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편
올해 처음 배운 것 중 하나는, 나는 스페인 와인을 매우 좋아한다는 것이다!
그 전에는 특별히 의식해본 적이 없었는데, 문득 깨닫고 보니 올해 마신 와인 중 기억에 남는 것들 꽤나 여러 개가 스페인 출신이었다. 그 덕분에, 지금까지 잊고 있었던 스페인이란 나라에 대한 애착이 둥둥 떠올랐다.
(이하는, 와인을 마시면서 쓴 이야기들이라 상당히 의식의 흐름대로 주절주절 흘러갑니다.....)
나는 중고등학교때 스페인어를 상당히 열심히 공부했었다. 내가 접해 본 여러 언어 가운데 스페인어는 특히 메리트가 있는 편이었는데, 1) 발음이 쉬웠고 2) 문법이 상당히 규칙적인 편이며 3) 라틴어에서 파생했기 때문에, 다른 유럽의 언어를 알고 있거나 함께 배우고 있다면 배우기 쉽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열심히 공부했던 노력이 아깝게, 정작 써먹어 본 적은 거의 없다. 세 번 정도 있었나? 첫 번째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쯤 지인의 지인으로 스페인 사람을 만난 적이 있는데, 내가 스페인어를 약 5년간 배웠다는 얘길 듣고 스페인어로 말을 걸어 주었었다. 고맙게도 상당히 쉬운 회화였고, 그 때에 나는 별 문제 없이 대화를 이어갔었다. 내 스스로가 상당히 자랑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그 이후에 스페인어를 쓸 기회가 되었던 것은, 그로부터 약 6년 후였다. 그 당시 친했던 친구 세 명과 스페인 남부 지방쪽으로 여행을 갔었는데, 여행을 출발할 당시에 나는 '나만 믿어!' 하면서 상당히 자랑스러워 했었지만 막상 가보니 별 쓸모는 없었었다. 스페인 사람들이 영어에 별로 거부감이 없어서, 내가 어설픈 스페인어를 구사하면 '영어 할 줄 알아요?'라고 물은 다음에, 영어로 대화를 이어갔기 때문이었다. 아아, 나의 5년간 노력은 6년간의 공백이 지나니 물에 씻은 것처럼 사라져 있었다.
그 때의 기억은 지금도 달콤씁쓸하게 남아 있다. 당시에는 상당히 즐거웠었지만, 돌이켜보니 아쉬운 것들이 참 많다. 첫 번째로 그 당시의 나는 와인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학부 2학년 즈음에 겪었던 와인과 관련된 심하게 안 좋은 추억 때문이었는데, 그 일이 있었던 후 장장 10년간 와인을 잘 마시지 못하게 되었었다. 스페인 여행을 갔을 때에도 샹그리아 정도는 입에 댈 수 있었지만 그 이상은 싫었다.
두 번째로는 상당히 즉흥적으로, 타이트한 예산에 맞추어 준비했었기 때문에 막상 스페인까지 가서 별다르게 한 것이 없었다는 점이다. 당시에는 우리가 유학하던 나라에서 갈 수 있는 스페인의 지방 중 가장 저렴한 것이 남부의 말라가 지방이었기 때문에, 그 쪽을 택했다. 사실 나는 중학교 때 스페인어를 공부할 때 말라가라는 지방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약간의 로망은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막상 가 보니 시내에서는 참 볼 것이 별로 없었고, 그나마 근교에서 가장 볼만한 것이라고는 알람브라 궁전이었는데, 그마저도 사전 예약을 하지 않았었기 때문에 볼 수가 없었다. (여행을 가는데 이 정도의 준비조차도 하지 않았었다!) 다만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은, 알람브라 궁전이 있는 곳 근방까지 가서 상당히 오래 걸어다니다가 어느 언덕을 올라갔던 것이다. 한국으로 치면 달동네 같은 느낌이 아니었을까 싶은데, 가파른 언덕에 거미줄 미로같은 골목이 이곳 저곳으로 뻗어 있었다. 섣불리 들어갔다가는 길을 잃을 것 같아서, 여행객들이 걷는 길 이외의 샛길로 빠질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 동네는 집시들이 사는 동네라고 들었었던 것 같다. 지금도, 집의 새하얀 벽들이 쏟아지는 햇빛을 눈부시게 반사하던 그 풍경이 눈앞에 그려진다. 헉헉거리며 계단을 끝없이 올라가는데, 길에 인접한 어느 집에서는 신나는 음악이 흘러나왔다. 우리와 다른 여행객들은 어떠한 비장함마저 갖고 (여기까지 왔으니 저 위에 올라가서 풍경은 꼭 보아야 한다! 같은) 계단을 힘겹게 오르고 있는데, 어디선가 들려오는 두런두런 이야기소리와 음악소리가 '아 여기도 역시 사람 사는 곳이구나'를 느끼게 해주었었다. 나의 일탈이 누군가의 일상이라는 것이 그 때만큼 크게 와 닿았던 때가 없었던 것 같다.
또 기억에 남는 곳은, 지브롤터였다. 스페인 영토 안의 영국령인데, 그 당시 우리 일행 중 한명이 꼭 이곳을 가봐야겠다고 우겨서 갔었다. 케이블카를 타고 절벽 꼭대기까지 올라갔던 것 같은데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고된 산행을 좀 했던 것 같다) 꼭대기까지 올라갔을 떄 막상 나는 그냥 '음, 절벽이군...' 정도의 느낌밖에 받지 못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곳에 가야 한다고 우겼던 친구가 너무 즐거워했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그 모습을 보며 더 많이 웃었었다. 이런 아무것도 없는 곳이 뭐가 그렇게 보고 싶었냐고. 절벽 꼭대기에서 맞는 바람이 무척이나 셌고, 햇빛에 눈이 부셨었다. 가는 길에는 원숭이들이 많았는데 이 정도의 가까운 거리에서 원숭이를 본 것이 상당히 오랜만이었던 데다가 방심하면 원숭이들에게 소지품을 빼앗길 수도 있다는 경고를 들었어서 긴장했었다.
그리고 또 기억에 남는 것은, 말라가 시내로 돌아와서 해변에 갔었던 기억. 낮에는 어딘가를 들렀었다가 해가 뉘엿뉘엿 질 때 쯤에야 바닷가에 다다랐었다. 당시 1월 정도였기 때문에 당연히 해수욕은 무리였었지만 그래도 스페인은 상당히 따뜻했다. 바닷바람을 맞으며 우리는 함께 여러 장의 사진을 찍었었다. 노을이 지는 것을 보고 바다가 어두컴컴해지는 것까지 보다가 다시 몸을 돌려 시내 쪽으로 올라 왔었다. 당시에는 지금만큼 맛집 등의 정보가 많이 없었던 때였는데, 자세히 알아보지 않고 그냥 눈에 보이는 펍들 중 한 군데를 골라서 들어갔던 것 같다. 그 때 시간이 6~7시 정도였다.
스페인에는 시에스타 문화가 있다고 한다. 낮에 너무 더워지기 때문에, 낮의 두세시간 정도는 낮잠을 자고, (literally, 학교도 이 때는 쉬는 시간이라고 한다! 집에 돌아가서 쉬고온다고 배웠었던 것 같다) 스페인 사람들은 꽤나 늦은 시간에 저녁을 먹고 잠에 든다고 들었었다. 저녁을 먹는 시간이 9~10시정도라고 했는데 정말이었다. 우리가 처음 들어갔던 시간에는 술집에 손님이 몇 없었다. 그 여유를 즐기며, 여러가지 타파스를 시켰다. 가난한 학생들에게도 부담이 되지 않는 가격이었지만 맛은 예술이었다. 그 때에는 한국에 스페인 음식점이 몇 없었었고, 또한 상당히 고급음식이라는 이미지가 있었었다. 그런 와중에 스페인 본토에서 맛보았던 타파스는 우리의 마음을 쏙 빼앗았다. 아마 내가 지금 다시 한국에서 맛있다는 스페인음식점에 가도, 그 때 친구들과 웃고 떠들며 즐겼었던 그 오징어 먹물 빠에야와 샹그리아의 맛은 이기지 못할 것 같다.
마지막으로 아쉬운 점은, 그 후 여러가지 사정이 생겨서 그 때 그렇게 웃고 즐겼던 친구들과 모두 연이 끊겼다는 사실이다. 평생동안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하고 친구를 많이 사귀지 못한 나였는데, 그 여행을 갔었을 때 같이 갔었던 그들은 참 사랑스러웠었다. 안타깝게 그 후에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 여행을 갔었던 때의 사이로는 무엇을 하더라도 두 번 다시 돌아갈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짧은 여행에서 많은 사진을 찍었었는데 핸드폰을 바꾸고, 디지털 카메라를 바꾸면서 그 사진들은 모두 어디엔가 잠들어 있고 지금은 그저 그 당시의 풍경과 몇몇 장면만이, 나 자신의 필터를 덮어 쓴 채 내 머릿속에만 남아 있다.
너희들도 가끔은 그 때의 여행에 대해 생각하니?
그 후 내 인생에서 마지막으로 스페인어를 구사할 기회가 있었던 때는, 몇 년 전 Castaño winery의 아드님이 오셨던 와인 강의와 시음회에 참석했던 때이다. 먼저 가서 앉아 있었는데, 나를 포함해서 일찍 도착했던 몇몇의 사람에게 영어로 말을 걸어 주었었다. Winery에 대한 소개와 시음을 마치고 용기를 내어, 거의 잊고 있었던 스페인어로 말을 걸었다.
"Muchas gracias para venir a Corea. (한국에 와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분은 깜짝 놀라면서 스페인어를 어디서 배웠냐고 물었다. 그 간단한 말조차도 스페인어로 금방 생각이 나질 않아, 멋쩍게 웃으며 어렸을 때 외국에서 유학했는데 그 때 배웠었다고 영어로 대답했다.
나만의 느낌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째서인지 우리나라에서는 처음 와인을 마실 때, 프랑스 아니면 아예 미국이나 칠레, 호주 등 신대륙 쪽으로 갈라지면서 이탈리아나 스페인, 포르투갈, 독일 등 프랑스를 제외한 구대륙쪽의 와인은 살짝 관심의 대상에서 비껴진 느낌이다. 하지만 오히려 내가 우리나라에 수입된 와인을 마셔 보았을 때, 오히려 실패할 확률이 적었던 것은 스페인이나 이태리 와인이었다.
그 주요한 원인은 아마 스페인 와인의 주 포도품종이 Tempranillo 이기 때문인 것 같다. 초보자가 마시기에도 상당히 좋고 부담스럽지 않은 와인인데, 와인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마셨을 때 목넘김 (바디감이라고 한다)이 그렇게 부담스럽지 않으며, 탄닌(감을 먹을 때 느껴지는 것과도 같은 떫음)이나 신맛이 상대적으로 덜한 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면에, 향 자체는 여러 과일(붉은색, 검은색 모두)과 오크, 초코렛, 담배 향 등이 섞여 복합적으로 난다. 오크 등의 향에 비해 과일 향이 좀 더 강하기 때문에 한결 편하게 즐길 수 있다. 같은 가격대라면 프랑스나 미국 와인에 비해 스페인 와인이 훨씬 마시기 쉬우면서 섬세한 향이 난다는 게 내 주관적인 생각이다.
이하는 개인적인 추천 와인 리스트. (Winery - wine명)
* 가격은 와인바 등에서 마시는 것이 아닌, 와인샵 기준
1. La Rioja Alta - Viña Arana Gran Reserva (5~10만원대)
개인적으로 꼽는 올해 최고의 와인 중 하나! 이 만한 가격대에 이 정도의 느낌을 내는 와인은 몇 없을 것 같다.
2. Torre de Oña - Martelo (5~10만원대)
Viña Arana 보다 조금 더 강한 와인이 취향이라면 이 쪽이 더 잘 맞을 듯.
3. Castaño - Casa Cisca (10만원대), Castaño Monastrell Ecológico Barrica (3만원대)
Castaño Winery의 오가닉 와인은, 오가닉 와인을 별로 즐기지 않는 사람(e.g.본인..)도 그럭저럭 잘 즐길 수 있다. (이 winery는 Tempranillo가 아닌, Monastrell을 주 품종으로 한다) Casa Cisca의 경우 촉감이 상당히 부드러우면서도 약간 무거운 편이고, 과일보다는 오크, 스모크향이 좀 더 강하다.
4. Imperial - Rioja Gran Reserva (15만원대)
스페인 왕실에 납품하는 와인이라고 들었던 것 같다. 부드러우면서 복합적인 향을 느끼고 싶을 때 최고였던 와인 중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