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이 끝나고
전 인류를 공포에 떨게 했던 코로나 19 팬데믹이 종식된 지도 이제 1년이 넘었다. 2019년 연말 중국에서 원인불명의 폐질환이 돌고 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만 해도 그저 옆나라에서 일어나는 남의 이야기인 줄 알았다. 그때는 전 세계가 3년이 넘도록 혼란에 빠질 줄 상상도 못 했다. 그놈의 지긋지긋한 마스크를 쓰고 외출할 때마다 맨 얼굴로 다니던 시절이 언제였는지 가물가물 하더니 이제는 마스크를 쓰지 않으면 외출도 못하던 그 시절이 꿈속에만 있었던 일 같다. 발생 초기만 해도 전 세계에는 마스크가 부족해서 마치 배급받듯 그렇게 지정된 날짜에 한정된 수량만 살 수 있었는데, 지금은 쓰고 남은 마스크가 아직도 수납장 한쪽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건물 입구나 엘리베이터, 공공기관 창구 등, 사람 지나다니던 곳마다 비치해 두었던 손소독제도 기억이 난다. 누군가 집에서 쓰라며 한 병을 주기도 했지만, 그때 받았던 손소독제는 결국 한 병을 채 다 쓰지도 못하고 버려지고 말았다. 집에서는 손소독제를 쓸 일이 거의 없었다. 비누를 써서 물로 깨끗이 씻는 것이 훨씬 편리했기 때문이다.
이게 더 개운하기도 하고…
일상에서 흔히 보이기에 우리가 종종 간과하지만, 사실 비누는 물로 씻을 때만큼은 성능이 매우 좋은 살균소독제다. 비누의 계면활성제가 세균과 바이러스를 그냥 ‘찢어’ 버린다. 거기에 흐르는 물이 남아있는 세균 잔여물을 씻어내서 98~99%의 세균과 바이러스가 제거된다. 가끔 어떤 빨랫비누는 겉봉에 99% 살균력이라며 성능을 홍보하는데, 그건 그 제품이 특별해서 그런 게 아니라 비누 자체가 원래 그런 것이니 틀린 말은 아닌 셈이다.
오래 전의 비누
비누는 생각보다 굉장히 오래전부터 만들어서 사용해 온 물건이다. 무려 기원전 2800년경 고대 바빌론에 비누와 비슷한 물질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또 기원전 2500년경의 수메르 점토판에는 비누의 제조법이 적혀 있는데, 지방과 나무를 태운 재를 섞어 만든다고 되어 있다. 지방에 알칼리를 혼합해 만드는 비누의 기본적인 제조법은 그때부터 이미 알려져 있던 셈이다. 단지 시간이 지나며 지방의 종류나 알칼리의 원료가 약간씩 바뀌었을 뿐이다.
그중에는 중세시대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지고 있는 비누도 있다. 프랑스의 마르세유 주변 지역에서 생산되는 ‘마르세유 비누’가 그것이다. 생긴 것을 보면 요즘의 비누처럼 네모난 덩어리 모양이다.
마르세유 비누. 패키지 디자인부터 고전적인 맛이 있다.
이 비누에 대한 기록이 1370년경부터 있으니 600년 이상의 대단히 긴 전통을 가진 비누다. 지중해의 바닷물과 올리브유, 해초를 태운 재를 혼합해서 만든다고 하는데, 예전부터 많이 쓰이던 동물성 지방 대신 올리브유를 사용함으로써 향이 좋아 귀부인들에게 사랑받았다고 한다. (비누를 만들 때는 동물성이든 식물성이든 일단 기름이면 되기 때문에 북한에는 정어리비누가 있다고 한다. 이걸로 세탁도 하고 머리도 감고 한다는데, 비누에서 나는 생선 비린내가 아주 끝내준다고…)
이와 같은 형태의 비누가 다른 유럽지역으로 보급되어 쓰이기는 했지만 비누는 여전히 ‘좀 사는 집’ 혹은 귀족들이나 쓸 수 있는 사치품에 가까웠다. 재료만 봐도 느낌이 딱 오겠지만 가격이 엄청 비쌌기 때문이다. 영국에서도 비누는 사치품이어서, 1712년부터는 비누에다 세금까지 부과하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비싼 비누가 더 비싸져서 심한 경우 비누 가격의 2/3가 세금인 경우도 있을 지경이었다. 비누세는 비누제조업자에게 부과되었는데 업자들이 비누를 한번 생산할 때 딱 정해진 양만 생산하도록 세무공무원들이 철저히 감독했으며, 몰래 만들어 빼돌리는 걸 막겠다고 밤에는 아예 공장 문을 잠가버리기까지 했다. 이 비누세는 150년 가까이 지난 1853년이 되어서야 폐지되었다. (그러고 보면 영국은 이상한 세금 참 잘 만든다. 부자들은 모자(hat)를 많이 가지고 있을 테니 모자에다 세금을 매기질 않나, 부자들은 큰 집에 살고 큰 집에는 창문이 많을 테니 창문세를 만들지를 않나….)
저렴한 비누가 필요한데…
의학이 발달하고 사람들의 위생관념이 높아지면서 비누의 수요는 점점 늘어갔지만 대중적으로 쓰이기에는 여전히 비싼 가격이 문제였다. 다행히 그 무렵 공업생산력은 점점 증가해서 대량생산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지방에 첨가할 순도 높은 알칼리를 얻는 게 힘들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프랑스의 의사이자 화학자였던 니콜라 르블랑(Nicolas Leblanc)이 소금으로 탄산나트륨을 제조하는 방법을 고안하며 점점 나아질 수 있었다.
니콜라 르블랑의 동상, 292 Rue Saint-Martin, 75003 Paris, France
니콜라 르블랑은 1742년 12월 6일에 제철소 직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하지만 그가 채 10살도 되기 전에 아버지가 사망하자 가족과 친했던 의사(Dr. Bien)가 그를 거두어 함께 살게 되었는데 그 영향으로 의학에 관심을 갖게 된다. 1759년에 자신을 돌보아주던 보호자마저 사망하자 파리의 외과대학에 입학해서 결국 의사가 되었다. 병원을 개업한 뒤에는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았지만 병원 운영만으로는 생계를 꾸리기가 어려워 유력한 귀족이었던 오를레앙 공작 루이 필리프 2세의 주치의가 된다.
한편, 1775년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에서는 소금을 원료로 탄산나트륨을 생산하는 제조법을 개발하면 발명자에게 상금을 수여하겠다고 공고를 한다. 탄산나트륨은 여러 곳에 중요하게 사용되는 원료다. 유리를 만드는데 지금도 사용되고 있으며, 탄산수소나트륨으로 만들면 그게 바로 제과 제빵에 쓰이는 베이킹소다인데 제약산업에도 쓰인다. 소석회라고도 부르는 수산화칼륨과 섞으면 수산화나트륨을 만들 수 있는데 이게 바로 비누를 만들 때 지방에 첨가하는 가성소다다. 소금이야 흔하게 구할 수 있던 원료였으니 제조법만 알아낸다면 대량으로 쓰일 곳은 차고 넘쳤다.
니콜라 르블랑은 오랜 연구 끝에 1791년 소금과 황산을 반응시켜 탄산나트륨을 만드는 데 성공한다. ‘르블랑법’으로 부르는 이 제조법으로 그는 과학아카데미의 공모에 우승했고, 주치의인 오를레앙 공작의 투자를 받아 탄산나트륨 제조공장을 설립했다. 대단한 업적을 이루었으니 이제 부와 명예를 얻을 일만 남은 줄 알았는데, 그때부터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프랑스혁명과 후원자
그의 후원자였던 오를레앙 공작 루이 필리프 2세는 영지가 프랑스 왕국의 5%에 달할 정도로 막대한 부와 권력을 가진 귀족이었다. 그럼에도 자유주의 사상가들과 교류하며 후원했고 프랑스혁명 때는 혁명군을 지원했다. 심지어 그의 아들 사르트르 공작 루이 필리프 1세는(아들인데 1세다. 귀족 족보가 이렇게 복잡하고 어렵다.) 자유주의 사상에 감화되어 혁명군에 합류하여 복무하기까지 했다. 정치적으로는 마리 앙투아네트와 대립하기도 했고 루이 16세의 처형에도 찬성했다. 그가 귀족임에도 이렇게 귀족답지 않은 행보를 보인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궁금증을 자아낸다.
태생부터 막강한 권력을 가졌으나 그에 만족하지 못하고 왕위 찬탈을 꿈꾸며 자신의 야망을 위해 혁명군을 이용하려고 했던 것일까? 아니면 시대의 거대한 흐름을 읽고 처음부터 순수하게 입헌 군주제를 지지했던 것일까? 그의 진짜 속마음이 어땠는지는 본인만 알겠지만, 결과가 썩 좋지 못했다.
혁명군을 지휘하던 뒤무리에 장군이 그의 아들 루이필리프 1세를 왕으로 옹립하려고 쿠데타를 시도하다 실패하고 해외로 도피하자 그도 목숨이 위태로워졌다. 오를레앙 공작 본인은 쿠데타와의 관련을 극구 부인했지만 아들의 일을 아버지가 몰랐을 리 없다며 혁명군은 그를 믿지 않았고 도피 중인 아들이 보낸 편지가 발각되는 등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다가 결국 루이 16세가 처형된 지 채 10달도 되지 않아 본인도 단두대에 처형되고 만다.
오를레앙 공작 루이 필리프 2세의 초상
후원자가 처형당하자 르블랑의 공장은 귀족의 재산이라며 혁명정부가 몰수해 버렸고 귀족과 엮여있었던 게 단단히 밉보였는지 과학아카데미의 우승상금마저 지급을 거부당한다. 그뿐 아니라 일을 계속하고 싶다면 조국의 이익을 위해 특허를 공개하라는 혁명정부의 압박에 특허권마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1802년에 나폴레옹이 공장을 돌려주기는 했지만 운영자금을 확보하지 못해 그는 결국 파산하고 말았다. 혁명이라는 광기의 소용돌이 속에 그도 유탄을 맞은 셈이다. 화병이 걸려도 크게 걸릴 것 같은 이 모든 상황에 절망한 그는 결국 1806년 권총으로 자살한다. 더욱더 안타까운 것은 그가 인류에 남긴 유산인 르블랑법조차 이제는 그다지 사용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보다 더 나은 방법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솔베이가 개발한 제조법
에르네스트 솔베이(Ernest Solvay), 미중년의 포스가 느껴진다
1861년 벨기에의 화학자 에르네스트 솔베이(Ernest Solvay)는 소금물과 이산화탄소, 암모니아를 이용해 탄산나트륨을 합성하는 ‘솔베이법’을 개발한다. 르블랑법은 제조과정에서 염산이 부산물로 나왔기 때문에 장비의 부식이 심했고 솔베이법은 이런 문제가 없었기에 대세로 자리 잡게 된다. 솔베이는 1863년 공장을 건립하고 1872년에는 제조법에 대한 특허를 취득했다. 르블랑과는 다르게 솔베이는 특허를 통해 엄청난 부를 얻었고, 이후 다양한 사회공헌 활동을 했다. 특히 물리학과 화학의 발전을 위해 설립한 학회인 솔베이 회의가 유명하다. 그중에서도 5차 회의가 가장 유명한데 기념사진은 인터넷에 <지상 최강의 정모>라는 이름으로 돌아다닌다. 이름만 들으면 알만한 과학계의 거물들이 죄다 모여 있는데 그중 17명이 노벨상 수상자들이다. 닐스 보어와 아인슈타인은 5,6차 솔베이 회의에서 그 유명한 양자역학에 관한 사고실험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5차 솔베이 회의에 참가한 과학계의 드림팀
프랑스혁명과 베르사이유의 장미
프랑스혁명은 인류가 근대 시민사회로 도약하는 계기가 되었던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프랑스혁명이라고 하면 단두대부터 떠올리거나 민주주의, 마리 앙투아네트가 했다고 와전된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라는 발언을 떠올리기도 한다.
아내는 애니메이션 베르사이유의 장미를 가장 먼저 떠올리는 모양이다. 학교에서 세계사 시간에 배우기도 전에 그 애니메이션으로 프랑스혁명을 배웠다고 한다. 얼마나 좋아했던지 어릴 때는 오스칼이나 마리 앙투아네트 같은 등장인물들 곧잘 따라 그리며 놀았고 지금도 그려달라 말만 하면 그 자리에서 바로 그려줄 수 있을 정도다. 그림을 그릴 때면 자체 BGM을 직접 부르는 것도 잊지 않는다. ‘바람 한점 없어도 향기로운 꽃~’에서 시작된 그림은 후렴구인 ‘장미 장미는 화사하게 피고, 장미 장미는 순결하게 지네~’ 부분에 이를 때쯤 딱 맞춰 완성된다. 펜을 내려놓으며 ‘오스칼~!’ 하며 애통한 외침을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는다.
아내는 비록 가상의 등장인물이지만 그 혼돈의 시기를 배경으로 앙드레와 오스칼이 나눈 비극적 사랑이 애절해서 여운이 많이 남는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인류를 위한 성과를 내고도 시대에 모든 것을 빼앗겨 버린 어느 화학자의 이야기가 더 애석하다.
나 같은 소시민의 위생적인 일상에 기여한 두 화학자를 기리며 오늘도 손을 박박 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