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로 인해 쌓여만 가는 여행 욕구를 달랠 겸 사진을 정리하는데 시카고 어딘가에서 교수님을 찍은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짧은 머리지만 세월을 말하는 회색 머리카락이 눈에 띄었고 지금처럼 그때도 키가 크고 호리호리하셨다. 프레임 안 왼편에 서서 해변가에 주차된 차 문을 열고 계시는 사진.
교환학생 시절 3개월에 가까운 여름방학을 귀국하지 않고 미국에서 보내기로 했을 때 교수님이 연락을 주셔서 며칠을 함께 했다. 시카고는 교수님의 고향이었고 은퇴하신 후 다른 지역에 거처를 구하시기 전에 가족들이 있는 시카고에 잠시 머무르고 계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교수님이 교수 생활의 말년에 접어드실 때 교수님의 수업을 수강하며 인연이 시작됐다. 많이 아껴주신 덕에 학기 중에 같이 식사를 하기도 하고 방학 중에는 같이 여행도 갔다. 교수님과 여행이라니, 지금 생각해보니 그게 웬 복이었나 싶다. 감사한 인연.
지금에 와서 돌아보면 성향도 비슷한 부분이 있지 않았나 싶다. 교수님은 타국에서 40년 가까이 교수생활을 하셨다. 교수진들의 의사결정과정이나 의사소통과정에서 외국인인 자신은 깊이 개입되지 않는다는 말씀이 기억에 남는다. 이방인의 삶. 인간관계에서 항상 주류와는 조금 거리가 있었던 내 모습이 나도 모르게 겹쳐보였던 것 같다.
은퇴 후에도 교환학생으로 온 제자를 챙겨주신 그 마음이 사진과 함께 새록새록 떠올라서 연락을 드렸다. 그런데, 역시나 인간은 죽을 때까지 배운다고, 내 표현에 원어민스럽지 않은 부분을 발견하고는 고쳐주셨다. 사진을 보니 내게 해준 일들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새삼 떠오른다는 메시지를 보냈는데, ‘내게’를 to me 라고 보냈더니 for me로 고쳐주신 것이다.
to가 우리말 어감으로는 ‘-에게’에 해당하니까 무심코 썼지만 to를 사용하면 마치 ‘네 놈이 내게 한 일’ 같은 어감이 담긴다는 말씀이었다. 그보다는 내게 ‘해주신’ 것에 강조점이 있으니까 for가 맞다. 원래 알았는데 안 쓰다보니 까먹었다는 구차한 변명이 이럴 때 나오는거다. 언어 학습자의 숙명이다.
그러고 보니 나는 영어를 배우면서 for라는 단어를 원어민들이 사용하는 맥락으로 쓰는 것이 늘 부담스러웠다. for를 너무 쉽게 사용한다는 느낌이랄까.
Take care of my son for me. (절 위해 제 아들을 돌봐주세요.)
She held the door open for me. (그녀는 날 위해 문을 잡아주었다.)
Would you do that for me? (절 위해 그 일을 해주시겠어요?)
처음 영어를 배울 때 이런 류의 문장들을 접하면 ‘나를 위해서’가 너무 도드라져 보여서 자의식 과잉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서양 문화권의 언어라 그런지 귀부인이 오만하게 손을 내밀어 에스코트를 요구하는 이미지, 배 나온 신사가 무심하게 발을 내밀어 구두를 닦으라는 이미지가 떠오르기도 했다. 영어는 우리 집이 아니고 내 집, 우리 가족이 아니고 내 가족이라더니 이런데서까지 나를 강조하나 싶었던 것이다.
그러려니 하고 넘어간지 십수년, 교수님의 메시지를 받고 생각이 바뀌었다. for me는 내가 그 배려를 받을 만한 사람이라는 당연한 주장이 아니라 상대의 친절을 인정하고 감사한다는 마음이 담겨있었다. 아이를 잠시 타인에게 맡길 때도, 내 뒤에 들어오는 이를 위해 문을 잡아줄 때도, 나에게 선의를 베풀리란 신뢰를 바탕으로 상대에게 부탁할 때도, 제자가 은사님의 애정을 감사할 때도 for me 안에 그 마음이 담기는 것이다.
표면적, 숫자적 평등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는 시대. 상대에 대한 고민은 사치가 되고 내 몫을 확보하는 일에만 골몰하는 시대. 고운 마음 메마른 지금 같은 건기에 교수님은 저 멀리에서도 제자에게 감사한 가르침을 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