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기를 보관하는 상자
대략 10년쯤 전의 일이다. 라면 끓여 먹는 것 빼고는 매일 엄마가 해 주던 밥을 얻어먹던 내가 그 무렵 처음으로 요리에 도전했다. 요리의 ‘ㅇ’자도 모르던 내가 겁 없이 도전을 할 수 있었던 건 <냉장고를 부탁해>라는 유명한 요리프로그램 덕분이었다.
‘처치 곤란 천덕꾸러기 냉장고 속 재료들의 신분상승 프로젝트! 대한민국 최고의 셰프들이 당신의 냉장고를 탈탈 털어드립니다!’
캐치프레이즈에 걸맞게 냉장고에 처박혀 있던 평범한 재료들이 실력 있는 셰프들의 손에 의해 고급요리로 탈바꿈하는 것이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내가 그 프로그램을 보고 용기를 얻을 수 있었던 건 실력 있는 그 셰프들이 아니라 출연자 중에서 유일하게 셰프가 아니었던 김풍 덕분이었다. 그는 딱 자취생들이 가지고 있을 법한 재료들을 가지고 지극히 불량하고 자극적이지만 그래도 보기에는 고급스러운 ‘야매’ 요리를 만들어내는 게 특기였다. 그런 요리들을 가지고 화려한 경력의 유명 셰프들을 꺾는 파란을 일으키는 것이 언더독의 성공을 보는 것 같아 통쾌했고, 요리를 할 때마다 어처구니없는 웃음 포인트들을 만들어 내는 것을 보면 마치 예능의 신이 돕는 것 같았다. (그의 음식을 맛본 유명 여자 모델의 ‘신음’이라든가, 빵반죽으로 본의 아니게 문어 튀김을 만들어 낸다든가…)
무엇보다 초창기 그의 요리는 레시피가 매우 간단한 것이 특징이었다. 그래서 ‘아… 저 정도라면 왠지 나도 한번 따라 해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싶은 용기가 생겼다. 처음으로 따라 했던 그의 레시피는 스팸과 바질 페스토를 주재료로 만드는 섹시한 컵이라는 요리였다. 주재료만 봐도 금세 상상할 수 있듯, 불량하고 자극적인 초딩 입맛 요리인데, 바질 페스토 덕분에 고급스러운 맛이 감돌았고, 만들기가 간단해서 꽤 여러 번 만들어 먹었다.
결혼을 한 이후부터는 내가 살림을 담당했기에 요리를 조금 더 열심히 하게 되었다. 혼자 먹을 것이 아니라 아내와 함께 먹을 음식이니 마냥 불량한 음식을 할 수만은 없었다. 신혼 때의 아내는 퇴근시간이 거의 일정했기에 필요한 재료들은 낮에 미리 장을 좀 봐 두었다가 오후 4~5시쯤부터 음식 준비를 시작해서 아내가 귀가하는 7시 정도에 맞춰 음식을 따뜻하게 낼 수 있었다. 신혼인지라 비싼 소고기 안심 두 덩이를 사다가 안심 스테이크를 구워 먹기도 하고, 이런저런 이국적인 소스로 향을 입힌 볶음밥이나, 수제비, 이연복 셰프의 대만식 돈까스(?)를 해먹기도 했다. 그 서툰 요리들을 아내가 참 맛있게 먹어줘서 그게 바로 신혼 재미인가 싶었다.
하지만 요즘은 알리오 올리오 파스타를 아주 가끔 만드는 것을 제외하고는 요리는 거의 하지 않는다. 그 이유가 꼭 신혼 기간이 지나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아내가 근무하는 부서가 바뀌며 저녁을 밖에서 먹고 들어오는 날이 많아졌고, 어차피 혼자 한 끼 때우는 마당에 이리저리 계산을 해보니 집에서 음식을 해 먹는 것이 기대했던 것만큼 그렇게 경제적이지도 않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다 쓰기도 전에 냉장고에서 상해서 버리는 신선 재료들이 가장 아까웠다. 작은 포장을 사면 양에 비해 가격이 비쌌고, 큰 포장을 사면 요리로 소진하기 전에 상했다. 상하는 것도 꽤 고약하게 상했는데, 어떨 때는 냉장고 안에서 곰팡이가 피기도 했고 또 어떨 때는 검게 썩어서 냄새 고약한 썩은 물이 질질 흐르기도 했다. 아까운 식재료가 그렇게 버려지는 것도 아까웠지만 그럴 때마다 냉장고 내부를 청소하는 것은 더 큰 고역이었다. 아예 소분해서 얼려버리라는 사람도 있었지만 얼릴 수 없는 재료도 은근히 많았고 꽁꽁 얼어 있는 걸 잘 녹이는 것도 꽤 번거로운 일이었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그렇게 얼려서 냉동실에 놓아두면 그런 재료가 있다는 걸 자주 잊어버린다는 점이다. 아이스크림 꺼내려고 냉동고 문을 열었다가 구석에서 잊힌 채 몇 달, 혹은 몇 년이 지났는지 알 수도 없는 식재료를 발견하면 스스로의 무신경함을 자책하며 결국 또 음식물 쓰레기로 버릴 수밖에 없었다. 요리의 기본은 식자재 관리가 기본 중의 기본이라고 하더니 나는 그쪽으로는 영 소질이 없었다. 결국 비용만 생각해 봐도 큰 차이가 나질 않아서 요즘은 주로 나가서 한 끼 식사를 사 먹거나 반찬가게에서 소량의 반찬들을 사다 먹는다. 그러다 보니 2인 가족에게 적당할 거라고 생각하고 크기를 조금 줄여서 산 550리터 냉장고가 절반은 비어 있는 상태다.
반면 시골의 처가에 내려가면 냉장고가 김치 냉장고 포함 총 4대인데, 다 합치면 2000리터를 가뿐히 넘을 것 같은 그 내부가 대부분 무언가로 꽉꽉 차 있는 것을 보면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직접 요리를 해 드시는 분들임을 감안하더라도 두 내외분이 쓰시기에 엄청난 양인 듯싶은데, 본가의 내 어머니도 내용물이 무엇인지 기억이나 할까 궁금한 불투명한 비닐과 통으로 냉장고를 꽉꽉 채워 두셨던 것을 보면, 그 연배의 어르신들에게는 냉장고가 일종의 곳간 같은 곳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현대인에게 냉장고는 필수품이다. 웬만한 식재료들은 비교적 긴 시간 동안 신선하게 보관할 수 있으니 사람들의 균형 잡힌 영양 섭취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요리를 하지 않는 우리 집조차도 우유나 계란 같은 최소한의 기본 색재료를 보관하거나 차가운 물과 얼음을 위해서 냉장고를 쓴다. 빈곤층이라면 다른 가전제품은 없더라도 냉장고는 꼭 가지고 있고 원룸이라면 미니냉장고라도 꼭 구비하고 있다. 냉장고가 없던 옛날부터 식재료를 장기 보관하기 위해 건조, 절임, 훈제 등과 같은 다른 보관법들을 이용하기는 하지만, 식품을 원래의 상태 그대로 신선하게 보관할 수 있는 냉장고에는 비할 바가 못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냉장고는 19세기말~20세기 초에 만들어졌다. 하지만 인류가 인위적으로 냉기를 사용하려는 노력을 한 것은 생각보다 매우 오래되었다. 가장 오래된 기록은 무려 기원전(!) 2500년경 이집트에서 증발냉각 효과를 이용한 항아리를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자료가 있다. 다공성의 항아리에 부채질을 하고 있는 노예의 모습을 그린 고대 이집트 벽화가 있는데, 이는 항아리의 물이 표면을 통해 증발하면서 냉각되는 효과를 만들어내기 위한 것으로 추측한다. 증발 냉각효과를 이용하는 항아리라는 고대의 아이디어는 전기가 없는 곳에서 사용할 수 있는 Pot in pot 냉장고로 발전했다. 1990년대 나이지리아의 교사였던 모하메드 바 아바(Mohammed Bah Abba)는 두 겹으로 이루어진 독특한 항아리를 발명했는데, 이 항아리는 안쪽과 바깥쪽의 항아리 사이 빈 공간에 모래를 채워 넣고 그 모래에 물을 부은 다음 물이 증발하면 안쪽의 항아리가 냉각되는 효과를 이용한 것이다. 안쪽의 항아리에 음식을 담아두면 내부가 차가워서 음식을 오랫동안 신선하게 보관할 수 있었기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낙후된 지역에서도 쓸 수 있다는 큰 장점이 있다. 다만 이 방식은 증발이 잘 일어나는 덥고 건조한 기후에서만 쓸 수 있으며, 무엇보다 물을 다량으로 소비해야 하므로 물이 귀한 곳에서는 사용하기 곤란하다는 단점이 있다.
기원전 1700년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아카드 제국의 기록 중에는 겨울철 눈 덮인 산에서 채취한 얼음을 보관하기 위해 유프라테스강 주변에 얼음창고를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 기원전 400년경의 고대 이란에서는 사막에서 얼음을 보관하기 위해 야크찰(Yakhchāl)이라고 부르는 특별한 구조물을 만들었다. 야크찰은 단열이 잘 되는 재료들을 이용해 돔, 혹은 원뿔 모양으로 높게 세워 만든 구조물이다. 야크찰을 높게 만들어둔 덕분에 대류에 의해 차가운 공기는 아래로 가라앉아 시원하게 유지할 수 있고 더운 공기는 상부로 모이게 된다. 상부에는 작은 구멍이 뚫려 있어 더운 공기를 밖으로 빼내도록 만들어져 있다. 야크찰 중에는 하부에 카나트(qanat)라고 부르는 지하 수로와 연결하는 구멍이 있는 경우도 있는데 이렇게 하면 지하수에 의해 냉각된 공기를 안쪽으로 채울 수 있어서 냉각효율이 더욱 올라갔다. 또 야크찰 바로 옆에다 넓은 풀장 같은 물 웅덩이를 만들어 두면, 기온이 떨어지는 밤에 물의 증발에 의한 냉각효과가 더해져 아예 얼음이 얼 수 있었고 여기에서 생산된 얼음을 바로 옆에 있는 야크찰로 쉽게 옮길 수 있었다. 별다른 에너지를 쓰지 않고도 건축물의 구조를 이용해서 자연적으로 이런 냉각효과를 만들어 냈던 것을 보면 옛날 사람들도 굉장히 똑똑했다는 걸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오래전에 지어진 야크찰이 아직도 여기저기 남아있기 때문에 지금도 이란에 가면 실물을 직접 볼 수 있다. 그래서 이 지역에서는 요즘의 냉장고도 야크찰이라고 부른다.
우리나라에서도 역사적으로 겨울철에 채집한 얼음을 보관했다가 여름에 사용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에 사용했던 얼음 창고의 이름을 딴 동빙고와 서빙고가 지명으로 남아 있어 유명하고, 그보다 훨씬 이전인 삼국시대부터 이미 얼음창고를 만들어 보관했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남아 있다. 빙고에 저장된 얼음은 주로 왕실이나 고위층들이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민간에서도 많이 사용했다. 특히 조선 후기에는 사빙고가 성행했는데, 성종의 친형인 월산대군의 사빙고와 강희맹의 사빙고가 그중 특히 유명하다. 얼음에 대한 민간의 수요가 많았기에 한양에서만 최대 10만 톤에 가까운 얼음을 저장하고 사용했을 정도였다. 상인들은 서해에서 잡은 어류를 서울로 냉장 운송하거나 육류를 냉동 보관하는 용도 등으로 활용했다. 얼음 사업이 돈이 되는 사업이다 보니 정조시대에는 빙계라는 조직이 출현해서 한양의 얼음사업을 독점해 얼음 가격을 올렸으며 이 때문에 기존의 장빙업자들과 알력다툼이 생겨나기도 했다.
19세기의 미국에는 이런 얼음 채취/보관 사업을 아예 통 크게 세계구급 스케일로 확장한 사람이 나타났다. 1783년 9월 4일 출생해서 훗날 ‘보스턴의 얼음왕’이라고 불렸던 프레데릭 튜더(Frederic Tudor)라는 인물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는 자신이 거주하던 뉴잉글랜드에서는 얼음은 전용 창고를 지을 수 있는 소수의 부자들을 위한 사치품이었기에 이걸 더운 미국 남부와 서인도제도까지 운반해서 팔아먹겠다는 대담한 생각을 했다.
1806년 그는 집안의 사유지에서 얼음 채취한 다음 서인도제도의 마르티니크섬까지 운송하는 첫 시험 수출을 시도했다. 하지만 운송 도중에 상당량의 얼음이 녹았고, 그나마 녹지 않아 배에서 내려놓았던 얼음은 차갑게 보관할 얼음창고가 없어서 팔기도 전에 다 녹아버리고 말았다. 결국 그의 첫 수출은 실패로 끝났지만, 더운 지방까지 배로 운송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으로 큰 성과라고 여겼는지, 이번에는 아예 쿠바의 하바나에 얼음창고를 건설해서 다시 수출을 시작했다. 한때 채무 때문에 감옥생활까지 했을 정도였으니 사업이 궤도에 올라 수익을 내기까지의 과정은 꽤 험난했던 모양이다. 그는 운송 중 얼음이 녹는 것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단열 문제에 특히 공을 들였는데, 제재소에서 나오는 톱밥이 단열효과가 좋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폐기물로 버려지는 톱밥을 공짜로 받아서 손실을 최소화했고, 돌아오는 길에는 팔다 남은 얼음으로 현지의 과일을 신선하게 수입해서 부가 수입을 올렸다. 경쟁자가 나타나면 가격을 낮춰 견제하면서 미국에서 남미와 뉴질랜드, 홍콩, 필리핀 인도의 캘커타까지, 전 세계로 사업을 확장해 나갔다.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중에는 경쟁자들이 늘어나 시장 독점은 불가능했지만, 시장 자체가 더 크게 성장해서 그의 수익도 늘어났다. 1855년 기준 연간 200만 톤의 얼음이 저장되어 주로 온도 조절이 매우 중요한 양조장이나, 육류나 과일의 신선한 상태로 운송하는데 소비되었다. 그 사이 기계식 제빙기가 나왔지만, 제빙기는 아직 초창기였기 때문에 한계가 많았기에 한동안은 얼음 무역이 유지될 수 있었다. 하지만 제빙기의 기술이 점점 발전하고 가격 경쟁력을 갖기 시작하자 서서히 수입 얼음의 수요를 대체하기 시작했다. 얼음 무역을 통해 판매되는 천연 얼음에도 여러 한계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운이 나빠 그 해 따뜻한 겨울이 된다면 얼음이 어는 양이 적어져서 여름철 수요를 충당할 수 없었다. 또 강이나 호수에서 채취하는 얼음은 안전성에 대한 우려가 있었다. 채빙장소의 물이 깨끗하지 않은 경우에는 장티푸스균 같은 세균이나 불순물이 섞여 수인성 질병을 일으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 제빙기술이 발달하여 가정용 냉장고가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얼음 무역 산업은 그대로 종말을 맞았다.
냉기를 보관하는 냉장고의 가장 원시적인 형태는 겨울에 채취한 얼음을 단열이 잘 되는 아이스박스에 안에 넣고 그 안에 음식물을 보관하는 형태였다. 얼음 없이 인위적으로 온도를 낮추어 냉기를 만들어 낸 것은 얼음 무역이 시작되기도 전인 1755년에 스코틀랜드의 의사 윌리엄 컬렌 (William Cullen)이 만들어 낸 작은 냉각장치에서 시작했다. 그 원리는 고대에 만들어졌던 항아리처럼 증발 냉각효과를 이용하는 방법에서 출발했다. 디에틸에테르 용기를 진공으로 만들어 끓는점을 낮추면 증발이 쉽게 이루어져 주변의 열을 흡수하는 장치였다. 이 장치는 실험실 수준에서 만들어진 작은 설비였기 때문에 실용화된 장비는 아니었다. 현대적 냉장고에 사용되는 증기압축냉동 사이클의 원리는 1805년 미국의 발명가 올리버 에반스(Oliver Evans)가 정립했다.
1755년 9월 13일 델라웨어주에서 출생한 그는 냉장고의 작동 개념은 만들었지만 실제로 작동하는 냉장고를 직접 만들지는 못했다. 아마도 다른 돈 되는 발명들을 하느라 너무 바빴던 모양이다. 그는 자동 제분기(Automated Flour Mill) 공정을 설계하고 컨베이어 벨트, 버킷 엘리베이터, 스크루 컨베이어, 호퍼보이(빻은 가루를 바닥에 고루 펴주는 장비) 등 자동화 공정에 필요한 각종 설비들을 발명했다. 또한 미국 최초의 고압 증기기관을 만들었고, 이를 활용한 Oruktor Amphibolos라고 이름 붙인 증기 자동차까지 만들었는데 그냥 자동차가 아니라 심지어 세계 최초의 수륙양용(!) 자동차였다. 나중에 세어보니 그의 발명품의 총 80개나 되었다고 한다. 다방면의 발명을 한 것을 보면 영화 백 투더 퓨처의 에밋 브라운 박사 같은 이미지가 떠오른다.
특히 그의 발명품 중에 자동제분 프로세스는 상업적 성공을 거두어 밀가루 제조 공정에 드는 비용을 상당히 낮출 수 있었고, 결과적으로 미국 내 빵 가격을 낮추는데 크게 기여했다고 한다. 이 정도의 업적이라면 상당한 존경을 받을 만도 했지만, 그는 워낙 자의식이 강한 사람이라서 자신의 업적이 과소평가받는다며 우울증을 앓았다고 한다. 자신의 특허가 침해받는다고 여겨 자주 특허 분쟁을 일으켰으며 결과적으로 너무 많은 적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오히려 미움을 받았던 모양이다.
결국 그의 냉동기술을 활용한 냉장고는 그가 개념을 정립한 지 거의 30년이 다 되어서야 처음으로 만들어졌다. 1834년 미국 출신의 발명가 제이콥 퍼킨스(Jacob Perkins)는 올리버 에반스의 창안한 방식대로 실제 구동가능한 냉각 시스템을 만들었다. 이어 1842년 미국의 의사 존 고리(John Gorrie)가 제대로 작동하는 제빙기를 만들어 내고 특허까지 받았지만 설비를 만들기 위한 투자금을 마련하지 못해서 결국 사업에는 실패했다. 상업적으로 제대로 쓸만한 냉장고는 1851년 호주인 제임스 해리슨(James Harrison)이 만들었는데, 그의 제빙설비는 하루 약 3톤가량의 얼음을 생산할 수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제빙기는 증기기관을 동력으로 하는 거대한 얼음 공장에 가까웠다. 가정용으로 음식을 보관하는데 쓰기에는 아무래도 무리가 있었다. 1894년 헝가리의 발명가이자 사업가인 이슈트반 록(István Röck)이 전기를 동력으로 하는 제빙기를 만들어 내자 10년이 채 되지 않은 1913년에 미국의 프레드 울프(Fred W. Wolf)가 최초의 가정용 및 가정용 전기냉장고인 DOMELRE(Domestic Electric Refrigerator의 약어)를 발명하고 생산했다. 일일이 얼음 공장에서 얼음을 사다가 아이스박스에 채울 필요 없이 전기로 작동하는 냉각장치가 상부에 장착되어 혁신이라고 불릴만한 물건이었다. 이를 시작으로 여러 발명가와 사업가들이 다양한 형태의 냉장고를 만들기 시작했다.
가정용 냉장고가 등장하기는 했지만 널리 보급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은 비싼 가격과 냉매였다. 초창기의 냉장고 한 대의 가격이 저렴한 자동차의 대명사였던 포드의 모델 T 가격의 거의 두 배에 달했고 일반적인 근로자의 1년 치 연봉에 가까운 금액이었기에 부유층들이 주로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당시의 냉장고는 주로 암모니아, 이산화화항, 에테르, 클로로메테인등을 냉매로 사용했는데 독성물질이라서 누출될 경우 인체에 유해한 물질들이었다. 아무래도 안전하게 사용하기에는 좀 꺼림칙한 상황이었는데, 이 문제는 1920년대 프레온 가스가 발명되면서 가정용 냉장고의 대중화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프레온 가스는 비교적 안정적인 물질이라서 다량으로 흡입하지 않는 이상 냉매가 조금 새는 정도로 인체에 큰 문제를 일으킬 정도는 아니어서 냉매로 널리 사용되었지만, 대기 중의 오존층을 파괴하고 심각한 온실효과를 일으키는 것이 밝혀져 지금은 더 이상 냉매로 쓰이지는 않는다.
더운 날씨가 연일 이어지고 있다 보니 매년 이맘때면 사람들에게 인류의 구원자로 추앙받다가 가을이 되면 초단기 퇴물로 잊히는 윌리스 캐리어(Willis Haviland Carrier) 생각이 난다. 윌리스 캐리어가 현대 에어컨의 원리를 발명한 것이 1907년 무렵이니 가정용 냉장고가 등장하려고 하던 그 무렵의 일이다. 다들 알고 있겠지만 냉각 원리는 에어컨이나 냉장고나 동일하다. 둘 다 단열 밀폐된 공간 내부의 열기를 공간 밖으로 내보내는 장치인데 냉각할 공간의 크기가 캐비닛 크기이면 냉장고가 되는 것이고 집 전체의 크기가 되면 그게 에어컨이다. 캐리어 님의 은총으로 당장은 이 힘든 여름을 견딜 수 있어 다행이긴 하지만 최근의 폭염은 지구 온난화에 의한 기상이변 때문이라는 학자들의 분석을 보면 더 늦기 전에 온난화를 막을 기술적 해결책이 어서 나와야 할 것 같다. 최근에 온실가스인 이산화탄소를 대기중에서 바로 포집해서 저장하는 공장인 매머드(Mammoth)가 가동되었다고 하는데, 제발 효과가 있기를 기대해 본다. 그게 영 신통치 않다면 대기권 밖에다 초대형 실외기(?)라도 달아야 할 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