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에 대한 속죄의 의미, 필요성
참으로 놀랍게도 이 영화의 반전은 끝나기 10분 전에 이루어지는데, 그것은 바로 이 영화가 실은 액자식 구성이었다는 점이다. (영화상) 현실의 브라이오니는 '독자들에게 아름다운 결말을 보여주고 싶었기에' 실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소설에서 숨겼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을 안 (진짜) 현실의 관객들에게는 한없는 찝찝함을 안기고 영화는 끝난다.
브라이오니는 진실한 속죄를 한 것인가? 이 질문이 결국 그 이전까지 영화가 보여준 아름다운 영상들을 잊게 만드니 어찌 보면 아쉬운 일이다. (그 후의 역사를 알고 있는 후대에게는 안타깝기만 할) 전쟁발발 직전 영국의 안락함, 이성에 대한 연심을 자각하는 시기 소꿉친구의 위태로움, 사랑하지만 헤어져야 하는 연인들의 애절함, 전쟁의 고달픔, 다시 연인들이 행복해질 수 있을까에 대한 기대감... 이 모든 것은 브라이오니의 '사실 행복한 엔딩따윈 없었음'하는 고백에 의해 속절없이 망가진다. 결국 이것은 시청자들이 시실리아처럼 '모든 것을 망친 브라이오니'에 대해 분노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영화의 제목은 속죄다. 브라이오니는 자신의 어린날 잘못을 속죄하기 위해 저물어가는 생의 마지막에 이 작품을 썼다고한다.
(이 부분은 영화와 책이 다르다는 듯 하다. 영화상에서 브라이오니는 '그것이 그들에게 주는 나의 선물이었다'고 마치 관용을 베푸는듯 말해서 관객의 공분을 사는 반면, 책에서는 '그들이 독자들의 세계에서는 영원히 행복한 삶을 살길 바랐다' 같은 표현으로 끝나는듯 하다. 영화가 왜 그런 표현을 골랐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드라마틱한 악당을 만들기 위해서였나?)
브라이오니의 속죄는 한편으로는 자기만족을 위한 속죄라고 보여진다. 속죄의 대상이 되었어야할 장본인들은 오래 전에 이미 죽어버렸다. 남겨진 그녀는 작가로서 성공하고 승승장구 해왔다. 생명의 힘이 다해가는 지금에야 겨우, 그녀는 오랜 시간 자신을 지켜봐온, 자신에게 관대할 독자들에게 어린 날의 치기와 그로 인해 의도치 않게 벌어졌던 비극을 고백한다. 그 이야기가 씌여지는 것에 대한 당사자들의 양해는 물론 구하지 않았고, 구할 수도 없다.
다른 한편으로는 브라이오니는 큰 용기를 내었다. 어찌 됐든 그녀는 영광의 삶 마지막에서, 평생 가슴에 묻고 아무도 모른 채 끝낼 수 있었던 일을 고백한다. 즉 자신이 평생에 걸쳐 쌓아온 명예를 한순간에 잃어버릴 수도 있는 선택을 한 것이다. 긴 생애동안 갈고 닦아온 작문의 역량을, 시실리아와 로비가 행복한 결말을 맞는 것으로 마무리 지었다.
잘못의 대상이 용서하지 않는 속죄가 과연 가치있다고 할 수 있을까? 본인이 잘못했다고 고백하고 반성하는 것만으로 죄는 없어질 수 있을까? 누구도 이에 대한 정답은 내려줄 수 없다. 물론 최선은 가능한 한 타인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행동일테고, 차선책은 저지른 잘못을 사과하고 용서받는 것일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처럼 사과의 대상이 이미 죽거나 사라졌을 때, 혹은 잘못을 용서해 주지 않을 때에는 어떨까. 결국 많은 사람들은 적어도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진정성이 있다는 전제하에) 참회의 행동이 그나마 낫다고 할 것이다. 그렇지만... 진짜 당사자의 심정은 어떨까. 과연 그 누구라도 타인의 잘못을 대신 용서하거나, 또는 '이제 그만 용서해주라'며 종용할 자격이 있을까.
브라이오니가 한 행동은 순전히 자기 만족을 위한 속죄일 수도 있고, 아니면 잘못을 저질렀고 게다가 사과할 시기마저 영원히 놓치고 만 것에 대한 평생의 한을 담아,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속죄일 수도 있다. 둘 중 어느 것에 가까운지 명확한 답은 없고 판단은 보는 사람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