스쿠버다이빙의 '맛보기'같은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중요한 건 우리 둘 다 이 때는 수영을 못했다는 것. 가이드에게 수영을 못한다고 했더니 괜찮단다. 수영과 잠수는 다른 거라고. 뭐, 죽기야 하겠는가.

우리 타임에는 손님이 우리 포함 세 명밖에 없었다.

가이드가 간단한 설명을 한다. 호흡하는 법, 물 안경에 물이 들어왔을 때 빼는 법, 그리고 특히 수압 때문에 귀가 멍해졌을 때 해결하는 법을 알려준다. 일단 물속에 들어가면 고작 6 - 7미터 내려가는 것에 불과해도 잠수병 때문에 급하게 올라올 수가 없다. 가이드가 해결해주는데도 한계가 있기 때문에 결국에는 자신과의 싸움. 잘못하면 진짜 위험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배를 타고 잠수 포인트로 가는 동안에도 가이드가 계속 설명을 해준다. 긴장이 돼서 사진도 제대로 못 찍었다. 우여곡절 끝에 바다로 잠수한 순간.


바다라는 또 다른 세상이 우리를 마주했다.


도대체 뭐라고 표현을 해야 할까. 스노클링과는 비교도 안 되는, 그야말로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느낌. 혹자는 우주를 걷는 느낌이라고 하는데 (물론 우주를 실제로 걸어본 이는 극소수에 불과할 테니 말도 안 되는 얘기다), 우주까지는 몰라도 눈 앞에 펼쳐진 광경과 몸에 느껴지는 감각은 적어도 내가 알던 것이 아니었다.

물 속은 물 밖과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가이드를 잡고 있던 손을 떼자 처음 걸음마를 배우는 아기처럼 조심스레 바닷속 탐험을 시작했다. 지나가는 형형색색의 물고기 떼는 이방인이 낯설지 않은 모양인지 제갈길 가기에 바쁠 뿐,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어디서 본 건 있어서 손끝을 비비자 물고기들이 먹이를 주는 줄 알고 몰려들어 내 손끝에 입을 맞추었다. 그 간지러운 감각과 숨을 쉴 때 나는 거품의 보글거리는 소리, 몸을 가볍게 누르는 수압과 춥지도 덥지도 않은 적당한 수온까지, 모든 기억이 아직까지도 생생하다.

돌아가는 길에 만족스러운 브이. 얼굴을 가리는 조건으로 블로그 출연(?)을 허락해주신 그분께 감사드린다.

약 한 시간 정도의 액티비티를 마치자 녹초가 되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갈 수는 없는 법. 간단히 물놀이를 하며 피부에 수분을 보충한다.

호텔에도 수영장이 있는데 굳이 여기서 물놀이를 했다.

액티비티와 물놀이 외에도 의외로 볼게 많은 스칼렛이었다. 전부 돌아보기에는 무리여서 몇 군데만 돌아보고 마지막으로 스칼렛의 하이라이트인 공연을 보러 갔다.

특이했던 성당.
화려했던 공연.

공연은 멕시코의 역사를 간략하게 보여주며 시작했다. 스페인의 침략을 받고 결국 종교를 통해 화해와 구원을 얻었다는 메시지가 있었지만 잘 공감이 가질 않았다. 2부에는 멕시코 각 지역의 전통춤 공연이 있었는데, 각 지역의 지도를 스크린에 띄워줄 때마다 환호가 들리는 것을 보니 멕시코 관광객도 외국인 관광객 못지않게 많은 것 같았다. 멕시코 사람들에게도 칸쿤은 유명한 관광지인 모양이었다.


공연을 마지막으로 호텔로 돌아왔다. 방으로 돌아온 우리는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그대로 뻗어버렸다. 꿈속에서 나는 다시 한번 바닷속을 탐험했다.




맛있는 칸쿤.


이쯤 해서 칸쿤에서 먹었던 음식에 대해서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꼭 여행기를 시간의 흐름대로 쓸 필요는 없으니까. 여행기라기보단 먹은 음식 자랑에 가깝지만, 이 정도면 올 인클루시브의 느낌이 어떤지 대충 전할 수 있으리라.

제일 마음에 들었던 프렌치 레스토랑. 음식 사진은 아쉽지만 없다.
새우와 문어(오른쪽 중앙), 관자(위) 등 요리
파스타와 스테이크
차려입은 김에 바에서 한 잔. 나는 역시 맥주ㅜㅜ
리조트 안에 작은 멕시코 마켓이 열렸다.
연어요리였는지, 스테이크였는지 기억이 안 난다.
별채의 바 앞에 있던 간단한 요깃거리들.
물놀이하다 배고파지면 언제든지 먹을 수 있다.




휴양지가 갖춰야 할 모든 것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칸쿤은 휴양지가 갖춰야 할 모든 것을 갖추고 있다. 칸쿤 대부분의 호텔이 채택하고 있는 올 인클루시브가 주는 편안함은 물론이고, 브런치에 싣지 않은 다양한 액티비티, 매일 밤 펼쳐지는 쇼, 아름다운 자연과 아즈텍 고대 유적까지. 대부분 휴양지가 한두 가지를 결여하고 있는데, 칸쿤은 모든 것을 갖추었다.

리조트에서 밤마다 각종 쇼를 보여줘 지루할 틈이 없다.
직접 스노클링 포인트까지 보트를 운전해서 스노클링을 즐기는 액티비티.

두서없이 쓰다 보니 어떻게 마무리지어야 할지 모르겠다. 칸쿤은 어쨋든 대단히 만족스러운 휴식이었다. 엄청 달게 먹고 나면 다른 음식의 맛이 안 느껴지듯, 칸쿤 이후로 다른 휴양지가 눈에 안 들어올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내가 생각하던 휴양지, 그 이상을 보여주었던 곳. 칸쿤이었다.


아 또 가고싶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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