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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구석 보헤미안 Jun 19. 2024

사진의 대중화를 이끈 사업가

조지 이스트먼 이야기


지금 당신의 휴대폰에는 몇 장의 사진이 들어있을까? 


스톡미디어 전문매체인 photutorial에서 2024년에 발표한 흥미로운 통계에 따르면 사람들은 휴대폰에 평균 약 2100장의 사진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사진을 찍는 사람들의 약 95%는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는다. 하루에 전 세계에서 찍히는 사진의 수는 약 47억 장이며, 산술적으로 나눠보면 전 세계 사람들이 하루 약 0.5장의 사진을 찍고 있으니 최소 이틀에 한 장은 사진을 찍는 셈이다. SNS에 올라오는 그 많은 사진들을 생각해 보면 이제 사진은 현대인들의 일상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물건(?)이 되어 버렸다. 


사진이라면 이제 이 모습이 더 익숙하다.


그런데 사진을 두고 물품(物品) 혹은 물건(物件)이라고 해도 되는 건지 좀 애매하다. 예전에는 분명 종이에 인화된 '물건'이었는데 이제는 휴대폰이나 컴퓨터의 화면으로 보는 게 더 익숙하고, 저장 장치에 기록된 디지털 정보의 상태로 존재하니 '물건'이라 부르기에는 상당히 일시적이고 추상적인 상태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아마도 2000년 이후 출생자들에게는 사진이라고 하면 이쪽이 더 익숙한 형태일 것이다. 

하지만 90년대 이전 출생자라면 그래도 최소 한 번 이상은 본 적이 있었을 ‘필름’이 카메라의 표준 매체이던 시절도 있었다. 내가 디지털카메라를 태어나서 처음 다루어 봤던 것이 대학교 다니던 1998~1999년 무렵이었고, 디지털카메라 동호인 사이트로 시작했던 디씨인사이드가 처음 개설된 것이 1999년 무렵이니 그 이전에는 ‘사진’하면 일단 필름이었다. 

디지털카메라나 휴대폰으로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간단하게 사진 매수의 제한 없이 거의 무한대로 팡팡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지금과는 달리, 그때는 사진 생활에 적지 않은 돈이 들었다. 카메라 구입과는 별개로 돈을 주고 필름을 사야 했고 신중하게 한 장 한 장 아껴서 찍은 다음, 사진관에 맡겨서 다시 돈을 내고 현상과 인화를 해야만 사진을 볼 수 있었다. 돈도 돈이지만 꽤나 불편하고 번거롭기까지 했다. (물론 필름 카메라 애호가들은 이 불편함 또한 필름 카메라가 가지는 매력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필름으로 사진의 대중화를 이끌었던 사업가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불편함의 대명사와도 같은 필름이 이 세상에 처음 등장했을 때는 오히려 그 편리함 덕분에 시장을 빠르게 석권하고, 거의 10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사진의 표준매체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필름을 처음으로 상업화해서 사진의 대중화를 이루어 낸 사람은 바로 이스트먼 코닥사의 창업자 조지 이스트먼이다.

조지 이스트먼의 초상


조지 이스트먼은 1854년 7월 12일 새벽 2시 뉴욕의 워터빌에서 태어났다. 출생 당시 조지 이스트먼의 부모님이 대 농장의 소유주였기에 꽤나 유복한 집안이었지만 1862년에 건강이 악화된 아버지가 사망하는 바람에 어릴 때는 고생이 좀 심했다. 특히 조지 이스트먼이 14세가 되던 1868년부터는 집안 형편이 굉장히 어려워서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보험사에서 알바를 하며 생계를 도와야 할 정도였다.




쉽지 않았던 19세기 사진 생활


조지 이스트먼이 20세가 되어 은행에 취업한 이후부터는 형편이 예전보다 좀 나아졌다. 부가 수입을 위해 부동산 투자를 해보려고 돈을 열심히 모았는데, 실제로 현장실사를 위해 여행까지 떠났던 일이 있다. 이때 현장 기록을 사진으로 남기기 위해서 카메라를 큰맘 먹고 구입했는데, 하필 그놈의 카메라가 너무 무겁고, 챙겨가야 할 것도 너무 많은 데다가, 그 와중에 사용하기도 상당히 번거로워서 결국 사진으로 기록을 남기는 건 실패하고 만다. (짐이 많아 포기한 건지 과정이 어려워서 실패한 건지 확실치는 않다)

이 무렵의 카메라는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상상을 초월할 만큼 사용하기 불편한 물건이었다. 이 당시에는 습판(wet plate)이라는 걸 이용해서 사진을 찍었다(Collodion Process). 습판을 이용한 방식은 기존에 비해 매우 발전된 방식이긴 했지만 여전히 사용하기가 굉장히 까다롭고 번거로웠다. 습판 사진은 유리판에 약품을 잘 펴 바른 후 암실에서 질산은 용액에 담갔다가 꺼낸 다음, 유리판이 젖어 있는 상태 그대로 카메라에 장착해서 장시간(수십 초~수 분) 노출해서 촬영을 하는 방식이다. 문제는 발라놓은 약품이 말라버리면 현상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약품이 마르기 전, 그러니까 약 15분 이내에 약품 처리에서부터 암실에서의 현상까지 전부 다 마쳐야 한다는 점이다. 당연히 미리 여러 장의 사진판을 준비하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사진사가 한 장의 사진을 찍기 바로 직전 유리판에 직접 약품을 바르고 사진 찍고 바로 현상까지 마치는, 그야말로 한 땀 한 땀 이루어지는 작업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보통 야외촬영을 한번 하려면, '이동식 암실'을 챙겨가야 함은 물론, 유리판과 약품들, 현상을 위한 각종 도구들을 카메라와 함께 다 챙겨가야만 했다. 그러다 보니 짐이 정말 '한 짐'이었고, 한번 움직이는 것 자체가 정말 큰일이었다. (자료를 찾다 알게 된 것인데, 국내에 이 습판 사진을 촬영해 주는 스튜디오가 있다. 가격이 비싸서 아직 망설이고 있지만, 기회가 된다면 한 번쯤 이용해볼까 싶은 생각도 있다.)



습판 사진 촬영을 위해 챙겨야 할 장비들



한 장 찍을 때마다 암실에서 이 짓을 해야만 했다.


그 사건 이후로 조지 이스트먼이 사진을 더 편리하게 만드는데 몰두했던 것을 보면 아무래도 자신의 첫 출사가 실패로 돌아간 것에 꽤 ‘빡쳤’ 던 게 아닐까 싶다.

 1871년 Richard L. Maddox 박사가 사진 건판(Dry Plate)을 발명하자 이에 주목하여 건판을 자신만의 공정으로 제작하는 방법과 대량생산할 수 있는 장비를 새로 개발해서 1880년에 특허를 취득하고, 로체스터에 사진 건판 제조 공장을 연다. 사진 건판은 습판에 비하면 획기적인 발명품이었다. 약품이 마른 채로 사진을 촬영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사진을 촬영하기 직전에 약품을 직접 바를 필요가 없었다. 따라서 건판을 미리 만들어두는 것이 가능했고 별도의 제조사가 판매하는 건판을 구입해서 사용할 수도 있었으니 사진사가 할 일이 많이 줄어들게 되었다. 또한 촬영을 마치자마자 현상을 서두를 필요도 없었으니 여로모로 편리한 물건이었다.

이 건판 사업이 나름대로 성과를 거두게 되면서, 이를 관심 있게 지켜보던 Henry A. Strong이라는 사업가의 투자를 이끌어내고, 이듬해인 1881년 1월 1일, 조지 이스트먼과 Henry A. Strong이 'Eastman Dry Plate Company'라는 합작회사를 설립, 그해 연말에는 아예 다니던 은행을 그만두고 사업에 전념하기 시작한다.



필름 - 편리함을 뛰어넘어 더 편리하게


건판은 습판에 비해 편리하긴 했지만 여전히 불편한 부분들이 있었다. 부피가 크고 무거웠고 유리로 만들었기 때문에 깨지기 쉬웠다. 또 한 장 한 장 찍을 때마다 빛이 들어가지 않도록 조심하며 건판을 교체해야 했기 때문에 연속적으로 사진을 찍는 것이 불가능했다. 

1881년 위스콘신의 농부인 피터 휴스턴(Peter Houston)과 동생인 데이빗(David Houston)이 건판의 불편함을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을 발명한다. 종이처럼 유연한 재료에 약품을 코팅하여 이걸 실을 감는 실패(Spool)처럼 생긴 물건에 돌돌 말아서 넘기며 여러 장의 사진을 연속적으로 촬영하는 방식으로, 최초의 롤필름(Roll Film)인 셈이다. 두 사람은 롤필름과 그 작동 메커니즘에 대한 특허를 냈지만 (US patent #248,179 for Photographic Apparatus) 본업이 농부였기에 실제로 이를 생산하고 판매할만한 여건은 되지 못했던 모양이다. 이때 조지 이스트먼이 이 특허의 라이선스를 얻어 필름을 생산하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아예 거금 $5,000(2024년 현재 가치 약 $17만)에 이 특허를 사버렸다.


휴스턴 형제의 필름 특허 도면. 카메라 내부에서 필름을 감는 메커니즘이 설명되어 있다.



이스트먼이 처음 필름을 만들 때는 특허에서 제안했던 것처럼 종이를 사용했다. 잘 휘어지면서도 적당히 얇고 질기면서도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이기에 선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종이는 그 입자가 사진에 이런저런 흠을 만들었기에 종이를 대신할 다른 재료를 찾아야만 했다. 그때 주목한 것이 그 무렵 실용화되고 있던 셀룰로이드였다. 우리가 알던 합성수지 필름에 가장 근접한 모습이 만들어진 것이다. 셀룰로이드는 종이가 갖는 결점이 없었기 때문에 한동안 필름의 재료로 잘 쓰이긴 했지만 사실 매우 위험한 재료였다. 셀룰로이드는 나이트로 셀룰로스(nitrocellulose)와 장뇌를 혼합해서 만드는데 원재료에 nitro-가 붙는 것만 봐도 쉽게 예상할 수 있듯 인화성이 매우 커서 화재사고가 자주 일어났다. 그래서 한참 뒤인 20세기 초반부터 아세테이트로 재료를 바꾼다. (군필자, 특히 행정병이라면 이름만 들으면 아! 할 수 있는 아스테이지가 바로 그것이다.)



초창기의 코닥 필름


1888년, 조지 이스트먼은 아주 기가 막힌 상품을 세상에 내놓는다. 우선 휴대하기 매우 편리한 형태의 카메라를 출시했는데 가격은 단돈(?) $25였으며, 100장을 찍을 수 있는 필름이 미리 내장된 형태였다(현재가치로 따지면 $820 정도 되니 사실 적은 돈은 아닐지도). 이제 사람들은 더 이상 무거운 건판을 따로 휴대할 필요가 없었다. 사진을 찍고 싶으면 카메라만 들고 다녀도 충분했다. 여기에 이스트먼은 새로운 서비스를 한 가지 덧붙인다. 카메라에 내장된 사진을 다 찍은 뒤 $10를 동봉하여 이스트먼의 회사로 보내면 회사에서는 사진을 인화해서 고객에게 보내줬다. '버튼만 누르세요. 나머지는 우리가 다 해드릴게요(You Press the Button, We Do the Rest)'라는 광고 슬로건에 걸맞게 암실에서 이루어지던 어렵고 귀찮은 현상작업을 회사가 대신해 준 것이다. (이 슬로건을 만들기 위해 처음에는 광고 전문가에게 의뢰했는데 그 전문가는 이 서비스가 얼마나 혁신적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바람에 결과물이 영 신통치가 않았다. 여기에 ‘빡친’ 이스트먼이 직접 슬로건을 작성했다는 얘기가 있다.)

이 방식은 기존의 사진 생활을 완전히 바꿔버린 혁신이었다. 고객들은 더 이상 직접 암실에서 독한 화학약품을 만질 필요가 없었다. 그저 버튼을 눌러 사진을 찍기만 하면 된다. 사진을 찍는 사람과 현상하는 사람이 분리된 셈이다. 사진이 전문가의 영역에서 대중의 영역으로 내려온 것이다. 사진을 예술의 한 영역으로 받아들인 전문가들과 달리 그저 일상을 기록으로 담고 싶었던 대중들은 더 이상 어렵고 복잡한 현상작업을 공부할 필요가 없어졌다. 사진을 뽑기 위해 사진관에 필름을 맡기던 20세기 사람들에게 익숙한 방식은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100년 넘게 이어졌던 사진생활 방식을 처음 사업모델로 도입했다는 이 점은 필름의 진가를 알아보고 특허를 인수한 것 이상으로 이스트먼의 혜안이 돋보이는 발상이었다. 그리고 이 방식은 필름이 있었기에 가능했고, 최초의 필름 역시 이 사업방식이 있었기 때문에 빛을 발할 수 있었다..


버튼만 누르세요. 나머지는 우리가 다 해드릴게요.





영화에도 필름이


이스트먼이 대중화에 기여한 것은 사진만이 아니었다. 영화산업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영화에도 필름이 쓰였기 때문이었다. 1889년에는 처음으로 상업용 영화 필름을 제작해서 공급하는데 당시 영화제작용 카메라를 개발하고 있던 토머스 에디슨은 이 필름을 기반으로 카메라를 만들어냈다. 이는 영화 역사에 있어서 매우 기념비적인 일로, 영화산업이 비약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그래서 훗날 조지 이스트먼은 헐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헌액 된다. 넓어진 사업 영역에 맞춰서 이 해에 사명을 Eastman Company로 바꾸었고, 다시 3년 뒤인 1892년에는 뉴욕에 Eastman Kodak New york를 설립하는데, 이때부터 회사는 이스트먼 코닥사로 불리게 된다. 여담이지만 사실 Kodak이라는 단어에는 아무런 뜻도 없다고 한다. Eastman이라는 이름이 발음하기 어렵다는 말이 종종 들려서 조지 이스트먼 본인이 Kodak이라는 이름을 지었는데, 이전부터 K라는 글자가 어쩐지 좀 강하고 예리한 느낌이 들어서 굉장히 좋아했다고 한다. 그래서 K로 시작하고 K로 끝나는 단어를 만들기 위해 글자들을 이리저리 조합하다 보니 Kodak이 되었다고 한다.


영화용 필름을 손에 든 조지 이스트먼, 영화 촬영용 카메라를 작동시키는 토머스 에디슨. 두 전설의 만남



사진을 더욱 대중적으로 - The Kodak Girl


1893년에는, 최초의 Kodak Girl 캠페인을 시작해서 휴대용 카메라를 손에 든 여성을 과감하게 광고의 전면에 내세운다. 여성들도 쉽게 휴대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여 휴대성을 적극적으로 어필함과 동시에, 사진을 전문 사진사의 영역에서 여성과 어린이를 포함한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영역으로 가져왔다는 점에서 잠재적인 시장을 적극적으로 개척한 것이다.

특히 가볍고 휴대하기 편하고 누구나 다루기 쉬운 카메라를 궁극적인 목표로 한다는 점은 이 무렵에 출시된 카메라들을 보면 금세 알 수 있다. 1897년의 포켓 코닥, 1898년의 폴딩 코닥을 비롯, 1900년에 출시된 명작 브라우니 카메라는 단돈 $1에 심지어 어린이용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출시되었다.

가장 유명한 Kodak Girl 그림


브라우니 카메라에도 Kodak Girl이...


50~60년대의 Kodak Girl 사진들. 요즘 이런 캠페인을 한다면 논란이 될지도 모른다.




사회 공헌 그리고 말년


사업이 궤도에 오르고 시장을 지배하자 이스트먼은 자선사업을 하며 여생을 보냈다. 그리고 1928년, 컬러 필름이 최초로 출시된 것을 살아생전 볼 수 있었으니, 100년간 이어지는 필름 시대의 창시자로서 사진 필름의 처음을 이끌었고 또한 그 완성을 지켜본 셈이다.


코닥의 컬러 필름


다만 말년에는 노환이 찾아와서 힘겨웠던 모양이다. 마지막의 약 2년간은 척추에 이상이 생겨서 상당한 고통에 시달렸으며, 점점 거동이 불편해지기까지 했다고 한다. 

마침내 1932년 3월 14일, 심장에 총을 쏘아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데, 다음과 같은 유서를 남겼다.


To my friends: My work is done. Why wait?
친구들에게 - 이제 내가 할 일은 다 했다네. 
더 기다릴게 뭐 있나. 
G.E

유서를 보면 많은 생각이 든다. 당시 그의 건강 상태를 생각해 본다면, 희망 없고 불필요한 여분의 삶을 스스로 잘라낸 것인데, 스스로에게 주어지는 안락사라고 볼 수도 있겠다. 다만 내가 할 일은 다 마쳤다고 말하는 저 한 문장만큼은 스스로의 천명, 혹은 소명을 알고 그것을 충실히 마친 사람만 할 수 있는 말이니, 어떤 면에서는 '깨달음'을 얻었다는 느낌마저 든다.



디지털카메라 시대와 몰락


사진 시장의 대제국으로 군림하던 코닥이 디지털카메라 시대를 맞아 몰락했다는 사실, 그것도 세계 최초의 디지털카메라를 자신들의 손으로 직접 개발해 놓고도 그렇게 되었다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코닥의 몰락 이유에 대한 많은 분석들이 있지만 필름시장의 위축을 우려해서 디지털카메라를 상용화하지 않았고 이것이 패착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최초의 디지털카메라를 개발했던 것이 1975년이고 그 무렵의 시장점유율이 미국기준 필름 90% 카메라 85%였으니 필름 시장을 고수하는 건 달콤한 유혹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언젠가 디지털 시대가 오더라도 2~30년은 더 걸릴 테니 아주 먼 미래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편리함을 무기로 시장을 지배했던 기업이 또 다른 편리한 물건으로 시장에서 몰락하는 것을 보면 시대의 아이러니다.

그런데, 그렇게 잊힌 브랜드인 줄 알았던 코닥을 얼마 전에 백화점에서 발견했다. 그것도 의류코너에서. 코닥 상표를 달고 있는 의류들을 보며 이들이 과거의 이미지를 벗고 의류제조로 새로 사업 진출을 한 것인 줄 알고 놀라움반 걱정반의 복잡한 심정이 들었다. 하지만 그 옷들은 국내의 의류업체가 코닥의 브랜드를 라이선싱 해서 출시한 제품들이란 것을 뒤늦게 알고서는 살짝 김이 새고 말았다. 좀 더 찾아보니 이런 식으로 코닥의 브랜드를 라이선싱 해서 판매하는 제품들이 의류 말고도 조금 더 있었다. 코닥이 이제는 브랜드 사용권을 타사에 팔아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어 좀 씁쓸했다.


Steven Sasso가 개발한 세계 최초의 디지털카메라. 무게가 무려 3.6k이었다. (사진출처 : Brett Jordan / flickr)





필름 카메라의 추억


어릴 적 우리 집에도 필름카메라가 한 대 있었다. 독일의 Rollei 35 시리즈 중의 하나였는데, 한때 세계에서 가장 작은 35mm 카메라라고 하는 타이틀이 있었던 작고 귀여운 카메라였다. 그 카메라를 몇 번 써봤지만 기억을 더듬어 봐도 노출계가 없었던 것을 봤을 때 C35 모델이었던 것 같다. 작고 귀엽고 사진이 잘 나오기는 했지만, 사진을 잘 찍는 데는 상당한 노력과 노하우가 필요한 재미난 카메라였다. 가장 큰 특징은 카메라에 배터리가 들어가지 않는다는 점이다. 셔터를 눌러 사진 한 장을 찍은 다음 본체의 레버를 젖혀주면 필름이 딱 그만큼 감기면서 다음장을 찍을 준비가 되었고, 필름 한통을 다 찍고 나면 본체 아래에 접혀있는 와인더의 작은 손잡이를 펴서 손으로 빙글빙글 돌려서 되감아줘야 했다. 조금 불편했지만 이건 사진 찍을 때에 비하면 그래도 사소한 불편이었다. 렌즈는 줌기능이 없는 40mm 단렌즈가 달려있었고 피사체와의 초점을 직접 렌즈의 다이얼을 돌려 맞춰줘야 했으며 조리개와 셔터스피드를 직접 일일이 맞춰줘야 했다. 무엇보다 노출계가 없었기 때문에 실내, 맑은 날의 야외, 흐린 날 등등 환경에 맞는 적당한 세팅 값을 항상 외우고 다녀야 했다. 그나마도 외워뒀던 세팅값이 셔터를 누를 때의 환경에 맞게 제대로 적용이 되었는지는 필름을 현상하고 사진을 인화하기 전까지는 알 수도 없었다. 그야말로 살 떨리는 맛(?)이었다. 세팅값을 잘 못 맞췄다면 비싼 필름값을 날리는 것은 물론이요. 지나간 그 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으니 말이다.


추억의 롤라이 35 카메라. C35 모델의 사진이 없어서 그나마 가장 비슷한 B35 모델이다.


시간이 흘러 사춘기가 되었을 때, 나는 이 카메라가 왠지 좀 창피했다. 당시에 한창 출시되던 자동카메라에 비하면 너무 구닥다리 고물의 느낌이었던 것이다. 자동카메라는 미래지향적으로 매끈한 외형에 플래시가 내장되어 있었고 렌즈가 모터로 죽 나왔다 들어가는 멋진 줌 기능이 들어있었다. 누가 언제 어디서 찍어도 잘 나오는 노출값을 자동으로 맞춰줬으며 셔터를 누르면 필름이 자동으로 감기는, 마치 조지 이스트먼이 그토록 꿈꾸던 ‘당신은 버튼만 누르세요’의 최종 진화형 같았다. 최첨단 전자동 카메라들에 비하면 모든 것을 수동으로 하는 우리 집의 그 카메라는 너무 초라했다. 

그런 사춘기 청소년의 창피함에 결정타를 날린 건 같은 반 친구 녀석이었다. 그 나이에 벌써 여자들과 바다에 놀라간다며 (이 대목이 가장 짜증 나는 부분이다) 카메라를 빌려달라던 녀석에게 카메라 사용법을 가르쳐 주는데 셔터를 누르고 필름 감는 레버를 젖히던 내게 녀석이 피식 웃으며 한마디 했다. 

“풉. 그런 것까지 손으로 해야 하냐?”

그나마도 없어서 빌려가는 녀석이 말본새 하고는… 그날 이후로는 더 이상 그 카메라를 손에 쥐어 본 적은 없었다. 

그렇게 본가의 잡동사니 더미 속에 파묻힌 채 기억 속에서 잊혔던 그 구식 카메라가 다시 생각난 건 10여 년쯤 전 처음으로 DSLR을 손에 쥐고 한창 사진에 입문하던 무렵이었다. 사진을 제대로 배우려면 수동으로 찍어야 한다던 인터넷상의 많은 사진 선배들의 항변을 접하고 보니 문득 그 시절의 그 수동 필름카메라가 생각이 났던 것이다. 만약 어릴 때부터 그 카메라를 계속 꾸준히 쓰면서 사진을 배웠더라면 지금쯤은 ‘고수’가 되어있으려나 하는 상상을 한번 해봤다. 만화 이니셜D에 등장했던 도요타 86이 ‘드라이버를 키우는 자동차’라면 모든 것을 손으로 해야만 했던 이 롤라이 35는 ‘사진작가를 키우는 카메라’였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하지만 그런 상상은 회귀물 웹소설을 읽는 것만큼이나 허망했다. 그 카메라를 꾸준히 써 왔더라도 결국 비용을 감당할 수 없어서 지금처럼 많이 찍고 시행착오를 겪을 여력은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서민 가정의 학생에게 꾸준히 나가는 필름값과 현상료는 지나치게 큰 금액이었다. 비용문제는 성인이 되었다 하더라도 여전했다. 꾸준히 들어가는 고정비는 사진을 배우기 위해 어느 정도의 시행착오가 필요한 입장에서 부담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거기에 한번 더 깊이 생각을 해 보니 필름 카메라는 역시 사진을 배우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면들이 있었는데, LCD를 통해 바로바로 결과를 확인할 수 있는 디지털카메라와는 달리 지금의 이 세팅값이 맞는지 틀리는지 알 방법이 없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였다. 운 좋게 세팅값이 맞아 좋은 사진이 나왔다고 하더라도 한 장 찍을 때마다 노트에 따로 기록이라도 하지 않는 이상 나중에 사진을 보고서는 세팅값을 기억해 낼 수도 없었다. 결국 ‘현타’가 와서 롤라이 카메라를 쓰는 걸 그때는 깨끗이 포기했다.

그렇게 마음 한구석에 잘 눌러 뒀던 롤라이 카메라를 향한 마음은 얼마 전부터 레트로 열풍이 불면서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왔다. 옛날 물건을 쓰고 즐기는 사람들을 보며 옛 물건에 담겨있던 그 추억과 감성이 다시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고 보니 사춘기 때의 그 창피했던 마음마저 이제 아련한 추억이 되어버렸다. 한 장의 사진을 위해 다이얼과 레버를 일일이 직접 조작해야 했던 불편함은 톱니바퀴와 스프링으로 작동되던 아날로그 기계가 가진 날 것 그대로의 투박한 매력이었다. 회로가 집약된 전자제품의 편리함이 대신할 수 없는 전혀 다른 맛이다. 살짝 흐릿한 화질과 그 독특한 색감은 그 시대의 화풍(畵風)이요, 사진을 보기 위해 며칠 기다려야 하던 지루함은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을 가져오는 크리스마스이브를 기다리던 설렘이었다.  

오랜만에 꺼내 본 앨범 속에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던 내 어린 시절의 모습을 보니 그 구닥다리 카메라가 오랫동안 꾸준히 담아준 건 걱정 없이 마냥 행복했던 어린아이의 그 감정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 아련한 카메라를 다시 찾아보려고 본가의 잡동사니 더미를 뒤졌지만 결국 찾지는 못했다. 이사하며 버린 짐과 함께 내다 버린 모양이었다. 아쉬운 마음을 달랠 길이 없어 인터넷에 올라온 중고매물을 훑으며 괜히 서성인다.




https://youtu.be/cdbx7zDfvwg?si=dMXAwVM5hjzeQoVD

습판사진 과정이 궁금하다면 한 번쯤 볼만한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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