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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더로드 Sep 21. 2016

전주의 장인들

The Masters in Jeonju


최근 론리플래닛이 선정한 ‘2016 아시아 최고의 여행지’ 3위에 전주가 오른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전주 한옥마을을 찾는 연간 방문객 수는 이미 약 1,000만 명(2015년 전주시 빅 데이터 분석 기준). 고즈넉한 한옥마을의 정취와 다채로운 미식 문화 그리고 흥미로운 축제를 찾아 수많은 국내외 여행자가 전주의 구석구석을 분주하게 누빈다. 반면, 오랜 세월 이 도시를 지탱해온 뿌리 깊은 전통문화는 서서히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멀어져 가고 있다.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전주의 수많은 무형문화재 명인과 장인은 자신이 갈고 닦은 길을 묵묵히 걸으며 앞날을 모색하는 중이다. 풍요로운 전통문화를 일군 전주의 장인을 만나 이 도시가 지켜온 진정한 가치를 발견해보자.



판소리, 왕기석 명창

전주대사습놀이 장원 출신인 왕기석 명창은 전주에서 열리는 여러 마당창극에 참여하며 판소리의 대중화에 앞장서고 있다. ⓒ 김경수

101명의 걸그룹 연습생과 할머니 래퍼의 등장. 서바이벌 오디션은 분야와 장르를 불문하고 끝없이 진화하고 있다. 드라마틱하고 험난한 예선 과정을 거쳐야 하지만, 무명의 신인은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알릴 수 있는 기회의 장을 놓칠 수 없다. 전주에는 수백 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하는 서바이벌 오디션이 존재해왔다. 조선 숙종 때 시작했다가 일제강점기 때 잠시 맥이 끊겼고, 이를 되살려 지난 1975년부터 매년 동짓달마다 행해온 대사습놀이. 판소리 명창, 한국무용, 기악, 민요 등 각 지역의 빼어난 국악 실력자가 모이는 이 대회는 조선 최고의 예인이 되기 위해 거쳐야 하는 등용문으로 통했다. 그중 최고의 소리꾼을 가리는 판소리 대회는 대사습놀이의 하이라이트와 같다. 17세기부터 전라도와 충청도, 경기도 일부 지역에서 전수되어온 판소리는 소리꾼과 고수가 짝을 이뤄 부조리한 사회의 모순을 읊조리는 일종의 종합예술이다.


판소리에 관한 전주의 애정은 매년 가을에 열리는 전주세계소리축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영국의 월드 뮤직 전문지 <송라인스(Songlines)>가 매년 발표하는 ‘국제 음악 페스티벌 베스트 25’에 4년 연속 선정된 전주세계소리축제는 판소리를 비롯해 국악에 월드 뮤직을 가미해 참신한 무대를 선보인다. 물론 소리축제가 열릴 때가 아니더라도 전주에서 판소리를 접할 기회는 무수히 많다. 우선 한옥마을 북동쪽에 있는 소리문화관 야외무대로 향해보자. 마당창극 등 현대적 요소를 접목한 다양한 판소리 공연이 연중 열린다.

“현재 전주는 국악의 수도라 할 수 있어요. 남원, 고창, 광주 등 각지에도 판소리를 하는 이들이 남아 있지만, 전주 한옥마을만큼 쉽게 소리를 접할 만한 곳은 드물죠.” 소리문화관에서 반갑게 맞아주는 이는 제31회 대사습놀이 판소리 부문 장원에 오른 왕기석 명창. 그는 형 왕기철 명창의 영향을 받아 1980년 처음으로 판소리에 입문했다. 대사습놀이를 포함해 전국의 주요 판소리 대회를 휩쓸며 명창의 반열에 오른 그는 여전히 무대 위에서 열정적으로 에너지를 쏟는 중이다. 5년 전 판소리와 마당창극을 위한 전용 야외 극장, 소리문화관을 개관할 때에는 무대 설계에 적극적으로 관여했다고. 이후 이곳에서 열리는 판소리 특별 공연과 현대적인 스토리로 재해석한 마당창극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판소리는 크게 다섯 바탕으로 이뤄지죠. 이를 보존하고 계승하는 것은 소리꾼의 당연한 의무예요. 하지만 지금 시대와 잘 어울리는 소리가 무엇인지도 끊임없는 고민해야 하죠. 바로 전주처럼요.” 그의 말대로 전주시는 <비빔밥전> <전주 판소리> 등 관객이 보다 편안하게 볼 수 있도록 짧은 호흡의 마당창극을 적극적으로 개발해 일반인에게 선보이고 있다. “관객에게 판소리의 묘미를 제대로 알려주고 싶어요. 그래서 판소리의 하이라이트인 눈대목을 골라 짧게 구성한 마당창극을 기획했죠.” 춘향가, 흥보가, 심청가, 수궁가, 적벽가의 눈대목으로 이루어진 <판소리 다섯바탕 오마주>는 인파로 분주한 한옥마을에서 옛 풍류의 정취를 누리게 해준다. 이몽룡이 남원으로 돌아오는 도중 방자와 만나는 장면을 묘사한 춘향가의 ‘박석고개’는 신선하다. 우리에게 익숙한 내용으로 구성한 마당창극은 익살스러운 광대의 퍼포먼스와 빠른 템포의 연주 그리고 왕기석 명창의 카리스마 넘치는 소리가 어우러지며 단숨에 좌중을 휘어잡는다.


소리문화관
연중 기획 공연 <소리, 꽃이 되다>를 매주 오후 4시(일·월요일 제외)에 열고, 10월 7일까지 목·금요일 저녁 8시에 마당창극, 한국무용, 뮤지컬, 연극 등 상설 공연을 펼친다. 공연 1만 원, sori.jjcf.or.kr


지우산, 윤규상 명인

시대의 변화와 함께 명맥이 끊긴 전통 지우산을 독자적인 노력으로 되살린 윤규상 명인. ⓒ 김경수

덕진구 인후동의 평범한 단독주택. 이곳 2층은 우리나라 유일의 우산장으로 불리는 윤규상 명인이 매일같이 공들여 우산을 만드는 작업장이다. 인후동과 멀지 않은 인근의 우아동 일대는 과거 장재마을이라 불렸다. 1950년대 이 마을의 약 20가구에서 종이로 만드는 지우산 가내수공업이 성황을 이뤘고, 윤규상 명인은 열일곱 살 때 그곳에서 우산 만드는 일을 처음 배웠다고 한다. “그야말로 호시절이었어요. 여름 장마철마다 우산을 쌓아놓고 팔았으니까요.” 1960년대 후반 비닐 우산이 개발된 이후 지금의 인후동으로 터를 옮겨 독립한 그는 자연스럽게 재료를 바꿔 작업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1980년대 협립 우산 등 천 우산을 대량생산하는 공장이 등장하면서 우산 가내수공업은 사양길로 접어든다.


“당시 더 이상 우산을 만들 수 없겠구나 싶었어요. 그래도 손재주가 있으니 대바늘, 바늘대 등 소소한 물건을 만들며 생활을 이어갔죠.” 우산과 동떨어진 삶을 살게 된 윤규상 명인은 2000년대 들어 과거 지우산을 만들던 기억을 더듬어 독자적으로 우산 꼭지 개발에 골몰했다. 그리고 마침내 직접 우산 꼭지를 깎는 기계를 발명하기에 이른다. 혼자의 힘으로 명맥이 끊긴 전통 지우산을 부활시킨 셈. 지우산을 만드는 공정에는 오랜 시간과 정성이 필요하다. 우선 담양의 3년산 대나무를 사용해 살대를 일일이 가공한다. 살과 살 사이를 닥나무로 만든 한지로 덮고, 우산 꼭지에 살을 연결해 실을 감아 기본 골격을 마무리한다. 여기에 방앗간에서 짠 들기름을 바르고 말리는 작업을 마치면 지우산이 완성된다. 보통 지우산 20개를 동시에 만들며, 이를 모두 완성하는 데 보름 이상 걸리니 하루에 1개꼴로 생산한다고 볼 수 있겠다.

과거 전주에서 지우산 가내수공업이 성행하고, 오늘날 윤규상 명인에 의해 부활할 수 있게 된 이유는 바로 질 좋은 전주 한지 덕분이다. “임실의 한지장 홍춘수 명인이 만든 한지를 사용한 적도 있어요. 하지만 보통은 전주의 고궁한지를 주재료로 사용하죠. 여느 종이보다 품질이 균일하거든요.” 단아한 색상의 전주 한지로 완성한 지우산은 화려한 문양은 없지만 하나의 예술 작품처럼 우아한 자태를 뽐낸다.


“지우산은 선이 무척 고와요. 지금은 그저 전통 공예로 맥을 이어가고 있지만, 보다 많은 사람이 전통 우산의 진가를 알아보는 날이 오기를 바랄 뿐이죠. 이는 바로 제 아들의 몫이에요.” 그의 아들 윤성호 씨는 안정적인 직장을 포기하고 아버지의 길을 묵묵히 뒤따르고 있다. “한옥마을을 거닐다 보면 이따금 한복을 차려입고 전통 우산을 쓴 여행자를 볼 때가 있어요. 하지만 이는 모두 중국산 제품이죠. 훗날 많은 이가 우리의 전통 지우산을 들고 한옥마을을 산책하는 날이 왔으면 해요.” 윤성호 씨가 말한다. 그의 소망은 국내 유일의 우산장이 계속 명맥을 이어가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실현되어야 할 과제다.


작업실 한쪽 테이블에 파라솔처럼 세워져 있는 거대한 지우산이 눈길을 끈다. 이는 문화유산을 보존하는 모임 예올과 함께 실용성을 고민한 결과물이다. 물론 전통 지우산의 형태는 그대로 간직한 채 크기를 키웠다. “재료나 형태를 바꾸면 보다 실용적이건 분명한 사실이죠. 하지만 전통을 이어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실생활의 연결 고리를 찾는 것은 그 안에서  고민해야 할 문제죠.” 수십 년을 돌고 돌아 우산장으로 우뚝 선 윤규상 명인은 이제 든든하게 대를 이을 준비를 마친 듯하다.


윤규상 명인의 지우산을 구입하거나 구경하고 싶다면 개별적으로 작업실을 찾아야 한다. 올 하반기 중 홍보와 판매를 위한 웹사이트를 오픈할 예정이다. 010 5604 8742, 전북 전주시 덕진구 반태산3길 29.


이강주, 조정형 명인

한평생 전통주에 천착한 조정형 명인은 이제 다음 세대를 위한 이강주를 준비하는 중이다. ⓒ 김경수

마이크로브루어리를 넘어 이제는 홈 브루잉 시대다. 직접 홉을 넣어 끓이고, 숙성 과정을 연구하며 에일 맥주를 만드는 이가 있는가 하면, 다른 누군가는 누룩을 발효시켜 막걸리 등 전통주를 손수 빚는다. 사실 이런 홈 브루잉 문화는 우리 나라 전통의 일부였다. 각 가정에서 술을 빚는 가양주(家釀酒)로 말이다. 조선 시대에 이르러 지역의 명문가는 제사와 차례를 위해 집안 대대로 전수되어온 술을 정성껏 만들었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에 주세를 부과하기 시작하면서 가양주는 순식간에 몰락하고 만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개최하면서 정부 차원에서 대대적으로 전통주를 되살리기 위한 움직임이 일어났다. 당시 안동소주, 문배주, 이강주가 최초의 민속주로 선정되며 가양주의 부활을 알렸다. 그중 전주의 이강주(梨薑酒)는 최남선 시인이 <조선상식문답>에서 평양의 감홍로(甘紅露), 전라도의 죽력고(竹瀝膏)와 함께 조선의 3대 명주라 치켜세운 최고의 전통 소주다.


“6대조 선친이 완주 부사를 지냈어요. 당시 저희 집안에선 수많은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이강주의 전신 격인 이강고(梨薑膏)를 빚었죠.” 대를 이어 오늘날 전주 이강주를 복원한 조정형 명인은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방문객을 맞이한다. 이름 그대로 배(梨)와 생강(薑)의 즙을 꿀과 섞어 소줏고리에 중탕하는 이강주는 입안을 맴도는 달콤 쌉싸름한 향이 특징이다. 조정형 명인은 이강주를 되살리기 전까지 주류 회사에서 20년 넘게 근무했다. 그러다가 불쑥 회사를 관두고 우리나라의 술을 제대로 체험하기 위해 2년간 전국을 유랑했다. 대학교 농화학과에서 발효학을 공부한 것까지 포함해 한평생을 술과 함께 살아온 셈이다. 그런 파란만장한 이력은 집안 대대로 이어져 온 이강주를 복원하는 데 큰 보탬이 됐다.

물론 연간 80톤을 생산하는 오늘날의 이강주는 가양주라 부르기엔 규모가 제법 크다. 전주에 있는 제1공장에서는 오로지 이강주 생산에 집중하고, 완주의 외딴 산골짜기에 세운 제2공장에선 이강주의 미래를 모색하는 중이다. “제2공장에서는 이강주에 오디를 가미한 이강 브랜디와 와인, 가루 술 등을 연구하고 생산하죠. 또 이강주 박물관을 함께 운영해 방문객이 둘러볼 수 있도록 했어요.” 제2공장의 박물관에는 이제껏 그와 그의 집안이 대대로 모아온 술잔과 기구, 술병, 소품 등 술과 관련한 1,300여 개의 물품이 빼곡하게 진열되어 있다. 벽에 걸린 그의 선친이 남긴 문장도 눈에 띈다. ‘주불강권 객불고사(主不强勸 客不固辭)’. “주인은 너무 권하지 말고, 객은 너무 사양하지 말라. 이는 바로 우리 전통 술 문화였지요.” 조정형 명인이 명쾌하게 문장을 풀어낸다.


“기회가 되면 한번 이강주와 맥주를 섞어서‘이맥’으로 만들어 마셔봐요. 놀라울 정도로 맛이 부드럽죠.” 조선 고종 때 한미통상회담의 대표주로 올랐다거나 조선 상류층이 즐겨 마셨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이강주를 가볍게 즐겨보라고 권하는 조정형 명인이 공장의 바깥 공간으로 안내한다. 거대한 스테인리스 탱크에서는 이강 브랜디를 숙성시키고, 주변의 빈 공터 아래로 저장 탱크를 묻어뒀다. “이강주로 만든 브랜디를 땅속 깊숙이 묻어 숙성시키고 있어요. 맛의 변질을 막기 위해 살균 대신 숙성을 택한 거죠. 또 매년 시음하면서 맛의 변화를 꼼꼼하게 분석하는 중입니다.” 그가 한평생 술에 바친 애정과 호기심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이강주 제2공장
063 243 5768, 전북 완주군 신지송광로 619-12.


비빔밥, 김년임 명인

질 좋은 지역 식자재를 기본 바탕으로 아름답게 만들어내는 전주비빔밥에는 김년임 명인의 자부심이 담겨 있다. ⓒ 김경수

완산구 경원동에 있는 가족회관은 전주 현지인이라면 한결같이 자부심을 갖는 곳이다. 여기엔 전주 최초의 음식 명인이자 대한민국 식품 명인으로 선정된 김년임 명인의 이름값이 한몫했다. 그녀는 과거 관사에서 음식을 만들던 어머니의 손맛을 이어받아 1970년대 옛 공보관 건물 2층에 가족회관 문을 열었다.


김년임 명인이 전주비빔밥을 시작한 계기는 명료하다. “저는 참 복을 받았다고 생각해요. 전주에는 호남평야의 우수한 쌀이 지척에 널려 있죠. 게다가 인근 산야에는 두릅, 더덕 등 질 좋은 식자재 천지예요.” 황포묵, 육회, 산나물 등 형형색색의 서른 가지 이상 고명이 올라간 가족회관의 비빔밥은 40여 년간 같은 맛과 모양을 유지하고 있다. 밥은 사골 육수로 짓는데, 이는 쌀알을 코팅하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수십 가지의 나물과 밥을 비빌 때 서로 엉키지 않게 하기 위한 묘수다. “비빔밥은 식자재와 식감 모두 중요해요. 하지만 무엇보다도 시각적으로 훌륭한 음식이어야 하죠. 전 비단 베틀을 짠다는 생각으로 재료 선택에 많은 공을 들여요. 곱게 만든 비빔밥 한 그릇에는 온갖 정성과 지식이 담겨 있는 셈이죠.” 황동빛이 감도는 놋그릇은 무형무화재 김선익 명인이 제작한 것이다. 놋그릇은 시각적으로 멋스럽기도 하거니와 채소나 고기가 쉽게 상하지 않도록 세균을 잡아주는 역할도 한다.

가족회관은 하루에 최대 1,500그릇의 비빔밥을 준비한다. ⓒ 김경수

가족회관은 개업 초기부터 오픈형 주방으로 운영했다. “처음에는 손님들이 주방 직원이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것을 낯설어했어요. 하지만 손님이 조리 과정을 직접 지켜볼 수 있는 것은 중요한 일이라 생각했죠.” 스무 명 남짓한 주방과 홀의 직원은 이른 아침부터 일사불란하게 손님맞이에 나선다. 식당의 문을 열고 사람들이 물밀듯이 들어오자, 차곡차곡 쌓여 있는 놋그릇에 곱디고운 비빔밥을 척척 담아낸다.


김년임 명인은 여전히 매일 아침 가족회관으로 출근하지만 현재 이곳의 실질적인 운영자는 딸 양미 씨다. 그녀는 전주비빔밥이 나아갈 길을 모색하고 연구하는 데에 몰두하고 있다. 한국전통문화관에 뷔페형 비빔밥 레스토랑 부•×쩜 운영하는가 하면, 최근 한옥마을에 테이크 아웃 비빔밥을 선보이는 믹스밥도 열었다. “전주비빔밥은 우리나라 사람뿐 아니라 많은 외국인에게도 익숙한 음식이 됐지요. 이제는 세계 어느 곳에서든 응용 가능한 비빔밥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시기인 것 같아요.” 가족회관이 지켜온 전주비빔밥의 영역은 그렇게 대를 이어 한 단계 더 진화하는 중이다.


가족회관 전주비빔밥 1만2,000원, jeonjubibimba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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