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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더로드 Aug 18. 2016

울릉도 생태 여행

울릉도의 바위를 좇고 원시림을 걸었다. 훼손되지 않은 숲길 끝에는 유토피아를 찾아 해류에 몸을 싣고 섬으로 흘러 들어온 정착민의 삶이 있다.

울릉도 최북단 모퉁이를 돌면 3개의 바위섬, 삼선암이 나타난다. ⓒ 서송이

해상 기후 악화로 강릉에서 출발하는 울릉도행 선박이 결항한 직후라 안내 방송이 마음을 심란하게 한다. 겨우 배에 올랐으나 짙은 안개가 내려앉아 수평선은 흐릿하고 창문에 빗줄기가 선명하다. 화려한 아웃도어 룩을 차려입은 단체 관광객 여럿과 장비를 챙기는 구릿빛 피부의 낚시꾼, 자신의 키를 훌쩍 넘긴 배낭을 둘러멘 청년, 서울대학교 수의대 봉사단과 해군 무리도 보이지만 누구라도 뱃멀미에는 장사가 없다. 앞뒤로 울렁이는 요동에 결국 여럿이 비닐봉지를 손에 든 채 헛구역질을 해댄다. “울릉도 고개는 자물통이야. 들어가면 들어오면 나갈 줄 모르네” 하고 노래하는 울릉도 아리랑의 한 구절처럼 들어오기도 나가기도 쉽지 않은 땅이다. 그렇게 약 3시간을 달리면 저동항 여객터미널에 도착한다. 맹렬한 멀미의 열기가 사라지고 하늘을 향해 치솟은 뾰족한 암벽이 눈에 박힌다. 북위 37도 33분 1초에 동경 131도 52분 20초, 총면적 72.82제곱킬로미터의 울릉도다. 140만여 년 전 지각 작용에 의해 형성된 화산체로, 평지는 거의 없고 아찔한 비탈과 예각의 절벽이 땅의 대부분을 이루는 오각형 섬. 2,000미터 깊이의 심해에서 여러 차례 화산이 폭발해 이룬 거대한 화산암 조각 작품.


1. 구불구불한 해벽을 따라 바위를 좇아보자

울릉도에는 모래사장이 없고 바위가 파도와 바람에 깎여 만들어진 몽돌해변이 있다. ⓒ 서송이

울릉읍 저동리에서 섬목까지 해안로를 조성하는 데 약 40년이 걸렸다. 나머지 구간도 올해 안으로 공사를 마칠 거라고 하지만 알 수 없는 일이다. 저동항에서 차를 렌트해 해안길을 따라 일주로의 끝, 섬목을 향한다. “와” “와” 연신 감탄을 쏟는 풍경이 이어진다. 한 치 앞 풍경을 예측하기 어렵다. 팔뚝만 한 베개 모양의 바위로 쌓인 용암 계단을 지나면 다양한 모양의 암석 조각이 포도알처럼 알알이 박힌 암벽이 등장하고, 고개를 들면 국수가락을 닮은 주상절리가 산 중턱에 병풍을 이루고 있다. 뾰족하게 솟은 바위는 그 경사가 가파르기도 하지만 해풍에 자갈이 툭 떨어지곤 해 섬뜩하게 놀란다. 도로를 향해 온몸을 뻗은 암벽을 지날 때마다 ‘낙석 주의’ 안내판이 보인다.

용암이 분출할 때 층을 이뤄 쌓인, 영지버섯을 닮은 버섯바위. ⓒ 서송이

통구미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도로를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갈라진 듯한 침식 암석이 서 있다. 거북바위다. “거북이 육지로 들어오는 모습이에요. 자세히 들여다보면 거북 여섯 마리가 있어요.” 단체 관광객에게 설명하는 가이드의 말에 저마다 손바닥으로 바위를 새며 거북을 찾는다. 검은 바위를 딱딱 두드리자 고양이 울음소리를 내는 괭이갈매기가 푸드덕거리며 날아간다. 바위 앞 더덕 도매시장에는 주민들이 더덕에서 흙을 골라내고 다듬느라 한창이다. “울릉도 더덕은 독이 없죠. 흙만 털어내 생으로 먹어도 덜 씁쓸하고 맛있습니다. 육지 것과 달라요. 더덕주스 1잔 하고 가시오.” 통구미항에서 더덕을 판매하는 상인의 말에 따르면 울릉도 고산 지역에서 나고 자란 더덕은 알이 굵고 향이 연하다. 사람의 손을 타지 않아 독성이 없고, 부드럽고 맛이 순하다고. ‘달팽이 도로’라 불리는 수층교로 진입하기 직전에 널찍한 나무판자를 쌓아 올린 듯한 형상의 기암이 눈에 띈다. 도로 건너편에는 몽돌해변이 있고, 암벽 앞에 놓인 쉼터에 앉으면 수층교 반대편의 곰바위가 보인다. 관광 지도에는 나와 있지 않아 그저 차 안에서 보고 지나가는 곳이다. “버섯 따야 하니 각자 비닐봉지 준비하세요.” 하고 가이드가 종종 농을 던진다는데, 과연 생김새가 영락없이 영지버섯이다.

울릉도 서쪽 끝, 태하항에는 대풍감전망대로 향하는 태하향목관광 모노레일이 있다. 20인승 모노레일카 2대가 최대 39도 경사면을 약 6분간 올라간다. 짧은 산책길을 따라 10여 분 걸으면 북면의 해벽인 대풍감이 펼쳐지는 전망대에 도착한다. 거대한 풍경을 고대했다면 실망할지도 모른다. 먼 거리의 절벽이 구름에 가려 흐릿하게 보이지만, 주상절리는 선명하다. 바람을 기다리는 구덩이라는 의미처럼 옛사람들은 이곳에서 해풍을 기다리다 닻을 올리고 본토까지 항해했다. 그 닻줄을 묶던 일대의 절벽을 대풍감이라 부르는 것이다. 절벽 한 편을 둘러 나무 덱과 유리 바닥으로 조성해놓았는데, 가운데 고정 밧줄이 궁금증을 자아낸다. 이 밧줄을 잡고 암벽 아래로 내려가면 바위에 닻을 묶어 바람을 기다리는 뱃사공이 있을 것만 같다. 이곳을 기준으로 현포항과 노인봉, 송곳바위와 코끼리바위 등 북면의 대표 바위가 이어진다. 그중 가장 인상적인 풍경은 하늘을 향해 우뚝 솟은 송곳봉이다. 구름 모자 쓴 송곳봉은 육지로 나가는 마지막 날까지 그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 봉우리 주변에 구멍 5개가 선명한데, 지구가 멸망하는 날 옥황상제가 거기에 밧줄을 걸어 울릉도만 끌어 올리기 위한 용도라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해안 마을마다 바다의 신에게 제를 올리는 해신당이 있고, 암벽과 산에는 입으로 전해오는 전설과 신화가 있다. 몇 년 전 울릉도 관문인 해발 196.9미터의 가두봉을 밀어 경비행장을 구축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울릉읍과 서면의 경계에 있는 가두봉 산줄기는 섬 주민에게는 울릉도 여신의 머리에 해당하는 상징적인 곳. 공사 추진은 중단되었지만, 보존과 개발의 갈림길에 선 가두봉의 현실이 씁쓸하다.

도동항 여객터미널에서 본 행남 해안산책로. ⓒ 서송이

해안로의 끝자락에 들어서자 오가는 차량이 거의 없다. 진입로 보수 작업으로 관음로 출입이 불가능해 대부분의 차량이 길목에서 선회한다(진입로 공사는 7월 중으로 마무리된다). 섬목선착장과 내수전 일출전망대 사잇길이 개통되면 섬 전체를 돌아볼 수 있는 해안일주도로가 완성될 테다. 접근성은 높아지겠지만 이대로의 고즈넉함도 좋다. 울릉도 최북단의 모퉁이를 돌면 바닷속에 솟은 기둥 3개인 삼선암이 등장하고, 맞은편에는 울릉도에서 암질이 가장 단단한 곳이라는 장군수바위가 있다. 이곳에 울릉산악회와 암벽등반가 이성재 씨가 약 5년 전부터 개척한 루트가 20여 개 된다고. 소란스러운 새의 울음과 몸을 가누기 힘들 만큼 거센 바람이 지배하는 울릉도 북면 끝에서 비로소 해안로가 끝난다. 먼 바다의 은빛 해수면은 울릉도 주민의 표현에 따르면 ‘장판’처럼 고요하다. 울릉도 야생의 풍경은 해가 저물수록 신비로움을 더한다.


해안일주도로 내수전일출전망대 주차장에서 섬목선착장까지 약 4km 구간이 빠진 39.8km의 일주 도로. 섬목선착장에서 저동항까지 운행하는 섬목 페리호를 타고 미개통 구간을 뱃길로 갈 수 있다. 승선 요금 8,000원, 054 791 9905.


대풍감전망대(태하향목관광 모노레일) 모노레일 왕복 요금 4,000원(성인), 054 791 5334, 울릉군 서면 태하등대길 188.



2. 알봉분지의 원시림을 걷고 신령수에서 족욕을 하자

울릉도에는 2개의 분지가 있다. 알봉은 나리분지를 만든 두 번째 화산활동 시 생긴 원시림이다. ⓒ 서송이

“왜 껍데기만 보고 갈까요? 해안도로만 둘러보는 것은 울릉도를 제대로 본 것이 아니에요. 진짜 울릉도는 안에 있어요.” 지질 해설사 이소민 씨가 말한다. 울릉도 태생으로 히말라야에서 만난 남편과 프랑스로 이주해 살다가 귀향한 지 6년째. 그는 일을 하지 않을 때도 울릉도 원시림을 즐겨 걷는다. 지질학적으로 노년기에 해당하는 울릉도 숲에서 노인의 지혜를 배운다고 말하는 그를 따라 나리분지 숲길로 들어간다. 성인봉에서 발원한 물이 용출하는 신령수까지 약 2킬로미터의 산책길이다. 본래 ‘울릉(鬱陵)’이 ‘수풀이 무성한 언덕’이라는 의미라는 것이 흥미롭다. 험준한 산세로 둘러싸인 땅 한가운데 이토록 청량하고 신령스러운 숲이 있다니 감탄이 절로 난다. 안개가 자욱이 내려앉은 숲은 밀림 같은 수풀로 우거져 있는데, 영롱한 새소리만 합주하듯 사방에서 울려 퍼진다. 폭신한 붉은 땅을 밟으며 안개가 피어오르는 풍경 속으로 들어간다.


“백두산 천지 속을 걷고 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물 속을 걷는 거죠. 비나 눈이 오면 그대로 땅 밑으로 스며들어요. 산 전체가 거대한 물탱크입니다. 바위틈 사이로 물이 용출하는데, 우리는 ‘찬물내기’라고 불러요. 찬물이 나오는 곳이죠. 집집마다 물이 풍부하니 삶 자체가 윤택합니다.” 울릉도를 왜 도둑이 없는 섬이라고 하는지 이제 알겠다. 산 전체가 순한 먹거리 천지고 물이 풍부해 굶을 걱정이 없고, 연평균 13도의 해양성기후로 한겨울에도 포근하다. 용출수로 수력발전을 가동해 북면 전체에 전력을 제공한다. “엉겅퀴는 우거지 대용으로 먹고, 산딸기에는 가시가 없어 바로 따 먹어도 됩니다. 절벽에는 자연산 명이나물이 여전히 많고요.” 이소민 씨의 말처럼 길목에는 너도밤나무, 솔송나무, 섬피나무, 마가목나무, 오리나무 등이 무성하고 자연산 명이와 섬나무딸기, 섬노루귀, 엉겅퀴가 쉽게 눈에 띈다. 울타리로 보호막을 친 울릉국화, 섬백리향 군락지도 있다. 느릿느릿 30분가량 걸으니 약수터를 닮은 너른 광장이 나온다. 바로 성인봉 용출수를 샘터로 가꾼 신령수다. 과거에는 산신에게 제를 올리는 곳이었다고. 마른 목을 축이고 가로로 길게 조성한 족욕 시설에 발을 담근다. 한여름에 살짝 담그기만 해도 저릿저릿할 만큼 얼음장이다. 발의 피로를 없애기에 탁월한 마무리지만, 3초 이상 견디기가 어렵다.

나리분지는 울릉도 유일의 평지 마을로 산봉우리가 둘러싼 곳이다. ⓒ 서송이

신령수로 가는 숲길 마지막 갈림길에 투막집이 나오는데, 이곳에서 오른쪽으로 들어서면 너른 평지의 알봉 분지다. 중요민속자료로 보존하고 있는 투막집에서 울릉도 개척민의 생활양식을 조금이나마 짐작해본다. 가옥 양식은 강원도의 귀틀집과 거의 동일하나 집 안에서 모든 소일거리를 할 수 있도록 벽 바깥에 통로를 두고 ‘우데기’라고 하는 억새풀을 둘렀다. 벽과 우데기 사이 공간을 ‘쭉담’이라고 하는데, 눈이 많이 쌓인 한겨울에 통행길이 된다. 위치를 알아볼 수 있도록 입구와 지붕을 새끼줄로 연결했고, 화장실은 바깥에 두어도 외양간은 우데기 안으로 들인 것이 독특하다. 이 투막집부터 30분가량 알봉 둘레길이 이어진다. “여기는 사람들이 정말 안 다녀요. 수풀을 헤치고 숲으로 들어가면 비밀의 문을 여는 것 같죠. 신령스럽다고나 할까요? 네팔과 인도, 알프스산맥 등 여행을 많이 다녔는데, 그곳과 비교해도 매력이 넘칩니다. 독특하고 환상적이죠.” 이소민 씨는 익숙한 자태로 우거진 수풀을 헤치고 축지법을 쓰듯 빠르게 전진한다. 길이 협소하고 사방이 풀이라 그를 쫓기 쉽지 않다. 분지 끝자락에 다다르자 침식지형의 낭떠러지다. 경사면 때문에 아찔할 법도 한데, 워낙 수풀이 우거져 몸으로 느끼는 고도감은 비교적 적다. 태곳적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원시림은 살아 있는 생태의 보고다. 수백 만년간 살아남아 울릉도의 심지를 이루는 거대한 생명줄.


나리분지 숲길 성인봉 등산로에서 중턱 신령수까지, 054 790 6423, 울릉군 북면 나리길 598(나리분지관리사무소).

알봉분지 숲길 나리분지 숲길과 신령수 사이 구간 투막집 오른쪽 일대, 울릉군 북면 나리 316-1.



3. 진짜 울릉도의 삶, 깍개등으로 가자

가파른 구릉의 밭에는 농작물을 운반하기 용이하도록 모노레일을 설치했다. ⓒ 서송이

깎아지른 듯 가파른 능선이라 ‘깍개등 혹은 깍깻등, 깍새등’이라 부른다. 깍새(슴새)가 많이 서식해 붙은 이름이라고도 한다. 현재 대여섯 곳의 깍개등이 있고, 그중 저동 깍개등에는 다섯 가구가 산다. ‘울릉도 나리섬 아웃도어 다큐 페스티벌’의 기획자인 조안나 씨의 안내로 깍개등으로 가는 오솔길에 들어선다. 능선을 따라 좁고 가파른 급커브 길이 지그재그로 이어져 운전이 쉽지 않다. “어, 어, 그만 그만, 후진이요.” 커브를 돌 때마다 후진으로 방향을 바로잡기를 여러 번, 아찔한 절벽에서 심호흡이 절로 나온다. 길도 곱지 않아 울퉁불퉁 파인 길에서는 여러 번 헛바퀴가 돈다. 그야말로 울릉도에서도 오지 중의 오지다. “베테랑 택시 기사님도 깍개등은 못 간다고 해요. 차 바닥이 쓸려서 망가지고, 곡예 운전을 해야 하니까요. 운전 초보자라면 걸어 올라가는 편이 나아요.” 조안나 씨가 말한다. 이 가파른 길을 후진으로 다시 내려가는 것은 더 불가능하다. 그대로 올라가자 등뼈처럼 길게 누운 능선이 드러나고 산 너머로 동해가 보인다. 한겨울에는 1미터가 훌쩍 넘게 눈이 쌓이고 바람이 거세기 때문에 집이 땅에 달라붙은 것처럼 나지막하다.

울릉도 고지대에 자리 잡은 깍개등은 울릉도 최고의 전망대다. ⓒ 서송이

산등성이에서는 밭농사가 한창이다. 왜 이렇게 힘든 산 꼭대기에 집을 짓고 살았을까? 깍개등의 유래를 알려면 울릉도 이주 역사를 들여다봐야 한다. 울릉도 주민은 크게 정착민과 개척민으로 나뉜다. 1882년 고종이 개척령을 반포하면서 이듬해 16가구, 54명이 울릉도로 이주했다. 일종의 전입신고를 하고 이주한 사람들로 개척민에 속한다. 그 훨씬 이전부터 새로운 땅을 찾아, 혹은 전쟁을 피해 해류에 배를 맡겨 흘러 들어온 정착민이 있다. 소, 돼지, 하인을 배에 싣고 온갖 풍랑을 견디어 울릉도에 도착한 이들이 섬에 가장 먼저 세운 것이 서당이었다고. 모두 읽고 쓸 줄 아는 지식인이었다는 말이다. 천민이나 물질을 한다고 생각한 그들은 살만 한 땅을 찾아 산으로 올라갔고, 화전민처럼 산을 태워 밭을 일구어 살았다. 다른 해석도 있다. 한때 울릉도에는 일본인이 2,000여 명 거주했다. 전쟁이 끝난 후 한국인과 결혼 등의 이유로 울릉도에 남은 이들이 깍개등처럼 오지로 숨어 들어 일본인이라는 신분을 숨기고 살았다는 것. 울릉도의 험준한 지형이 만든 독특한 역사다.

바다가 좋아 16년 전 육지에서 깍개등으로 이주한 서울농원의 김등환 할아버지. ⓒ 서송이

깍개등에서 농사를 짓고 사는 서울농원의 김등환 할아버지는 이곳이 좋아서 정착한 경우다. “내가 충북 진천에서 태어났어. 거기는 바다가 없어. 어릴 때 본 기억도 없고. 내가 바다 보려고 해군도 들어갔잖아. 인생 말년에는 섬에 살고 싶었지. 여긴 항시 바다를 볼 수 있잖아. 내가 그런 낭만이 있어. 바람 불어 지붕이 다 날라간 적도 있는데, 그래도 여기가 참 예뻐.” 그의 말처럼 깍개등은 울릉도 최고의 전망대다. 저동 마을, 깍개등의 밭과 동해까지 한눈에 펼쳐진다. 구릉에 일군 밭에는 지그재그 형태의 모노레일이 설치되어 있는데, 가파른 밭을 이동하고 농작물을 운반하기 위한 깍개등만의 풍경이다. 김등환 할아버지가 손수 만들었다는 모노레일을 타고 밭으로 간다. 짐칸 바닥은 녹이 슬어 구멍 너머 바닥이 그대로 드러난다. 엉거주춤 앉아 자리를 잡았는데, 흔들림이 적고 안전한 느낌이다. 모노레일이 우렁찬 모터 소리를 내며 밀림 같은 밭으로 들어간다. 트레일 주변 마구잡이로 난 긴 잡초 줄기에 정강이가 쓸린다. “여기서부턴 못 들어가. 어제 비가 많이 와서 물이 잠겼어. 오늘 같은 날은 농사 못해.” 약 1만6,000제곱미터의 밭을 소유하고 있는 할아버지는 이주 직후엔 헛개나무를 심었고, 지금은 명이나물, 참고비, 부지갱이(섬쑥부쟁이), 감자, 도라지 등 여러 작물을 골고루 재배한다. “내 먹을 것 먹고, 남으면 팔기도 하고 그래.” 하고 투박하게 웃는 모습이 여유롭다.

모노레일을 타고 김등환 할아버지의 밭으로 가는 길. ⓒ 서송이

깍개등에 살았던 이들이 외롭고 가난한 삶을 살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겨울에는 얼음을 녹여 식수로 사용했고, 땅에 심은 식자재로 사계절 충만하게 살았다. 고립되었을지언정 배고프진 않았으리라. 울릉도에는 깍개등처럼 지형에서 유래한 마을 이름이 흔하다. 서면 남양(南陽)은 울릉도에서 가장 햇볕이 잘 들어오는 곳이고, 북면 천부리에 있는 백운동(白雲洞)은 언제나 구름으로 뒤덮인 고산 마을이다. 통구미 마을 앞에는 ‘줄맨등(혹은 줄맨당)’ 이라 부르는 곳이 있다. 경사가 심해 고정 로프를 매달아 오르내리며 다녔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다. 바다가 가물가물 보이는 가물개(감을계)도 있다. 그곳에 있는 선하신당에서는 여전히 매년 삼짇날 풍년과 풍어를 기원하는 제를 올린다.


저동 깍개등 저동리 공주상회 혹은 신용슈퍼 골목으로 진입해 서울농원(울릉군 울릉읍 저동3길 348)까지 올라간다. 신용슈퍼길의 도로가 비교적 넓은 편이지만 공사가 잦으니 주의해야 한다. 되도록이면 사륜구동 차량을 이용하자.



4. 산에서 나고 자란 채소를 느릿느릿 먹고 쉬자

삼나물. 수확철을 맞아 알이 굵게 오른 울릉홍감자. ⓒ 서송이

“울릉도에서는 마음을 비워야 원하는 것을 얻어요. 마음 졸인다고 배가 뜨나?” 저동항에 도착한 첫날 애꿎은 날씨에 투덜대자 이소민 해설사가 말했다. 마음을 비운 덕분일까? 울릉도의 마지막 날, 나리분지 하늘은 눈부실 만큼 청명하고 높았다. 동서 1.5킬로미터, 남북 2킬로미터에 달하는 평지 분화구 안에는 선명한 초록의 밭이 빼곡하고, 밭을 둘러싼 봉우리까지 무엇에 걸리는 것 없이 한눈에 들어온다. 안개 속 분지 숲길을 걸을 때와는 또 다른 풍경이다. 이곳에서 자란 섬말나리를 비롯해 울릉홍감자, 토종옥수수, 섬엉겅퀴, 참고비, 두메부추, 삼나물, 명이나물, 부지갱이 등이 개척민의 든든한 먹거리가 되어주었다. 울릉도 토박이인 한귀숙 씨는 나리분지에 밭을 일구고 산채 음식을 내는 산마을식당을 운영한다. 이탈리아에서 시작한 슬로푸드협회의 회원으로, 울릉도 고유 종자 지킴이 역할을 한다.

수확한 두메부추를 들고 있는 한귀숙 씨. ⓒ 서송이

홍감자철을 맞아 한귀숙 씨가 투막집 옆 홍감자밭으로 안내한다. 올해 첫 수확이다. “을매나 굵었나 봐야제. 어머나 여봐라, 크다. 이만큼 열매 맺어 참으로 고맙네. 애지중지 키웠제. 7월 중순 좀 지나면 더 굵제. 서리만 없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이 흙이 양토라. 물 빠짐이 좋아요. 나뭇잎 피는 시기에 맞춰 파종했는데 잘됐네. 홍감자가 전분이 많고 맛이 참 좋아.” 그가 땅을 호미로 쓱쓱 밀어내자 흙이 곱게 부서지고 주먹만 한 붉은 감자가 튀어나온다. “어릴 때 요거 먹고 컸제. 밥 해먹고, 쪄 먹고, 인절미 해 먹어요. 여기 쌀이 귀하잖아. 푸른 감자는 싹이 날 때 가장 차지거든. 그때 껍질 벗겨놨다가 인절미 만들어 먹어. 소화도 잘돼요.” 울릉홍감자는 쌀을 대신해 끼니를 하던 토종 먹거리다. 알이 굵은 것도 있지만, 일반 감자에 비하면 크기가 작다. 울릉도 주민은 매년 5~6월경 울릉 홍감자로 전분을 만들어 저장해 두고 여러 음식을 만들때 쓴다.

멸종 위기에 놓인 울릉도 토종 식물 섬말나리와 참고비, 삼나물. ⓒ 서송이

홍감자만큼 생경한 것은 섬말나리다. 한귀숙 씨가 길고 굵은 섬말나리 줄기를 천천히 잡아 올린다. 생김새는 마늘과 흡사한데, 꽃잎처럼 뿌리껍질이 여러 갈래로 벗겨지고 양쪽 끝으로 난 뿌리가 마치 얼굴에 난 수염과 머리카락을 닮았다. “섬말나리 처음 봤지요? 우리 동네에 많이 나요. 먹을 것 없을 때 이거 먹고 연명했지. 지금은 하도 캐 먹어서 씨가 없어.” 멸종 위기에 놓인 섬말나리는 울릉도 고유 특산물로 세계적으로도 희귀하다. 성인봉 일대 해발 400미터 이상의 고지대에 군락을 이루고 그늘진 숲의 경사면에 자란다. 그녀는 전통 음식을 복원하기 위해 섬말나리를 심는다. 어린순을 넣어 산채비빔밥을 요리하거나 두메부추와 범벅을 해 먹는다. ‘하늘의 파’라 불리는 두메부추는 성인봉이나 통구미 마을 절벽 등지에서 자란다. 일반 부추에 비해 칼륨과 칼슘 함유량이 높다. 그녀가 호미 대신 칼을 들어 두메부추 줄기를 친다. 굵고 널찍한 줄기를 자르니 투명한 진액이 나온다. “이거 좀 먹어보소. 꼭 알로에 같제.” 그녀의 말처럼 끈적끈적한 즙이 미니 알로에를 떠올리게 한다. 두메부추는 생채를 갈아 김치 양념으로 쓰거나 장아찌로 만들어 먹는다.

울릉도 토종 나물로 상차림한 산채 정식. ⓒ 서송이

나리분지에서는 울릉도에서만 나는 고유 나물이 들어간 산채비빔밥을 반드시 먹어야 한다. 한귀숙 씨가 운영하는 산마을식당에서 울릉 산채 정식을 먹어본다. 산채비빔밥과 함께 삼나물(눈개승마), 참고비(섬고사리), 취나물, 명이나물, 미역 등이 한상 가득 올라온다. 귀하고 건강한 자연 밥상이다. 특히 삼나물은 고기 식감과 비슷해 ‘고기 나물’이라고도 불리는데, 인삼처럼 사포닌이 풍부해 따로 음식으로 주문해야 할 만큼 값비싸다. 울릉도 먹거리는 해양성기후와 비옥한 토양이 만든 자연의 고마운 선물이나 다름없다. 그러니 보약을 먹듯 느릿느릿 씹고 먹고 즐겨야 한다. 그 안에는 섬 토박이가 지켜온 진짜 울릉도가 있으니.


나리분지 054 790 6423, 울릉군 북면 나리길 598. 
산마을식당 산채비빔밥 1만 원, 산채 정식 2만 원, 삼나물회 2만 원, 054 791 4643, 울릉군 북면 나리 13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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