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소비료와 프리츠 하버
나는 어렸을 때 밥을 잘 안 먹는 아이였다. 편식이 심했고 양도 적었으며 그나마 먹는데도 오래 걸려서 늘 가족들이 식사를 다 마치고 상을 걷을 때쯤 허겁지겁 남은 밥을 먹었다. 그렇게 늦게까지 꾸물럭 대고 있으면 그냥 밥그릇을 걷어버리면 될 텐데 어른들은 밥을 남기는 것만은 절대 허락하지 않으셨다. 혹여 내가 밥을 남기려고 하면 늘 이런 말을 덧붙이셨다.
“음식 남기면 벌 받는다. 쌀 한 톨을 키우기 위해서 농부들이 얼마나 피땀을 흘리는지 아냐?”
이 말은 그래도 순한 맛이다. 좀 더 매운맛 버전은,
“밥 남기면 나중에 지옥 가서 그 남긴 밥 다 먹어야 한다. 그냥 먹는 것도 아니고 남긴 거 한 번에 다 비벼서 준다.”
학교에서도 늘 농부들의 헌신과 노고에 감사한 마음을 가지라고 가르쳤기에 그런가 보다 하고 살아왔지만 농부의 마음이라는 게 꼭 그렇게 단순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은 대학교 때 알게 되었다. 그것도 농부의 입을 통해서 직접 말이다.
대학교 1학년때 학생회 활동을 하던 친구의 꼬임에 홀랑 넘어가서 농활에 참가했다. 그때 간 곳은 경북의 어느 마을이었는데 한여름이라 한창 고추를 수확하고 있었다. 그해 고추농사는 참 잘 됐다. 넓은 고추밭의 뙤약볕 아래에서 따도 따도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고추를 수확해서 포대에 담았다. 한 포대에 70kg이 넘는 포대들이 밭두렁에 차곡차곡 쌓이는 것을 보니 비록 내 것은 아니지만 마음만은 풍요로워지는 것 같았다.
새참을 먹으며 밭주인인 농부아저씨에게 덕담을 건넸다.
“고추농사 엄청 잘 됐네요. 올해 풍년이라 기쁘시겠어요!”
“아이라! 올해는 풍년이 들어가 고마 걱정이다.”
상식이 파괴되는 것 같은 답변에 귀를 의심했다.
“올해는 고추농사가 너무 풍년이라 고추값 마이 떨어지지 싶다. 고마 확 전라도 쪽에 태풍이 와야 고추값 오를낀데. 낄낄”
저런!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은 이곳마저 그 마수를 뻗친 모양이다. 풍성한 수확물을 들어 올리며 밝은 미소를 짓고 있는 밀짚모자 쓴 농부 아저씨의 사진을 보며 더 이상 푸근한 기분을 느낄 수 없게 되고 말았다. 수확물을 앞에 둔 함박웃음 뒤편으로 떨어지는 가격 걱정에 속으로 눈물을 흘리고 있을지 어찌 알까? 우린 흉년이 아니라 과잉 생산을 걱정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농업 생산량이 크게 증가해서 이제 산술적으로 단순히 나누면 전 세계 인구를 배불리 먹이고도 남을 정도의 식량을 생산하고 있으니 식량이 부족해서 인구를 늘일 수 없다던 맬서스에게 크게 한방 먹인 셈이다.
그리고 그걸 가능하게 만든 게 바로 무기질 비료다. 그중에서도 질소비료가 돌파구였다.
질소는 생명체에게 반드시 필요한 원소다. 생명체의 기본 물질 중 하나인 단백질을 구성하는 재료이기 때문이다. 비교적 먹이사슬의 위쪽에 있는 초식/육식 동물의 경우 음식을 통해서 이 단백질을 흡수한다. 하지만 식물들은 입장이 좀 다르다. 어떻게든 질소를 가져다 직접 단백질을 합성해야 하는데 그게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아니, 질소는 공기 중의 78.08%를 차지할 만큼 흔하디 흔한 원소니까 그냥 가져다 쓰면 될 텐데 그게 쉽지 않다니 무슨 말인가’ 싶겠지만, 대부분의 식물들은 공기 중의 질소를 직접 이용해서 질소화합물을 만들어 내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렇다. 질소는 원자 두 개가 분자 상태로 매우 단단하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웬만해서는 다른 원자들과 반응하지 않는다. 반응을 하고 결합을 해야 단백질을 만들 텐데 그러질 않으니 공기 중에 아무리 많이 떠다녀도 가져다 쓸 방법이 없다. 식물들에게는 그저 그림의 떡인 셈이다.
과자회사에서 질소과자 소리를 들으면서도 과자봉지에 굳이 질소를 충전하는 것도 이런 이유다. 반응성이 적어 과자의 변질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항공기나 자동차의 타이어에 질소를 주입하는 것도 반응성이 적기 때문에 내부 발화를 억제하고 타이어이 산화를 막기 위해서 하는 일이다.
질소의 이 단단한 결합을 끊고 다른 원소와의 화합물을 만들려면 굉장히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반대로 질소가 포함된 화합물에서 다시 질소 분자로 되돌아갈 때 도로 내놓는 에너지의 양도 마찬가지로 굉장히 많다. 그래서 주로 폭발하는 물질은 질소화합물인 경우가 많다. 흑색화약의 원료가 되는 질산칼륨, 다이너마이트의 원료인 니트로 글리세린, 폭발물 TNT(트리 나이트로 톨루엔), 나이트로셀룰로오스 등, 죄다 앞에 니트로(나이트로, Nitro-)가 붙는데 질소를 의미하는 Nitrogen에서 온 말이다. 최근에 있었던 베이루트 항구 폭발사고의 2차 대폭발 역시 항구에 보관 중이던 질산암모늄(Ammonium nitrate)이 폭발한 것이 가장 유력한 원인이다. (어떤 물질이든 이름에 질산, 혹은 나이트로가 붙었는데 정확히 뭔지 잘 모르겠다면 일단 긴장해야 한다. ㅋ)
대부분의 식물들은 질소 분자를 직접 이용할 수 없으니 다른 형태로 질소를 이용한다. 자연계에서는 대기 중에서 번개가 칠 때 우연히 만들어진 질소산화물이 비에 녹아 땅속에 스며들기도 하며 흙 속의 박테리아가 만들어 내거나 동식물의 사체가 분해되며 남겨놓은 질소 화합물을 뿌리를 통해 흡수한다.
다만 여기에도 예외는 있어서 콩과 식물들은 뿌리에 공생하는 뿌리혹박테리아를 통해 공기 중의 질소를 직접 이용하기도 한다. 뿌리혹박테리아는 질소고정효소(nitrogenase)의 촉매작용을 통해서 공기 중의 질소를 원료로 암모니아(NH3)를 만들어서 식물에게 제공하고 식물은 이 암모니아를 이용해 단백질을 합성해서 뿌리혹박테리아에게 나누어 준다.
이런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식물들이 땅속에 있는 질소화합물들을 다 흡수해서 고갈되어 버리면 당연히 제대로 자랄 수가 없다. 우리가 흔히 지력이 고갈되었다고 하는 그 상황이 되는 것이다. 이 문제는 인류가 농사를 지어 식량을 얻는 데 있어 굉장히 큰 걸림돌이 되어 왔다. 이렇게 질소가 고갈된 상태의 토양에 다시 지력을 보충해 주려면 앞서 언급한 콩과 식물을 기르거나, 농사를 쉬어서 자연히 보충이 될 때까지 기다리거나, 비료를 통해서 인공적으로 질소를 보충해 주어야 한다. 그것도 아니면 질소가 없어도 자랄 수 있는 감자를 키우는 수밖에 없다.
위의 방법 중에서 인공적으로 지력을 보충하는 방법으로 오래전부터 애용하던 것이 ‘거름’하면 바로 떠오르는 ‘유기질비료’였는데, 동식물의 사체나 분변을 이용하는 이 방법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비료의 양은 한계가 있었다. (일단 식물이 많이 자라야 비료도 많아지니까) 결국 식량의 생산량이 재배면적과 그에 포함된 질소의 총량에 따라 제한되는 것이다. 따라서 인구의 수가 식량의 생산의 한계에 따라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맬서스 트랩은 이때만 해도 나름 설득력을 가진 이론이었다.
식물의 성장을 위해 거름(유기질비료)으로 지력을 보충해야 한다는 것은 오랫동안 농부들의 기본 상식이었지만, 이 통념을 깨트린 것은 독일의 화학자 유스투스 폰 리비히(Justus von Liebig )였다. 그는 1840년에 저서 《유기 화학의 농업 및 생리학에 대한 응용》에서 질소, 인산, 칼륨 등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밝혔다. 이 중에서 인산과 칼륨은 과인산석회를 통해 비교적 쉽게 보충할 수 있었지만 질소는 그러지 못했다.
그때 주목한 것이 독일의 탐험가 알렉산더 폰 훔볼트(Alexander von Humboldt)가 남미대륙을 탐험하다 발견한 구아노(guano, 인광석)였다. 구아노는 동물(새, 박쥐, 펭귄 등)의 똥과 알 껍질 등이 축적되어 만들어진 일종의 광물질인데, 인산염과 질소화합물이 풍부하게 들어있어서 비료로 쓰기에 딱 적합했다. 1804년 훔볼트가 구아노를 소개했을 때 사람들은 외면했지만 이후 리비히의 연구덕에 재조명받게 되자 한동안은 신나게 비료로 잘 써먹었다.
하지만 이 구아노가 동물의 배설물 등이 오랜 기간 축적되어 만들어진 물질이다 보니 공급량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기에 무한정 가져다 쓸 수가 없었다, 새똥이 쌓이는 속도가 새똥을 가져다 쓰는 속도를 따라잡을 수가 없어서(!) 이것 역시 결국에는 고갈될 테니 말이다. 게다가 이것이 심지어 군수물자이기도 해서 마냥 농업에만 쓰기에도 무리가 있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질소산화물은 화약, 다이너마이트, TNT 등의 재료이기도 하다. (여담이지만, 이런 이유에서 예전 우리나라에서 대북지원을 할 때 비료 지원을 두고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를 제외하면 직접 비료를 지원한 적이 없는 이유 중의 하나다.)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인구를 먹여 살리기 위해 식량의 증산이 절실하던 1900년대 초, 공기 중의 질소를 이용해 인공적으로 암모니아(NH3)를 합성하는 방법을 찾아낸 사람이 있으니 그가 바로 프리츠 하버(Fritz Jakob Haber)다.
프리츠 하버는 1868년 12월 9일 서부 폴란드의 브레슬라우의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18세가 되던 1886년 학부에 진학한 이후 1891년 5월 방향제 및 향료에서 발견되는 유기화합물인 피페로날을 주제로 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기까지 1년간 군대에 복무한 것을 제외하고는 죽 학업에 열중한 모양이다. 이후 본격적으로 연구자로서의 경력을 이어가며 1898년에는 카를스루에 공대의 부교수가 된다. 그리고 1901년 8월 3일에는 클라라 임머바르(Clara Helene Immerwahr )와 결혼한다.
그녀는 당시 여성이 대학교육받는 것이 금지되어 있던 독일에서 여성 최초로 화학 분야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대단한 인재였다. 하지만 여성에게 차별적이던 당시의 시대 분위기 때문에 독립적인 연구활동은 포기하고 프리츠 하버의 뒤에서 묵묵히 연구를 도왔다고 한다. 시대를 잘 만났더라면 프리츠 하버의 아내가 아니라 한 사람의 화학자로 이름을 남겼을지도 모르니 애석한 일이다. 남겨진 몇 안 되는 사진을 보면 미모가 상당하다는 걸 알 수 있다. 그야말로 재색을 겸비한 과학계의 아이돌이라고 해도 될 것 같은데 프리츠 하버는 도대체 어떻게 이런 멋진 여성과 결혼한 것인지 궁금했다. 의문은 하버의 젊은 시절 사진을 찾아보고 나서 풀렸다. 그의 대표사진과 달리 그도 한창때는 훈훈했던 것이다.
약 10여 년간 꾸준히 연구를 이어가며 몇 가지 중요한 유기화합물의 전기화학적 제조법을 발견해 내던 그는 1908년, 드디어 실험실 규모에서 질소-수소 기체로부터 암모니아를 합성하는 데 성공한다. 그의 연구 인생 최대 업적이자 인류에게는 큰 선물이 되었던 공중질소 고정법(Haber process)을 발명한 것이다. (후일 여기에 카를 보슈(Carl Bosch)가 촉매를 개선하여 대량 생산의 효율을 높이는데 이 공로를 인정해서 하버-보슈법(Haber-Bosch process)이라고도 불린다.)
이 발명이 있었기에 인류는 얼마든지 인공 질소비료를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게 되었다. 더 이상 휴경이나 윤작을 할 필요가 없게 되었으니, 식량생산이 급격하게 증가하기 시작했다. 1900년대 초반 16억이던 인구가 현재 70억 가까이 될 수 있었던 건 하버와 보슈 두 사람의 공로다.
그러나 동시에 프리츠 하버의 이 발견을 통해 화약 역시 대량 생산이 가능해졌고, 이는 1차, 2차 세계대전 동안의 대량 살상을 불러왔다. (화약의 주 재료로 니트로셀룰로오스, 니트로글리세린, 니트로구아니딘 등을 사용하는데 죄다 Nitro-가 붙어 있다는 것만 봐도 알만하다.) 한 가지 발명이 동전의 양면처럼 삶과 죽음을 동시에 불러온 점이 꽤 의미심장한데, 그의 이후 행보 역시 그의 발명처럼 상당히 역설적이었다.
프리츠 하버는 살상용 독가스를 적극적으로 개발하고 실전에서 사용함으로써 ‘화학전의 아버지’라고도 불린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독일의 군사행동에 명백히 찬성하며 지지한다는 사회 지도층의 뜻을 천명하는 93인 성명서의 일원으로 이름을 올렸다. 이어서 전시내각의 화학 분야 수장이 되어 참호전을 위한 독가스와 방독면을 개발했다. 심지어 바로 다음 해인 1915년 4월 2일에는 독일의 염소가스 공격이 최초로 실시되었을 때, 그가 직접 독가스 사용을 감독하기까지 했다. 게다가 평소 적극적으로 독가스를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다닐 정도였으니, 논란이 있을 수밖에 없다.
전쟁 중 그의 행보는 또 다른 비극을 낳고 말았다. 독가스가 실전에 사용되고 채 보름도 지나지 않은 1915년 5월 2일, 아내 클라라가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평화주의자였던 그녀는 평소 남편의 독가스 개발과 사용을 끈질기게 반대해 왔으나, 결국 실제로 독가스를 사용하고 말았고 그런 남편에 대한 분노와 절망이 그녀를 자살로 내몰았다.
그렇게 아내를 잃고 나서도 그의 행보는 변하지 않았다. 1918년 암모니아 합성법을 발견한 공로로 노벨상을 수상하는데 이때도 여전히 독일 육군의 극비 화학무기 연구 프로그램에서 연구를 계속하고 있었으니, 노벨상의 취지를 생각해 본다면 상황이 꽤나 역설적이다.
그간의 업보라고 해야 할까, 1931년 나치즘이 발흥하자 유태인 출신이었던 프리츠 하버에게도 상황이 매우 나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비록 유태인 태생이지만 오래전 기독교로 개종을 했고 1차 대전에 헌신한 바 있으니 자신의 애국심을 국가로부터 인정받을 것으로 기대했으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결국 자신이 근무하던 카이저 빌헬름 연구소에 유태인 추방령이 내려와 연구소의 책임자에서 사퇴한다. 이후 프랑스, 스페인, 스위스, 영국 등 여러 곳을 거쳐 1934년 1월 29일 이스라엘의(당시 팔레스타인) 다니엘 시프 연구소의 초대 소장직을 맡게 되어 개소식에 참석하고 돌아오는 길에 사망한다.
한 사람의 과학자가 이토록 이중적인 업적으로 이름을 남기는 것도 흔치 않은 일인 듯싶다. 식량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인류에게는 매우 큰 선물을 안겨주었지만, 대량살상무기인 독가스를 개발하고 사용하면서 인류애와는 거리가 먼 행보를 보였다. 혹자는 이를 두고 ‘주화입마’에 걸린 ‘매드 사이언티스트’라고 부르고 싶을지도 모르지만 이건 그리 단순하게 바라볼 문제는 아니다.
세상이 그저 전쟁 없이 평화롭고 아름답기만 하다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전쟁 앞에 인류애라는 이상주의는 그저 허망할 뿐이다. 전쟁이 발생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일단 전쟁이 시작된 이상 죽고 죽이는 야만적 폭력 앞에서는 오직 이기는 것 만이 정의다. ‘과학자는 평화로울 때는 인류를 위해, 전시에는 조국을 위해 봉사한다. (Im Frieden der Menschheit, im Krieg dem Vaterland)’는 프리츠 하버 본인의 말처럼 과학자들은 숙명처럼 딜레마를 가진 채 일할 수밖에 없다. 우린 항공기술 덕분에 편하게 해외여행을 다니고 있지만 같은 기술을 폭격이나 공중전에 쓰기도 한다. 원자력으로 발전소를 지을 수도 있지만 핵폭탄을 만들 수도 있으며 로켓기술로 우주탐사를 하지만 미사일을 만들기도 한다. 전투 중 총알이나 포탄에 맞아 죽으나 독가스를 마시고 죽으나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건 매한가지다. 하지만 우린 총기나 포탄의 개발자를 비난하지는 않는다.
현재 인류는 핵무기와 마찬가지로 화학무기도 그 위력을 직접 겪어 보았기에 최후의 순간까지 사용하지 않기로 암묵적인 합의를 하고 있다. 현대인의 관점에서 1차 대전을 치렀던 그가 단순히 화학무기를 개발하고 사용했다고 비난하는 건 어쩌면 온당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에게 국가를 위한 대의가 있었는지 개인의 영달을 위해 일한 것인지는 본인만이 알겠지만 그는 그저 과학자로서, 독일인으로써 할 일을 한 것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이 그의 행보를 불편하게 느끼는 건 어쩌면 인류를 위한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람은 그저 선한 일만 하는 좋은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다만 그의 행보가 아내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분명한 비극이다.
(이 대목에서 문득 스파이더맨의 명대사 '큰 힘에는 큰 책임도 따른다.(With great power comes great responsibility.)'가 떠오른다. ㅎ)
본문에서 잠깐 언급한 구아노와 관련해서 떠오르는 이야기가 하나 더 있다.
대략 호주와 하와이의 딱 중간쯤에 있는 태평양의 어느 섬나라 이야기다. 그 섬은 이름이 나우루라고 하는, 대략 크기가 용산구쯤 되고 인구는 약 1만 명 정도 되는 작은 나라다.
https://maps.app.goo.gl/6Uqz5vXnjZiCYJ2i7
원래 19세기, 유럽인들에게 발견되기 전에는 원주민들끼리 평화롭게 살던 나라였다. 제국주의 시절 이 섬도 식민지배를 피하지는 못했는데, 뒤늦게 알고 보니 이 섬은 구아노로 뒤덮여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1,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여러 나라가 돌아가며 점령하기도 했는데, 1968년 독립 이후 구아노의 채굴권을 돌려받으면서 나라 전체가 돈방석에 올라앉는다. 당시 인구가 대략 13000명 정도였다는데 구아노를 판 돈으로 전 국민이 부자가 되었다. 어느 정도였냐면 1980년대에 1인당 국민소득이 미국, 일본의 3배가 넘을 정도였고, 자가용 비행기를 타고 매일 하와이 싱가포르로 쇼핑을 다녔으며, 제한속도가 40km/h인 도로 1개만 있는 섬에 람보르기니 포르셰 등이 넘쳐났다고 한다. 나라가 돈이 많으니, 각종 서비스업은 전부 외국인이 했고, 외국인 가정부에 심지어 공무원조차 외국인이었다.
이런 일의 결말이 그렇듯, 구아노는 점점 고갈되어 갔고, 이에 대한 대비가 전무해서 관광이든 어업이든 다른 산업은 그 기반이 다 망가져서 산업 자체가 사라져 버렸다. 신나게 돈잔치 할 때는 좋았는데, 나중에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 셈이다. 게다가 국민들이 막상 다시 일을 하려니, 전 국민이 일하지 않는 습성이 몸에 밴 데다가 위기감을 느낀 일부가 일을 해보려고 해도, 일하는 방법조차 잊어버리고 말아서 빨래나 청소 같은 집안일조차 할 줄 모르게 되어버렸다.
결국 2007년 1인당 GDP가 2500달러까지 주저앉아버리는 바람에 한때는 조세 피난처 역할을 하면서 먹고살기도 하고 난민을 받아주는 대가로 호주로부터 재정지원을 받기도 했지만, 부작용으로 난민들의 폭동이 일어나기도 하는 등 혼란이 심했다. 다행히 2023년 기준 GDP가 11,000달러 선까지 어찌어찌 회복은 했고 지금은 원주민들도, 난민들도 다들 적응해서 그럭저럭 지내고 있다고 한다. 다만 여전히 전기나 식수 등의 필수 자원이 부족해서 고생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