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2월 4일 토요일 - 밥을 같이 먹는다는 것
런던에서 밥을 같이 먹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한국에서는 처음 만나는 소개팅 자리에서도 대충 때가 되면 식사를 한 후 헤어지곤 한다. 설령 크게 맘에 안 든다고 해도 예의를 다해 한 끼 식사 정도는 할 수 있는 것이다. 밥 한 번 같이 먹는 게 뭐 대수겠는가?
그러나 영국에서는 식사를 같이 하는 건, 특히나 단 둘이서, 대수다. 일단 식성이 매우 다르고, 다양한 종류의 베지테리언 또는 비건들이 있으므로, 서로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기 전이라면 나 같은 사람은 감히 밥 먹으러 가자고 이야기도 못 꺼낸다. 특히나, 나는 음식 측면에서는 영국에 사는 데 최적화하고는 매우 거리가 멀다. 우선, 맥주나 와인을 못 마시고, 딱딱하거나 찬 음식이 힘들고, 빵도 즐기지 않으며, 아침에 잣죽을 손수 해 드시고, 하루 세 끼 밥을 해 먹는 나로서는 이 유럽인들과 식사를 한다는 건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이다.
물론 우르르 같이 가서 먹을 수는 있다. 우리 회사는 영국에만 대략 200명 넘는 직원들이 있으므로 전사 차원에서 회식을 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나 소그룹으로 또는 팀별로 펍에 가서 한두 잔 하는 일은 빈번하며, 팀별로 식사하는 자리는, 30명이 넘는 우리 저작권 팀의 경우, 일 년에 여러 차례 있다.
한 번은 우리 팀에서 열댓 명이 점심에 피자를 주문해서 먹은 적이 있었다. 식사용으로 나오는 작은 사이즈의 피자라 각자가 좋아하는 피자를 미리 이야기하고 한 명이 대표로 주문해서 회사로 배달시킨 경우이다. 저마다의 식성에 따라 다양한 피자가 왔다. 고기가 들어간 피자, 브로콜리가 올려진 피자, 매운 피자, 달달한 피자, …. 이런 일이 한국에서 있다면, 우리는 당연히 모든 피자를 중간에 모아 두고 서로 한 조각씩 바꿔가며 맛볼 것이다. 그런데, 이 나이 많은 동양인 눈에는 참으로 낯설게도, 우리 동료들은 남의 피자를 절대 넘보지 않고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물론 더러, 한 조각씩 바꿔 먹는 동료들도 있었지만, 자기 피자에 집중했다. 누구는 루꼴라를 집에서 따로 챙겨 온 동료도 있었다. 역시 자기 피자 위에 올려 혼자 냠냠 먹었다. 서로 바꿔서 먹으면 영양적인 측면에서도 더 좋을 텐데 하고 생각하면서 나도 내 피자를 먹었더랬다.
런던에 돌아온 한 달 사이 적잖은 식사 약속이 있었다. 코로나를 핑계로 퇴근 후 펍에서 한 잔 하는 자리는 모두 거절하였다. 우리 저작권 팀은 다시 네 개의 소팀으로 나눠져 있는데, 나는 아시아 팀의 일원이다. 우리 아시아 팀의 대만인 V가 회사를 옮긴다고 알린 지 좀 되었고, 내가 런던으로 돌아와 첫 출근한 날이 V의 마지막 출근날이었다. V는 그다음 주, 그만둔 동료 포함하여 아시아 팀에서 몇 명을 따로 저녁 식사 자리에 불러냈다. 그 첫 외식은 한국 식당 김치(Kimchee)에서 이뤄졌다. 코로나 시국임이 무색하게 식당은 사람들로 바글바글했고, 남편이나 남자 친구들도 일부 동참하여 모두 여덟 명이 모인 우리는 시끌벅적, 즐거운 식사를 했다.
그리고 우리 저작권 팀에서 스물한 명이 대대적으로 모였다. K도 돌아왔겠다, 저작권 팀의 날을 모처럼 마련하여, 아침에 한 해를 돌아보는 전체 회의를 하고, 11시 즈음 빵과 차로 사무실에서 간단하게 브런치를 하고, 다트 게임을 하러 쇼디치에 있는 플라이트 클럽(Flight Club)으로 나갔다. 각각 좋아하는 음료를 시키고 두 팀으로 나눠서 다트 게임을 했는데, 다트 게임이 이렇게 재밌는 줄 미처 몰랐다. 그냥 과녁에 적중하면 점수가 오르는 그런 단순한 걸 생각했었는데, 여러 가지 게임이 있었고, 이를테면 '뱀과 사다리' 게임을 다트로 할 수 있었다. 룰이 어렵지 않고 매우 건전하여 몹시도 흡족했다.
그러고 나서 한 세 시 즈음, 점심도 저녁도 아닌 회식을 하러 킹스 크로스 쪽으로 튜브(Tube: 런던 전철)를 타고 다시 이동했다. 디시훔(Dishoom)이라는 인도 식당에 자리를 잡았다. 목요일 이 시각에 사람들이 이렇게 많나 싶었다. 누군가 그랬다. 목요일이 이제 새로운 금요일이라고. 코로나 시국이라 사람들이 매일매일 출근을 하지 않다 보니, 목요일에 이렇게 한 주를 마감하는 모임들이 점점 잦아지나 보다. 이번에 오락 부장을 맡은 AB가 일인당 39파운드짜리인 다소 거한 크리스마스 세트 요리를 일괄 예약해 놓았다. 그렇다고는 해도 채식주의자들이 있어서 세부 메뉴나 디저트는 다시 주문을 받았다. 요리가 두 차례에 걸쳐서 크게 나오고 디저트도 두 종류나 나왔다. 나는 일 라운드로도 충분했지만 열심히 두 번째 라운드와 디저트까지 먹었다. 많은 음식이 남았고, 식당에서는 남은 음식을 싸 가도록 담을 용기도 잔뜩 가져다주었다. 한국인들이 짜장면을 좋아하고 배달을 잘 시키듯이 영국인들은 카레를 많이 먹고 배달도 곧잘 시킨다. 영국이 인도를 지배했었지만 인도 음식이 영국을 먹은 그런 양상이랄까? 다섯 시가 좀 넘어 하나둘씩 빠져나가면서 해산했다.
그리고 오늘은 또 다른 한국 식당에 갔다. 어제가 하우스메이트 B의 생일이었고, 토요일인 오늘 같이 저녁 할 것을 제안해 왔다. 그리고 B도 A도 김치를 포함하여 한국 음식을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다며 궁금해했다. 해서, 집에서 가까운, 홀로웨이 로드에 있는 쌈이란 한국 식당으로 갔다. 사장님은 그사이 네팔인 종업원을 고용해서 홀과 카운터를 전적으로 맡기고, 당신은 식당에서 계속 요리만 하고 있었다. 작은 식당이었지만 혼자서 요리를 해야 하므로 쉴 틈이 없어 보였다.
우리 두 하우스메이트는 요리에 대단히 만족한 모습이었다. 비건인 B는 두부 비빔밥을, A는 소고기 비빔밤을, 나는 김치볶음밥을 시켰다. 그리고 전채 요리로 튀김 요리도 시켰다. 구운 만두며 김말이 튀김 같은 게 나왔다. A도 B도 매운 걸 잘 못 먹어서 간장에 비벼 맛있게 먹었다. 기뻤다. 한국인인 나로서는, 그리고 직접 집밥을 해 먹는 나로서는 런던에 있는 한국 식당에 가는 게 그리 신나지는 않다. 이탈리아인은 런던에 있는 이탈리아 식당에 가는 게 내키지 않고, 일본인은 일본 식당에 가자 하면 시큰둥하다. 나도 그런 치 중에 하나였는데, 한국 음식이 날로 인기가 많아지고 있고, 나한테는 익숙한 음식이라 다 비울 수 있고 하니 나도 이제 그리 나쁘지는 않다.
다행히 내일 점심 약속은 아시아 식당을 피해 네덜란드 식당으로 가는 것으로 AL이라는 또 다른 영국인과 이야기가 미리 된 상태이다. AL이 별로 좋아할 거 같지는 않지만. 어쨌거나, 나도 밥 말고 색다른 음식 좀 먹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