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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더로드 Jun 04. 2015

사진가 김중만이 포착한 싱가포르

돌이켜보면 김중만 작가는 좀 더 원시적인 느낌을 찾고 싶던 것 같다. 그러니까 미래적이면서 원시적인 싱가포르를.


글 허태우사진 김중만 Studio Velvet Underground 박상수, 김동근, 로렌 허친스(Loren S Hutchins), 마르코 테시오레(Malco Tessiore)

© Studio Velvet Underground
© Studio Velvet Underground

싱가포르에서 찾아야 할 것


공항 체크인. 17인치 파노라마를 촬영할 수 있는 세이츠 카메라, 4×5인치 시나르 에프투 필름 카메라, 페이즈 중형 디지털카메라, 캐논 EOS 1D를 포함한 3대의 DSRL 그리고 동영상 촬영을 위한 캐논 6D. 거기에 맞는 여러 단렌즈와 줌렌즈, 망원렌즈, 폴라로이드 필름과 포지티브 필름, 트라이포드와 모노포드, 각종 배터리, 충전기, 스토로보, 반사판…. 싱가포르항공 체크인 카운터에 여행 가방을 넘긴 후에도 기내에 직접 들고 가야 할 캐리어가 4개 남았다. 각 스태프가 메고 있는 촬영 장비용 백팩을 제외하고 말이다. 확실히 사진 촬영팀의 화물치고는 많다. 정작 옷가지 등의 여행용품은 소형 더플백에 간소하게 채웠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더욱. 마치 해외 유학을 떠나는 사람처럼 카트에 짐을 한가득 쌓는다. 이런 장비들을 챙기느라 바둥거릴 법한데, 아니었다. 사진가 김중만과 그가 이끄는 스튜디오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스태프는 이런 일을 수십 번이나 겪었다는 듯 일사불란하게 출국장 안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다.

“전 세계에 도시국가가 얼마나 있는지 알아요? 별로 많지 않아요. 바티칸, 모나코, 몰타, 쿠웨이트…. 싱가포르도 그중 한 곳이에요. 독특하죠? 저는 도시국가 싱가포르의 행복이 무엇인지 찾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도시국가이자 행복의 국가, 싱가포르.” 인천국제공항의 싱가포르항공 라운지에서 출국 시간을 기다리며 김중만 작가가 말한다. 도시국가라. 도시국가, 하면 부와 문화‧예술을 자연스레 떠오른다. 르네상스 시대에 활약한 유럽의 명문가들 때문이다. 그들은 한 도시를 국가처럼 운영했고, 부를 축적해 인류에 문화유산을 남겼다. 그 후 수 세기가 지난 오늘날의 도시국가는 예전과 비슷한 듯 다르다. 르네상스 시기에는 규모가 비슷한 도시끼리 경쟁했지만, 이제는 거대한 강대국과도 경쟁해야 한다.  1965년부터 그런 환경을 뚫고 성장한 싱가포르는 가히 완벽하게 자리 잡은 현대적 도시국가다. 김중만 작가가 말한다. "그러고 보니 전 세계를 돌아다닌 것 같은데, 싱가포르는 처음이에요."

클락키(Clarke Quay)의 야경. 촬영 기종 Canon 1Dx / 100~400mm L © 김중만 Studio Velvet Underground
페라나칸 바바하우스(Baba House). 촬영 기종 Phase one / 16mm wide © 김중만 Studio Velvet Underground

스카이라인의 아래부터


4박 5일의 길지 않은 일정. 이번 출장을 위해 스튜디오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로렌 허친스와 나는 촬영 장소를 고려해 일정을 계속 수정했다. 총 200킬로그램에 달하는 촬영 장비의 동선도 고려해야 했다. 그 무겁다던 19세기에 사용하던 다게레오타이프(Daguerreotype) 카메라의 무게가 약 50킬로그램이다. 경량화와 다기능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21세기의 카메라 제조사가 들으면, 이번 싱가포르에서 촬영은 경악할 일인지도 모른다. 섭씨 30도를 오르락내리락하는 싱가포르의 거리 한복판에서, 사진 1컷을 찍기 위해 장비를 세팅하고 촬영하고 검토하고 다시 촬영을 반복하다 보면 서너 시간이 훌쩍 지나갈 것이다. 이 일련의 과정 또한 이탈리아 출신 필름 디렉터이자 벨벳 언더그라운드 소속의 마르코 테시오레가 동영상으로 기록한다. 그는 이번 싱가포르 촬영을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 영상을 제작할 예정이다. 또한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또 다른 어시스턴트 포토그래퍼 박상수와 김동근이 함께 촬영을 진행한다. 그렇게 마리나 베이 일대의 경이적인 마천루와 풀라우 우빈의 한없이 짙은 녹음, 도심 이곳저곳에서 살아 숨 쉬는 다채로운 현장은 일련의 프레임에 차곡차곡 담길 것이다.

프로젝트의 베이스캠프, 즉 숙소는 2곳. 오차드 로드(Orchard Road)의 리젠트 싱가포르 어 포시즌스 호텔(Regent Singpore A Four Seasons Hotel)과 페라크 로드(Perak Road)에 자리 잡은 페라크 호텔이다. 전자는 오차드 로드에 어울리는 고급스럽고 조용한 곳이고, 후자는 리틀 인디아(Little India)에 어울리는 이국적인 배낭여행자의 숙소. 극과 극을 오가는 성격의 숙소에 머문 이유는 따로 있다. 현지의 다양성과 진짜 모습을 속속들이 경험하고 싶었으니까. 아무리 화려한 도시라도 뒷모습이 존재하는데, 그 모습을 럭셔리 호텔이 보여줄 수는 없는 일이다. 현지의 오래된 보도블록에 눌러앉아 있는 듯한 고유한 분위기를 찾으려면 뒷골목의 허름한 숙소에서 한 번쯤 잠을 청해봐도 좋겠다. 그리고 참고로 단언컨대, 싱가포르의 숙박 서비스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호텔리어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고 투숙객에게 전해주는 서비스도 마찬가지다. 그들과 얘기를 나눠보면, 언제나 기분이 좋아진다. 별 5개짜리 호텔이든, 4인 1실의 호스텔이든 태도에 차이가 없다.

싱가포르를 함축해놓은 듯한 최고의 풍경은 마리나베이에 펼쳐져 있다. 무리 지어 솟아 있는 초고층 빌딩과 도심 속 작은 허파 같은 공원, 멀라이언 같은 상징적인 조각상, 세계적 랜드마크로 자리 잡은 마리나 베이 샌즈, 거대한 인공 정원 가든스 바이 더 베이 등.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건축 실험을 여기에서 마무리한 듯하다. 그 공간에서 유쾌하게 떠들며 산책하는 사람은 또 어떤가. 중국, 말레이시아, 인도, 페라나칸 등 네 가지 문화의 세례를 받은 싱가포르 인과 전 세계인이 그 안에서 한데 어울려 조화를 이룬다. 여행객은 히잡을 둘렀고 비즈니스맨은 실크 넥타이를 맸다. 촬영팀은 마리나 베이 샌즈의 레스토랑 스카이 온 57(Sky On 57)에서부터 옥상의 인피니티 풀, 전망 덱을 차례차례 이동하며 싱가포르의 미래적 풍경을 하나씩 포착해간다. 행복한 표정과 친절한 태도의 사람들을 스쳐가며. 그중 몇몇은 세계 최고층의 인피니티 풀에서 바람에 일렁이는 야자수 나뭇잎을 배경 삼아 붉은색 싱가포르 슬링을 마시고 있다.

마리나 베이 야경. 촬영 기종 Sinar f2 / schneider copal No.3 180mm © 김중만 Studio Velvet Underground
풀라우 우빈(Pulau Ubin). 촬영 기종 Phase one / 16mm wide © 김중만 Studio Velvet Underground


미래적이거나 원시적이거나


김중만 작가는 야생동물처럼 피사체를 찾는다. 그가 “미래를 향하고자 하는 건축의 도시”라고 표현한 장소에서조차 말이다. 200미터 높이의 빌딩 옥상에서든, 오차드 로드의 넓은 인도든, 인디언 지구든, 좁은 골목이든, 뙤약볕이 내리쬐는 맹그로브 습지 앞에서든. 그는 느릿느릿 걸어가다 품 안에서 검을 꺼내듯 카메라를 든다. 때로는 손가락으로 사각의 프레임을 만들어 앵글을 만들어보고 벨벳 언더그라운드 스태프를 재빠르게 지휘한다. 반면 인물 사진을 찍을 때는 다르다. 그때는 무엇보다 자연스러운 접근이 중요하니까 말이다. 그 과정에서 스카이온 57의 셰프 저스틴 퀙(Justin Quek)과 젊은 아티스트 그룹 버티컬 서브머린(Vertical Submarine)을 촬영한 신선한 사진이 탄생한다. 허친스가 넌지시 말해준다. “그는 모델을 자연스럽게 이끌어요. 길거리에서 처음 만나는 사람도 말이에요. 대부분의 사람은 양팔에 문신을 하고 카메라를 든 김중만이 친근하게 말을 걸면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사진가와 모델 사이의 분위기가 좋아지죠.”

차이나타운, 리틀 인디아, 아랍 스트리트 그리고 통통배를 타고 들어간 풀라우 우빈까지. 마리나 베이 샌즈에서 시작한 촬영은 하루가 지날수록 싱가포르의 내면으로 들어갔다. 그 와중에 우리는 마리나 베이에서 프렌치 파인 다이닝과 스타벅스 라테를, 오차드 로드에서 맥주와 갈비를, 리틀 인디아에서 비르야니(biryani)를, 풀라우 우빈에서 코코넛 주스를 먹었다. 호텔 조식으로 간간이 덤플링과 미소 수프를 먹었다. 때로 싱가포르의 음식은 만인이 사랑할 만한 음식처럼 느껴졌다. 에메랄드 힐(Emerald Hill)의 한 바에서 이상한 비율로 제조한 칵테일을 마시고는 질색할 때도 있었지만 말이다. 촬영 마지막 날, 마리나 버라지(Marina Barrage)에서 바라본 마리나 베이는 온통 석양 빛에 물들고 있었고, 하늘에는 형이상학적 형태의 구름을 배경으로 몇 개의 연이 둥실거렸다. 모두 손에서 카메라를 놓지 않았다. 마리나 베이 샌즈의 전망대에서 수백 컷의 야경을 더 찍을 때까지.

돌이켜보면 김중만 작가는 좀 더 원시적인 느낌을 찾고 싶었던 것 같다. 아프리카 나미비아의 황무지에 외롭게 서 있는 마른 나무나 중국 윈난성의 차마고도에서 마주치는 거친 원주민처럼. 혹은 싱가포르의 현재를 아주 원초적 미래의 풍경으로 표현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정작 그는  이곳에서 자신이 원하는 무언가를 찾지 못했을 수도 있다. 싱가포르는 어디까지나 매우 체계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현대 도시국가니까. 그래도 그는 의외의 감흥을 포착한 듯하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의 첫 장면에서 주인공 릭 데커드(Rick Deckard)의 눈은 어둠 속에서 명멸하는 2019년의 로스앤젤레스 다운타운을 바라보는데, 영화 속 미래의 풍경은 무척 원시적이다. 나는 마천루 위에서 바라본 싱가포르의 야경 또한 원시적, 아니 그에 앞서 원초적이라는 생각을 아직 지울 수 없다. 원시림에서 생존하는 열대 나무 같은 고층 빌딩. 그리고 그 안에 존재하는 무수한 생명체 같은 인공의 불빛. 그것은 마치 거대한 단 하나의 생명체였다. 그가 싱가포르에서 찾은 것 또한 그렇지 않았을까? 인간의 행복으로 구축된 미래의 원시림. 한국으로 돌아와 출력한 사진을 다시 살펴보니, 김중만의 싱가포르는 그런 인상을 짙게 풍긴다. 도시국가 혹은 미래적인 그것을.

싱가포르 다운타운의 스카이라인. 촬영 기종 Canon 1Dx / 100~400mm L © 김중만 Studio Velvet Undergrou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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