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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구석 보헤미안 Aug 14. 2024

힘 안 들이고 깨끗한 옷을 입으려면

세탁기를 만든 사람들

미국인들의 속옷 주기

2019년 미국의 속옷 브랜드 Tommy John에서는 아주 흥미로운 설문결과를 발표했다. 미국의 성인 남녀 2000명을 대상으로 얼마나 자주 속옷을 갈아입는지에 대한 설문을 했는데, 그 결과가 상당히 재밌다. 조사대상의 45%는 같은 속옷을 이틀 이상 입는다고 대답했으며, 13%는 같은 속옷을 무려 일주일 이상 입는다고 답변한 것이다. 정식 설문조사 기관의 조사도 아니고 표본도 2000명에 불과하니 결과의 신뢰성에 대해서는 조금 걸러 들고 그저 재미로만 바라볼 필요는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45%라는 숫자는 상당히 놀랍다. 1일 1샤워는 기본에 속옷은 최소 하루에 한 번은 갈아입는 것이 상식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살지 않는다고 답한 사람이 거의 절반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요즘같이 세탁하는 게 그리 힘들지도 않은 세상에 왜 굳이 속옷을 그렇게 오래 입는지 이해가 잘 되질 않는다.



옛날의 빨래하던 풍경

요즘이야 세탁기가 있으니 여러모로 편리하지만, 불과 3~40년 전만 해도 빨래는 정말 힘든 일이었다. 상수도가 보편화되어 수돗물이 집까지 들어오고 있으니 우물이나 냇가에서 물을 직접 길어오거나, 빨랫감을 들고 빨래터에 나가는 불편은 덜었지만, 손빨래는 기본적으로 고된 노동이 필요한 일이다. 어릴 적 엄마가 수도가에 쪼그리고 앉아 빨래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기억이 난다. 빨간 고무다라이에서 하나 건져낸 빨랫감을 빨랫돌 위에 올려 비누칠을 하고, 빨래판에 대고 벅벅 비비거나 방망이로 팡팡팡! 두드리던 모습, 깨끗한 물을 새로 담은 다라이에 비눗기를 헹군 다음 다라이를 통째로 들고 나일론 빨랫줄 앞에서 다된 빨래의 물기를 있는 힘껏 비틀어 짜내면 아래로 주르륵 물이 떨어지는 장면, 그런 빨래를 탈탈 털어 빨랫줄에 하나씩 너는 엄마의 모습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엄마는 특히 빨래를 비틀어 짜는 걸 많이 힘들어하셨다. 빨래의 물기를 짜는 데는 상당한 근력이 필요한 데다, 특히 손목에 무리가 많이 가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집에 세탁기가 생기고 나서도 엄마는 손목이 시큰시큰하시다며 한동안 후유증에 시달렸다. 그나마 옷가지 빨래는 양반이다. 이불 빨래를 할 때는 세탁 방식 자체가 바뀌었다. 좀 더 크기가 큰 고무통에 세제를 푼 물을 담고 이불을 통째로 넣은 다음 꾹꾹 밟아서 빨았고, 시커먼 구정물을 여러 번 갈아가며 헹군 다음에는 물기를 제대로 짜내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서, 무거운 고무통을 기울여 최대한 물기를 따라낸 다음 통을 그대로 빨랫줄로 가져가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이불을 그대로 널기도 했다. 

겨울이 되면 빨래의 난이도는 급격히 올라간다. 그 당시에는 우리 집처럼 수도가 아직 실내로 들어오지 않은 집들이 많았다. 연탄으로 난방을 하던 시절이었으니 온수를 공급하기 위한 보일러조차 없었다.  겨울철에는 칼바람이 부는 수도가에서 얼기 일보 직전의 차가운 물로 손세탁을 해야 했다. 춥다고 빨래를 안 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커다란 찜통에 물을 한 동이 직접 끓여서 찬물에 섞어서 빨래를 하는데 매번 그렇게 물을 끓인다는 게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니었다.

그나마 엄마의 고생은 집에 세탁기가 생긴 다음부터 눈에 띄게 줄었다. 그 시절 세탁기들이 다들 그랬듯이, 세제는 필요한 만큼 직접 넣어줘야 했으며, 물의 양도 버튼과 다이얼을 이용해서 알맞게 조절해 줘야 했다. 세제로 세탁하는 과정이 끝나면, 이어서 헹굼을 위해 다시 버튼을 조작해 줘야 했고, 세탁조와 탈수조가 별도로 나뉘어 나란히 붙어 있었었기 때문에 탈수를 위해서는 세탁조에 남아 있는 세탁물을 바로 옆의 탈수조로 옮겨서 타이머 다이얼을 돌려줘야 일정시간 동안 탈수가 되었다. 번거롭기 짝이 없는 불편한 수동 세탁기였지만, 어머니는 정말 좋아하셨다. 그전까지 세탁하던 고생에서 해방된 것만으로도 ‘신문물’이었음이 틀림이 없다. 어찌나 대단한 물건이었던지, 어느 겨울날에는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아 데면데면하게 교류도 없이 지내던 뒷집의 아주머니가 탈수만 좀 하자면서 염치 불구하고 빨래를 대야채로 들고 와서는 탈수기를 쓰고 간 일도 있었다.


아마도 이 모델이었던 것 같다, LG의 전신인 금성사의 백조세탁기


그 번거로운 수동세탁기조차 손빨래를 하던 시절에 비하면 사람의 고생을 크게 덜어줄 정도였으니, 빨랫감과 세제, 섬유 유연제를 넣어주고 버튼만 누르면 알아서 탈수까지 해 주는 요즘의 전자동 세탁기의 편리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빨래를 하는 사람은 세탁기가 돌아가는 동안 다른 일을 하다 세탁기에서 슈베르트의 송어가 흘러나올 때 빨래를 꺼내 자연 건조가 필요한 옷은 건조대에 널고 나머지 옷들은 건조기로 옮겨서 말리면 그만이다. 심지어 요즘에는 세탁과 건조마저 함께 해 주는 세탁기가 출시되고 있으니 언젠가 빨래를 개어주는 모델까지 틀림없이 나올 것만 같다.




그보다 더 이전의 세탁


세탁기가 발명되기 이전 꽤 오랫동안 사람들은 손빨래를 해야만 했는데, 비누를 비롯한 세탁 세제가 대중화되기 전에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빨래를 할 때 잿물 또는 삭힌 오줌(!)을 세제로 사용했다는 사실은 재미가 있으면서도 살짝 비위가 상한다. 세탁에 굳이 삭힌 오줌을 사용한 이유는 암모니아 성분이 알칼리성이라서 세정 효과가 아주 좋았기 때문이다. 현대인의 관점에서는 비위가 좀 상하는데, 고대 로마에서는 치아 미백을 위해 오줌으로 이를 닦는 경우마저 있었다는 기록을 보면 아무래도 고대인들은 오줌에 관대했던 모양이다.

고대 로마에서 빨래를 할 때 삭힌 오줌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자주 등장하는데 특히 양모업자들이 양털의 기름기를 제거하고 표백하기 위해 많이 사용했다고 한다. 양모업자들은 로마의 공중화장실에서 공짜로(!) 오줌을 수거한 다음 발효해서 사용을 했는데, 이를 눈여겨본 베스파시아누스 (Vespasianus) 황제는 양모업자들이 오줌을 수거할 때마다 세금을 부과하는 이름도 향긋한 ‘오줌세’를 도입한다. 양모업자들은 당연히 이에 반발했는데, 황제의 아들이었던 티투스(Titus)도 이건 좀 너무했다 싶었는지 아버지에게 투덜거리자 황제는 아들의 코앞에 거둬들인 돈을 들이대며 '돈에는 냄새가 나지 않는다(Pecunia non olet)'라며 할 말을 잃게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흉상, 로마인들은 오랫동안 그의 이름을 공중화장실을 지칭하는 말로 썼다

어쨌거나, 양모업자들에게는 빨래가 중요한 문제였는지 빨래하는데 기계를 처음 이용한 것도 바로 양모업자들이다. 풀링(Fulling)이라는 공정은 직조된 모직 옷감을 세척해서 양모의 기름과 때를 제거하고 옷감이 적당히 수축하도록 만드는 공정이다. 양모업자들은 이 과정에서 풀링밀(Fulling Mill)이라고 부르는 기계장치를 사용했다. 이 장치는 물의 힘으로 수차가 회전하면서 빨랫감을 두드리도록 만든 장치인데, 외관이나 구조를 보면 우리나라의 물레방아와 유사하다. 차이가 있다면 풀링밀은 빨래를 두드렸고 우리는 방아를 찧었다는 점이다. 양모업자들은 중세시대부터 이 풀링밀을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영국을 기준으로 하면 12세기에 세워진 것이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풀링밀을 설명하는 그림


지금도 남아있는 풀링밀 유물




최초의 세탁기 발명


세탁과 관련된 최초의 특허는 1691년 영국에서 부여되었지만 이건 엄밀히 말하면 세탁만을 위한 장치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우리가 빨래를 위한 ‘세탁기’ 하면 떠올릴 수 있는 세탁기계를 처음으로 만든 사람은 18세기 독일의 과학자이자 발명가인 야콥 크리스티안 섀퍼(Jacob Christian Schäffer)였다. 1718년 독일의 퀘르푸르트에서 출생한 그는 원래 본업이 대학 교수이면서, 식물학, 진균학, 곤충학, 조류학을 연구하고 거기에 발명까지 했으니 다방면으로 바쁘게 살았던 사람이었다. 그의 세탁기는 1767년 독일에서 공개되었는데, 둥근 통 안에 빨래와 세제를 넣고 내부의 봉으로 빨래를 휘저어서 세탁하는 방식이었다. 비록 원시적이기는 하지만 세탁기의 원형이라고 할만한 물건을 발명했다는 의미가 있다. 

야곱 크리스티안 섀퍼, 세탁기의 할아버지쯤 되려나…
섀퍼가 발명한 세탁기, 통 안에서 저 교반봉이 회전했다


이어서 1782년에는 영국의 헨리 시지어(Henry Sidgier)가 드럼식 세탁기를 발명했고 1797년에는 미국의 나다니엘 브릭스(Nathaniel Briggs)가 미국에서는 처음으로 세탁기 관련 특허를 받았는데, 하필 1836년 특허청에 화재가 발생하여 자료가 소실되는 바람에 그 형태나 작동방식은 지금은 알 수가 없다. 형태는 조금씩 달랐지만 어쨌거나 이 시절의 세탁기는 기본적으로 손으로 크랭크 손잡이를 돌려서 빨래를 하는 방식이었다. 노동의 강도가 줄기는 했지만 여전히 사람의 노동력이 필요했다. 


Amos Larcome이 발명한 또 다른 형태의 드럼식 세탁기계
대충 이런 식으로 세탁을 했다는 이야기. 1949년의 사진


또한 다 된 빨래의 물기를 빼내기 위해서는 여전히 손으로 비틀어 짜거나, 맹글이라고 부르는 도구를 이용했다. 맹글(영국식으로는 mangle, 미국식으로는 wringer)은 두 개의 압착롤러 사이에 옷감을 넣고 손잡이를 돌리면 그 사이로 옷감이 지나가며 물기가 빠져나가도록 만들어진 도구다. 1843년에는 존 턴불(John E. Turnbull)이 세탁기에 맹글을 결합한 제품을 선보였는데, 단순히 세탁기에 붙여 놓은 정도라서 세탁물을 일일이 맹글에 넣어 밀어줘야 했기에 그리 대단한 혁신은 아닌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맹글을 따로 갖춰놓지 않아서 손으로 짜야하던 고생을 덜어줬고 무엇보다 젖어서 무거운 세탁물을 맹글이 있는 자리까지 옮길 필요가 없으니 조금은 더 편리했다.

맹글을 이용 해서 물기를 짜는 모습



1874년 미국 인디애나주에 살던 상인 윌리엄 블랙스톤(William Blackstone)이 만든 세탁기는 조금 더 흥미롭다. 나무통 안에 있는 나무 쐐기에 세탁물을 고정한 다음 비눗물을 휘저어 세탁물을 씻어내는 단순한 방식이었지만, 그는 생일을 맞은 아내에게 선물하려고 이 세탁기를 만들었으니 진정한 ‘사랑꾼’이었던 모양이다. 기존까지 세탁기라는 물건은 주로 양모업자나 세탁소에서 사용하기 위한 상업용 기계였으니, 블랙스톤이 만든 이 세탁기야 말로 최초의 ‘가정용 세탁기’라고 불러도 좋을 것 같다. 

19세기 중반부터는 세탁기를 움직이는데 증기기관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도시에 세탁소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직접 빨래를 하는 고된 노동에서 해방될 수 있었기에 초반에는 많은 인기를 끌었지만, 뜨거운 증기가 뿜어 나오는 세탁공장 내부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더위 때문에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또한 소음과 진동이 심해서 주택가에서는 민원이 심했고, 무엇보다 석탄연기 때문에 기껏 깨끗하게 빨아 둔 세탁물을 건조하는 동안 다시 검댕에 묻어 더러워지는 경우가 많았다. 결국 오래지 않아 전기세탁기가 발명되며 증기세탁소는 사장되었다.




전기세탁기의 발명

전기세탁기를 누가 처음으로 발명했는지는 사실 잘 모른다. 1910년에 알바 존 피셔(Alva John Fisher)가 최초로 발명한 것으로 알려져 많이 알려져 있지만, 그보다 이전인 1908년에 올리버 우드로(Oliver B Woodrow)가 받은 전기세탁기에 관한 특허기록(US patent 921195A)이 있는 데다, 1904년에 이미 전기세탁기에 관한 광고가 나온 적이 있기 때문이다. 최초로 누가 발명을 했던지 간에 알바 존 피셔가 세탁기 토르(Thor, 왠지 빨래를 엄청난 힘을 가진 망치로 두드려서 빨아줄 것 같은 이름이다.)가 최초로 상업적으로 성공한 소형 전기세탁기라는 데는 이견이 없을 듯하다. 그의 토르 세탁기는 구멍 뚫린 통이 세탁조 내에서 회전을 하는 방식이었고, 세탁물의 엉킴을 방지하기 위해 역회전하기도 했으니, 지금의 통돌이 세탁기에 상당히 근접한 형태였다.

알비 존 피셔의 토르(Thor)세탁기 광고


1908년 우드로의 전기세탁기 특허(왼쪽)와 1910년 피셔의 전기세탁기 특허(오른쪽)


최초의 가정용 전자동 세탁기는 생각보다 훨씬 이른 시기인 1937년에 만들어졌다. 미국의 존 체임벌린(John W Chamberlin)과 렉스 얼 바셋 주니어(Jr Rex Earl Bassett)가 전자동 세탁기에 관한 특허를 취득했는데(US patent 2165884A) 1937년 벤딕스사(Bendix Home Appliances)에서 Bendix Home Laundry라는 이름으로 출시되었다. 이 세탁기는 세탁 코스에 맞춰서 세탁, 헹굼, 탈수까지 자동으로 해 줬고 세제도 자동으로 넣어준다고 홍보했다. 1950년까지 무려 200만 대를 판매해서 상업적으로도 성공한 제품이다. 어릴 적 우리 집에 있던 그 수동 세탁기를 산 게 1980년대 초반이니 벤딕스의 세탁기는 정말이지 시대를 한참 앞섰던 제품인 셈이다.


벤딕스사의 전자동 세탁기 광고




현대인과 세탁기

이제 세탁기는 현대인들에게는 거의 필수품에 가깝다. 세탁기의 발명 덕분에 가사노동에 들어가는 시간이 줄어들었기에 여성의 사회 진출이 가능하게 했다고 보는 의견과 빨래에 들어가는 시간이 줄어든 대신 빨래를 더 자주, 많이 하게 되었기에 노동 시간은 줄지 않았다는 의견이 대립하고 있기는 하지만, 노동의 강도가 줄어든 것만큼은 확실하다. 하지만 이렇게 좋은 물건을 쓰는 대신 다른 방식으로 빨래의 노동을 해결하는 나라도 있다. 무한도전 해외극한알바 편에 등장해 많은 이들에게 알려진 인도의 빨래터 ‘도비가트’는 ‘도비왈라’라고 하는 세탁 전문가들이 모여 손빨래를 하는 대규모 세탁 사업장이다. 인도에서 가장 큰 뭄바이의 도비가트가 건설된 것이 1890년이라고 하니, 한창 세탁기가 발명되고 있을 때, 인도는 세탁을 ‘외주’하는 방식으로 가사노동을 해결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인지 2024년 3월 16일 자 서울경제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인도의 세탁기 보급률은 16% 정도라고 한다. 저렴한 가격에 세탁기보다도 더 깨끗하게, 그것도 잘 말려서 다림질까지 해서 배달해 주는데 굳이 세탁기를 살 필요가 없다고 한다. 도비왈라들은 카스트의 가장 아래에도 속하지 못한 불가촉천민들이 담당하고 있으니 세탁에 드는 비용이 저렴한 것은 아마 이것 때문일 것이다. 자료에 따라 다르지만, 뭄바이의 도비가트에만 5000~7000명의 도비왈라들이 고생을 하고 있다고 한다. 다른 나라의 문화와 관습에 대해 함부로 가치 판단을 내린다는 것은 적절하지 않기에 이걸 두고 왈가왈부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다만 그들이 다음 생에는 좀 더 높은 카스트로 태어나거나 카스트가 없는 곳에서 태어나길 먼 곳에서 기원하며 나는 오늘도 세탁기를 돌린다.

뭄바이의 도비가트


아. 그러고 보니 무한도전의 그 에피소드에서 광희가 참 억울해했던 게 기억에 남는다. 10주년 기념 휴가에 무슨 자격으로 따라가냐며 욕은 있는 대로 먹고 와서 이 고생을 한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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