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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구석 보헤미안 Jul 03. 2024

콘크리트는 삭막하지 않다

시멘트와 콘크리트의 뒷이야기

한국인과 아파트

 

통계청의 2022년 기준 인구주택 총조사 결과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전체 주택에서 아파트가 차지하는 비중은 64%라고 한다. 가구수로 따지면 전체 가구의 52.4%가 아파트에 거주하고 있다. 1970년만 해도 전체 가구의 95%가 단독주택에 거주했던 것을 생각해 보면 겨우 50년 만에 우리나라의 주거양식이 크게 바뀌었다는 걸 알 수 있다.

나 역시 단독주택에 살다가 80년대 후반부터 아파트로 이사와 살기 시작했다. 직접 살아보니 여러모로 좋은 점들이 많았다. 우선 건물과 공동설비의 유지보수를 직접 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다. 단지 내에 CCTV와 경비가 있으니 보안 걱정이 덜하고, 주차난이 상대적으로 덜하다. 택배 받기도 쉽고, 무엇보다 겨울에 덜 추워서 난방 비용도 덜 들어간다. 단독주택에 살 때는 정말 많이 추웠었다. 집이 좀 낡아서 그런 것도 있었지만 열손실을 막아줄 딱 붙은 옆집이 없다는 것도 큰 이유였을 것이다. 가끔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이 겨울을 나는 모습이 꼭 한 곳에 옹기종기 모여 겨울을 견디는 펭귄들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노원구의 아파트 단지. 이렇게 보니 아파트 숲이라 할 만하다


사람들은 서울의 풍경을 보며 삭막한 콘크리트의 숲 같다는 말들을 한다. 콘크리트라는 재료가 그런 느낌을 들게 하는 건지 아니면 비슷하게 생긴 길쭉한 사각형의 건물들이 병풍처럼 늘어서 있어서 그런 건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콘크리트가 있었기에 이렇게 높게 아파트를 세워 올릴 수 있었고 그 덕에 우린 이렇게 편리함을 누리며 살고 있다. 높은 건물을 지을 때는 보통 강철 빔으로 뼈대를 세우는 철골구조를 쓰거나 철근콘크리트(강화콘크리트)를 쓰는데 국내 대부분의 아파트는 콘크리트로 짓는다. 건축용으로 쓸만한 좋은 목재가 그리 충분하지 않은 우리나라에서는 매우 중요한 재료이며, 무엇보다 튼튼하면서도 경제적이다. (건설 현장에서는 업계 ‘전문’ 용어인 ‘공구리’라는 말을 아직도 많이 쓰고 있다. ㅋ)




콘크리트가 뭐길래


콘크리트라고 하면 그냥 시멘트에 물을 섞은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시멘트는 콘크리트의 배합재료 중 하나이고 비율로 따지면 모래와 자갈 같은 ‘골재’가 부피의 70%를 차지한다. 시멘트는 모래와 자갈을 서로 단단히 붙여주는 역할을 한다. 쉽게 생각하면 우리는 모래와 자갈 같은 돌멩이들을 무기질 접착제로 단단하게 붙여서 건물을 만드는 셈이다. 시멘트와 골재에 물을 섞은 콘크리트 반죽은 굳기 전에는 걸쭉한 죽 같은 상태가 된다. 어딘 가에 흘려 넣기 좋기 때문에 보통 나무로 만든 틀(거푸집)에 부어 넣은 다음 그대로 굳혀서 원하는 모양을 만든다. 틀만 제대로 잘 만들면 온갖 형태로 콘크리트 구조물을 만들 수 있어서 여러 가지 다양한 용도로 응용하기도 편하다.

콘크리트를 타설 하는 모습


시멘트에 물을 섞었으니 물이 증발하면서 굳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런 것은 아니고 시멘트가 물과 화학반응(수화반응이라고 한다)을 하기 때문에 단단해지는 것이다. 이 수화반응의 과정에서 열이 발생하는데 그 때문에 주변 온도가 매우 중요하다. 주변 기온이 너무 높거나 너무 낮으면 시멘트의 수화반응이 제대로 일어나지 않아 콘크리트의 강도가 떨어진다. 또 골재와 시멘트 그리고 물의 이상적인 배합비도 정해져 있다. 반응성이 떨어지는 영하의 기온에 시공하거나 물의 배합비가 변할 수밖에 없는 폭우가 쏟아지는 날 콘크리트를 타설 하는 현장을 본다면 그곳은 부실시공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면 된다. 길어지는 공사기간이 곧 돈이기 때문에, 이런 무리수들을 두는 경우가 종종 있다.

콘크리트의 배합비를 지켜가며 현장에서 혼합하려면 너무 번거롭고 힘들기 때문에 현장에서는 미리 이상적으로 배합된 콘크리트 반죽을 주문해서 쓰는데 그게 바로 레미콘이다. (영어인 Ready-Mixed Concrete의 줄임말인데 영어로는 그냥 RMC라고 부르지만 우리가 쓰는 레미콘은 리모콘처럼 일본식 줄임말이다.) 그런데 시멘트는 물과 섞기 시작하면 수화반응이 서서히 시작되기 때문에 레미콘 공장과 공사 현장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면 곤란하다. 레미콘이 생산된 지 1시간 30분에서 최대 2시간 이내에 타설 하도록 규정되어 있기 때문에 레미콘 기사들은 최대한 빨리 현장에 도착하도록 서두를 수밖에 없다. (도로 위에서 레미콘을 만나면 최대한 피해 가야 하는 이유가 이거다.) 운이 나빠 도심에서 교통체증이라도 만나면 그야말로 식은땀을 흘려야 한다. 레미콘 트럭의 통이 빙글빙글 도는 이유는 내용물이 균질하게 골고루 잘 섞이도록 하기 위한 것도 있지만 이동하는 동안 시멘트가 굳는 것을 최대한 늦추기 위한 목적도 있다. 이런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만에 하나 제시간에 못 맞추면 사실 버리는 게 정석이기는 한데, 이것도 돈이다 보니 (2024년 기준으로 레미콘 한 대 분량이 40~50만 원 사이) 암암리에 싼값에 떨이로 팔거나, 빨리 굳지 말라고 물을 더 타기도 하는 모양이다. 최악의 경우 싼값에 떨이조차 못하면 일단 통에서 얼른 빼낸 다음 폐기물로 분쇄해서 순환골재로 재활용하는 수밖에 없다. 만약 통 안에 든 채로 그대로 굳어버리면, 그때는 트럭까지 버리는 사태가 생길 수도 있다.




시멘트는 오래전부터 써 왔다.


시멘트의 재료는 석회인데, 주로 석회암(Limestone)에서 얻는다. 석회암은 탄산칼슘이 주성분으로 이루어진 퇴적암으로 과학자들은 조개, 산호, 소라 등의 탄산칼슘 외골격을 가진 생물들의 유해가 오랜 시간 퇴적되어 생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 양이 엄청 풍부하고 흔해서 굳이 탄산칼슘을 인공적으로 합성할 필요조차 없다. 달팽이도 조개도 사람도 집 짓는 데 함께 쓰는 걸 보면 탄산칼슘은 수 억년의 시간 동안 전 지구에서 사용된 건축재료인 모양이다.

석회암 지층이 퇴적된 모습


시멘트는 인류의 역사에서 보더라도 꽤 오래전부터 사용한 재료다. 이집트 피라미드의 석재를 시멘트로 접착한 흔적이 있고, 콘크리트의 경우는 기원전 14세기의 그리스 유적에서 사용한 것이 발견되었다. 고대 로마인들은 석회에 화산재를 첨가해서 만든 포졸라나 시멘트를 사용했는데, 얼마나 좋은 재료였던지 지금까지도 멀쩡한 유적이 많다.

고대부터 우리나라를 포함한 동양에서도 건축용으로 석회를 사용했다. 다만, 귀한 재료다 보니 건물을 통으로 짓는데 쓰이진 못하고 온돌 바닥 기초 공사할 때 첨가하거나 미장용 마감재나 등으로 제한적으로 썼다. (전통적으로 석회를 써 왔기 때문에 서양식 시멘트를 양회라고도 부른다.)

석회를 쓰다 보니 의도치 않게 콘크리트가 되어버린 경우도 있다. 회곽묘라 불리는 무덤이 바로 그것이다. 회곽묘는 관을 안치하는 과정에서 석회, 모래, 황토를 석은 삼물을 부어 관 주위를 완전히 둘러싸도록 조성하는 무덤이다. 원래는 유해가 땅속에서 잘 썩어야 하니 유해가 분해되는 시간 동안 나무뿌리나 벌레, 짐승이 침범하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로 이런 방식을 썼다. 그런데 석회를 부었으니 주변의 수분을 흡수해서 수화반응이 일어나 콘크리트처럼 단단해진 것까지는 좋았는데, 관 내부의 수분마저 흡수해서 내부가 엄청 건조해진 데다, 수화반응으로 인한 열로 살균소독까지 되어서 내부의 미생물들이 사라져 버리는 바람에 오히려 유해가 분해되지 않고 미이라가 되어버렸다. 곱게 썩으라고 고생해서 귀한 재료를 썼건만 의도와는 전해 반대로 되고 만 것이다. 지금도 가끔 발굴되는 조선시대 미이라는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대신 이렇게 콘크리트가 되어버리는 바람에 도굴을 막기도 했다. 조선 말기의 유명한 오페르트 도굴사건 때는 가지고 간 연장으로 아무리 콘크리트를 두드려도 깰 수가 없어서 처음에는 강철을 두른 줄 알았다는 말까지 있다.




현대적인 시멘트를 만든 사람


역사적으로 여러 종류의 시멘트가 개발되고 사용되었지만 지금 우리가 쓰는 시멘트는 19세기 영국의 벽돌공인 조셉 아스프딘(Joseph Aspdin)이 개발한 시멘트에서 출발했다. 1778년 영국의 리즈에서 태어난 조셉 아스프딘은 역시 벽돌공이었던 아버지와 함께 일하다 1817년 독립해서 창업을 했는데 다년간의 연구를 거쳐 1824년 자신만의 시멘트 제조법에 대한 특허를 획득한다. 그는 이 특허에서 처음으로 포틀랜드 시멘트(Portland cement)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당시 최고의 건축자재였던 포틀랜드 석재와 색깔이 비슷해서 지은 이름이다. 그의 특허명이 ‘인공 석재 생산방식의 개선’인 것으로 보아 개발할 때부터 포틀랜드 석재를 대체할 수 있는 인공 석재를 만드는 게 첫 번째 개발 목표였던 모양이다.

포틀랜드 시멘트의 원형을 개발한 사람은 조셉 아스프딘이지만 그걸 더 개량하고 대중화시킨 사람은 그의 둘째 아들인 윌리엄 아스프딘(William Aspdin)이다. 1815년에 태어난 윌리엄 아스프딘은 14세가 되던 1829년부터 아버지 아래에서 함께 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1841년에는 돌연 아버지의 회사를 떠나게 된다. 윌리엄이 회사를 떠나자 아버지 조셉과 큰 아들 제임스가 합작해서 새 회사를 세우는데 이때 아버지인 조셉 아스프딘은 아래와 같은 흥미로운 공지를 띄운다.

“최근까지 우리 직원이었던 윌리엄 아스프딘은 더 이상 우리 회사 직원이 아니며, 그는 더 이상 회사를 대신해서 돈을 받거나 본인 또는 새 회사를 위해 대출을 실행할 권한이 없습니다.”

윌리엄이 아버지와 갈라선 이유가 뭔 지 대충 짐작이 된다. 윌리엄에 대한 세간의 평가가 ‘구제불능의 거짓말쟁이이자 사기꾼’인 데다, 같은 해 겨울 결혼식 때는 가족 중 아무도 참석하지 않았다고 하니 아마도 회사를 다니며 회사돈에 손을 대는 등 큰 사고를 친 모양이다.

윌리엄 아스프딘, 왠지 나쵸 리브레의 그분이 떠오른다…


은근 닮았다니깐.


하지만 그래도 머리는 비상했는지 (원래 사기꾼들이 머리는 좋다. 주로 안 좋은 쪽으로 써서 문제지…) 아버지의 포틀랜드 시멘트에서 배합비를 조절하고 다른 첨가물을 좀 추가하면 훨씬 더 많은 분야에서 다양한 용도로 사용할 수 있는 성능 좋은 시멘트를 만들 수 있다는 걸 알아낸다. 이에 1843년 자신만의 공장을 세워서 시멘트를 생산하기 시작하자 금세 사용자들 사이에 화제가 되었다. 이게 바로 오늘날 우리가 쓰고 있는 현대식 포틀랜드 시멘트이다.

끝내주는 물건을 만들었으니 이제 돈 벌 일만 남은 것 같았지만 아쉽게도 그러질 못했다. 그는 제조법이 공개되는 게 싫었던 것인지 따로 특허를 신청하지 않았고 제조법 자체를 비밀로 유지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겨우 2년 만에 다른 경쟁자가 비슷한 제품을 만드는 데 성공하고 말았고, 경쟁자에 비해서는 사업수완이 썩 좋지 않았던 모양이다. 게다가 사업을 하면서 횡령과 사문서 위조까지 했으니, 이쯤 되면 범죄에 가까웠다. 두 번이나 파산을 해서 다른 지역으로 야반도주해야 했으며 그때마다 빚쟁이들에게 쫓겨 다녀야 했다.


 
 

 

콘크리트에 철근이 필요한 이유는


콘크리트는 그 자체로 매우 훌륭한 건축자재이지만 한 가지 큰 단점이 있었다. 양쪽에서 누르는 압축에는 매우 잘 견디지만 반대로 잡아당기는 인장력과 휘는 힘에는 잘 견디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인장력에 잘 견디는 철근으로 보강을 하는 것이다. 콘크리트에 철근을 함께 쓸 수 있었던 것은 기막힌 우연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바로 강철과 콘크리트의 열팽창 계수가 똑같았다는 것이다. 그 둘은 열을 가하면 같은 비율로 팽창하고 차가워지면 똑같은 비율로 수축한다. 주변 온도가 변해도 서로 떨어지지 않고 한 몸처럼 단단히 딱 붙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반대 방향의 힘을 상호 보완하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만약 열팽창 계수가 달랐다면 딱 한 계절만 지나도 철근과 콘크리트가 따로 떨어져서 제 역할을 전혀 못했을 것이다. 반대로 콘크리트는 쉽게 녹이 슨다는 철근의 단점을 보완해 준다. 콘크리트가 철근을 감싸면 철근이 공기와 접촉되는 것을 막고, 콘크리트의 알칼리 성질이 녹스는 것을 최대한 늦춘다. 전혀 다른 재료임에도 서로의 단점을 보완하는 궁합이 매우 좋은 재료인지라 건축공학에서는 철근콘크리트를 ‘신이 내린 선물’이라고 부를 정도다.

조제프 모니에. 건축계에 두 조셉이 큰 일을 했다. ㅋ


철근콘크리트 공법을 발명하고 대중화시킨 사람은 프랑스의 정원사인 조제프 모니에(Joseph Monier)였다.  1823년에 정원사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학교를 다니는 대신 어릴 때부터 정원사 일을 하며 가업을 도왔다. 일을 하며 그를 힘들게 했던 건 화분이 너무 쉽게 망가져서 관리하기가 어려웠다는 점이었다. 점토로 만들면 작은 충격에도 쉽게 깨져버렸고, 나무로 만들면 비바람에 닳거나 나무뿌리가 파고들어 망가졌다. 그래서 당시 각광받기 시작하던 콘크리트로 화분을 만들어 보니 일단은 단단해서 좋기는 한데 앞에서 이야기한 콘크리트의 단점 때문에 여전히 깨지기가 쉬웠다. 이때 주목한 것이 콘크리트 내부에 철망을 심어 강화하는 아이디어였다. 조제프 모니에는 철망을 심는 아이디어를 처음으로 떠올린 사람은 아니다. 그 이전에도 콘크리트를 철망으로 보강하는 실험을 했던 사람들은 있었다. 하지만 본인이 직접 이 아이디어로 직접 화분을 만들어 보고 철근콘크리트의 가능성을 확인하자 이 기술을 더욱 발전시키고 다양한 응용분야를 개척했다. 그는 1867년 최초로 철근콘크리트로 만든 원예용 대형화분에 대한 특허를 획득하고 이를 같은 해 파리 만국박람회에 전시한 것을 시작으로 철근콘크리트 세면대, 건축물의 파사드(façade)를 위한 콘크리트 패널, 철근 콘크리트로 만드는 다리에 대한 특허를 받는 등, 다방면으로 활용법을 찾아냄과 동시에 이를 적극적으로 홍보했다. 이를 눈여겨보았던 건축가들이 서서히 철근콘크리트를 건축에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져 오늘날처럼 광범위하게 쓰이게 되었다.




콘크리트의 환경문제


콘크리트는 이제 건축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재료이지만 환경문제가 대두된 현대에는 또 다른 걱정거리를 만들어낸다. 시멘트의 생산 과정에서 이산화탄소가 배출되는데 그 양이 무지막지하게 많다. 시멘트 1톤을 생산하는데 이산화탄소가 무려 1톤이 배출되는데, 이는 전체 이산화탄소 배출량의 5~9%를 차지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양이다. 시멘트 업계에서는 이산화탄소 배출을 줄이기 위해 탄소포집 기술이나 저탄소 대체 연료를 개발하는 등의 노력을 하고 있지만, 제조과정에서 석회석이 화학반응을 하면서 내놓는 이산화탄소가 전체 발생량의 60%에 이르기 때문에 석회석을 대신할 다른 원료를 찾지 않는 이상 쉽지만은 않은 일이다.

시멘트는 만드는 과정에서 이산화탄소를 발생시키지만 흥미롭게도 공기 중의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기도 한다. 콘크리트가 이산화탄소를 흡수하면 알칼리성이 중화되어 버리는데 이를 탄산화 또는 중성화라고 부른다. 이산화탄소를 흡수하니 환경에는 좋을 것 같지만 실제로 흡수하는 양은 80년 가까이 방치해도 제조할 때 발생하는 양의 5% 남짓밖에 되지 않아 큰 도움이 될 정도는 아니다. 무엇보다 이렇게 탄산화가 진행되면 철근콘크리트의 수명이 줄어든다. 내부의 철근이 녹슬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철근에 녹이 슬면 철근의 부피가 커지면서 콘크리트에 균열을 만들고 그 사이로 물이 침투해서 부식이 더 빠르게 진행되니 시간이 지날수록 콘크리트의 강도가 떨어진다. 아파트의 외벽에 굳이 비싼 돈 들여가며 페인트를 칠하는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이다. 미관상 보기 좋으라고 하는 것보다는 공기와의 접촉을 최대한 차단하기 위한 목적이 더 크다.

결국 이렇게 된다는 이야기…


건축가들은 다들 알고 있는 이 사실을 깜빡하는 바람에 쫄딱 망해버린 과학실험 프로젝트가 있다. 1991년 미국의 애리조나 사막에서는 바이오스피어 2라고 이름 붙인, 그야말로 미국 스러운 거대한 규모의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밀폐된 공간에서 실제로 장기거주 가능한 자급자족 인공 생태계를 만들어서 최대 100년간 연구자들이 교대로 거주한다는 야심 찬 계획이었다. (이름에 2가 들어가는 건 바이오스피어 1이 지구고 자기들은 두 번째의 닫힌 생태계라서 2라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

콘크리트와 철골, 유리로 만들어진 거대한 구조물 안에 지구의 환경을 축소한 미니 생태계를 만들었다. 열대우림과 맹그로브 습지, 산초호가 자라는 바다와 사바나 초원, 안개사막 등의 자연환경을 크기만 줄여서 그대로 재현하고 여러 종류의 동식물을 풀어놓아서 시설 내부에서 물질 순환이 가능하도록 설계했다. 거기에 연구진들이 들어가서 직접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려고 했는데, 결국 실험은 실패했다. 실험이 시작되자 당초예상과 다르게 초반부터 서서히 산소농도가 떨어지는 치명적인 문제가 발생했다. 원인을 찾고 보니 식물들이 광합성을 통해 이산화탄소를 산소로 만들어 줘야 하는데 공기 중의 이산화탄소가 점점 없어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산소와 이산화탄소의 순환고리가 무너진 것이다. 공기에 문제가 생겼으니 생태계는 붕괴되기 시작했고 연구진들을 포함한 모든 동식물들이 생존하기 힘들어졌다. 이산화탄소가 없어졌던 원인은 바로 콘크리트 때문이었다. 구조물 내부에 만들어둔 거대한 콘크리트 산이 이산화탄소를 계속해서 흡수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콘크리트에 페인트를 칠해서 이산화탄소 문제는 어느 정도 안정이 되었지만, 이미 내부환경이 극도로 나빠져서 외부 공기를 인위적으로 넣어줄 수밖에 없었고 이 시점에 이미 폐쇄환경이라는 목표는 실패한 상황이었다. 결국 여러 가지 다른 문제들이 겹치면서 100년으로 계획했던 프로젝트는 3년을 채 채우지 못하고 종료됐고, 그때 만든 구조물은 지금은 관광지가 되었다.

바이오스피어 2 전경
바이오스피어 2 내부의 바다. 옆에 보이는 저 절벽은 아마도 콘크리트…?




아파트의 층간소음


콘크리트덕에 아파트에서 나름대로 편리하게 살고 있기는 하지만, 아파트 생활에서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불편함은 층간소음 문제인 것 같다. 혹자는 콘크리트 기술이 발전해서 벽 두께가 얇아졌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또 어떤 이는 창호의 방음 성능이 좋아져서 다른 소리에 묻혀 있을 소리가 더 민감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라고도 말한다. 기억을 되짚어 보면 대충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층간 소음이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였던 문제는 아니었던 것 같으니 나름 일리는 있는 말 같다. 어쨌거나 소음은 단단한 콘크리트의 벽을 타고 전달되어 울리는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층간소음 문제는 실제로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그 고통을 절대 모른다고들 말하는데 나는 그 말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실제로 나도 한때 층간소음에 고통을 받았고, 그게 결국 이웃 간의 싸움으로 번진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략 15년쯤 전인가, 어느 날부터 벽을 반복적으로 두드리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 크지는 않지만 분명히 들리는 둔탁한 소리, ‘두다다다, 두다다다’하는 소리가 일정시간 동안 들렸다. 한두 번 하고 끝난 게 아니라 거의 매일 들려오니 사람이 미칠 지경이었다. 조용히 좀 하라고 소리도 질러보고 우리 집에서도 벽을 쾅쾅 두드려 봤지만 그 소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들려왔다. 이 정도 소리라면 우리 집만 괴로운 건 아닐 텐데 도대체 어느 집의 정신 나간 분이 이런 미친 짓을 하고 있는 것일까 의문이 들기 시작할 때쯤 결국 사달이 났다. 그날도 여전히 그 두드리는 소리에 짜증이 밀려오는데 갑자기 아파트 주차장에서 악을 쓰며 싸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야 이 X발년아 너 미쳤냐? 미치지 않고서 어떻게 그렇게 하루도 안 쉬고 바닥을 두들기냐?”

“그래 X발놈아 미쳤다. 하지도 않은 일을 했다고 우기는데 안 미치고 배기냐?

창문을 내려다보니 출입구 계단 현관 바로 앞에서 싸우고 있는 이들은 102호와 202호였다. 두드리는 소리가 어쩌고 하는 걸 보니 아무래도 문제의 그 소리가 싸움의 원인인가 싶었다. 그렇다면 범인은 202호였다는 얘기인가? 육두문자가 오가며 10분 넘게 격앙된 싸움이 다행히 몸싸움으로 번지지는 않았다. 경비아저씨가 달려 나와 중재를 하며 달랬기 때문이다. 저 정도의 소란이 있었으니 이제 그 소리가 멈추겠구나 기대했지만 다음 날에도 그 소리는 여전히 이어졌다. 참다못한 어머니가 어느 집인지 밝혀 내고야 말겠다며 나섰다. 층마다 돌아다니며 닫힌 현관문에 조용히 귀를 가져대 대며 소리가 나는 집을 찾았지만 우리 라인은 분명 아니었다. 혹시 옆 라인에서 나는 소리인가 싶어 옆 라인 현관으로 걸어가는 도중에 어머니는 원인을 찾아냈다. 창문 너머로 다듬이 방망이질 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의 그림자를 발견한 것이다. 103호였다. 벨을 누르고 그 집의 사람과 대화해 보니 그 남자의 다듬이질은 드럼 연습을 하던 모습이었다. 소음에 대해 이야기하자 오히려 그가 더 놀랐다고 한다. 소음을 없앤다고 방에 흡음재를 잔뜩 설치하고 바닥에 방진 매트를 깔고 별 짓을 다 했기 때문에 그 정도일 줄은 몰랐다고 했다. 나름의 방음대책을 했으니 그에게 딱히 나쁜 의도가 있었다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다만 그 방음 대책이라는 게 콘크리트 벽을 타고 넘어오는 소음을 막기에는 한참 모자랐던 게 문제였을 뿐. 아쉽게도 그가 집집마다 사과를 하거나 엘리베이터 앞에 사과문을 붙이는 일은 없었다. 뭐 그래도 상관은 없었다. 그저 문제의 그 짜증 나는 소음이 멈춘 것 만으로 다행으로 여겼다.


<본인도 그렇게 문제가 될 줄은 몰랐을 거야 아마…>


며칠 뒤 누군가 우리 집 벨을 눌렀다. 나가보니 102호 여자였다. 얼굴이 퀭하게 수척한 것이 굉장히 피곤해 보였다. 202호 그 X친년 때문에 이사 가기로 결정했다면서 그녀는 내게 물었다. 혹시 무언가 두드리는 소리 듣지 못하셨냐고. 아… 그날의 싸움은 결국 이렇게 끝나는구나. 나는 그 소음의 원인에 대해 그녀에게 찬찬히 설명을 해 줬다. 그 모든 일은 103호에서 드럼 연습을 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고. 그녀는 내 설명을 듣고도 딱히 표정의 변화는 없었다. 하긴, 이미 이사 가기로 결정한 마당에 원인을 알게 된들 이제 와서 무슨 상관이랴. 결국 그 두 집이 화해를 했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 드럼소리 때문에 욕먹고 싸워야 했던 애꿎은 2층 사람만 억울한 노릇이다.

만약 그들이 처음부터 문제의 원인에 대해 열린 마음으로 대화하고 상대의 의견을 경청했더라면 결과가 어땠을까? 그 두 집이 합심해서 원인을 찾으러 다녔다면 그런 험한 꼴을 보기 전에 다른 집의 드럼이 원인임을 알아냈을 수도 있다. 우리가 한 게 아니라고 하는 상대의 항변이 거짓말처럼 들렸던 건 이미 소음에 짜증이 날 대로 나 있었던 것도 한몫했겠지만, 처음부터 그들이 그다지 친근한 이웃이 아니었다는 점도 이유일 것이다.

90년대처럼 웃고 수다 떨며 이웃이 모여 살던 아파트는 이제 더 이상 없다. 그게 싫어서가 아니라 그럴 이유도 필요도 없는 세상이 되어버린 거다. 안면 트고 좀 알고 지낼 만하면 임대기간 만료돼서 이사 가고, 직장이 바뀌면 또 이사를 간다. 나만 해도 옆집사람 얼굴을 잘 모른다. 어쩌다 마주쳐도, 엘리베이터를 함께 타도 서로 인사 없이 그렇게 지나친다. 한 건물에 함께 모여 있지만 우린 도시라는 사막 한가운데에서 각자 뿔뿔이 살아가고 있다.

아파트가 삭막한 건 콘크리트로 지어져서 그런 게 아니라 우리가 삭막하게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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