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낭만은 해변에 있다. 인도양 끝자락의 섬 스리랑카 남서부에서 만나는 네 가지 해변 풍경.
사실 스리랑카의 공식 수도는 콜롬보가 아니다(콜롬보 남동쪽 인근 스리자야와르데네푸라코테(Sri Jayewardenepura Kotte)라는 긴 이름의 도시다). 그렇다고 뭐가 달라지겠는가? 스리랑카 제1의 도시이자 이미 5세기부터 동서양을 잇는 주요 무역항이던 콜롬보인데. 이 도시의 해변은 마천루와 자연스럽게 공존한다. 해안에서 1블록 거리에는 넓은 갈레 로드(Galle Road)와 오래된 철길이 나란히 뻗어 있다. 사람들은 짬이 나면 도심 앞 해변으로 나가 산책을 하고, 벤치에 늘어져 있거나 노점상에서 간식을 사 먹곤 한다.
툭툭 뒷자리에 몸을 싣고 후덥지근한 바닷바람을 가르며 조잡한 상점과 사무용 건물 사이를 달린다. 이윽고 멈춰선 곳은 갈레 로드 한복판. 눈부신 햇살 아래 새파란 간판에는 핑크색 아이스크림콘이 그려져 있고, 그 위에는 ‘Carnival’이라는 필기체 문구가 새겨 있다. 1983년 문을 연 카니발은 콜롬보 사람이면 누구나 아는 아이스크림 가게다. 높은 천장과 어둑한 목조 계단, 고풍스러운 타일 바닥이며 둥근 모서리마다 ‘Carnival’ 로고를 그려 넣은 테이블에서 키치한 분위기가 풍긴다. 카운터에서 주문한 후 안쪽의 아이스크림 쇼케이스에서 원하는 맛을 고르면 된다. 카운터 뒤에 서 있는 점원 자얀타(Jayantha)는 알록달록한 사리를 걸친 손님 몇 명과 친근하게 수다를 떤다. 그녀는 이곳에서 일한 지 자그마치 20년이 넘었다. “가게 뒤편의 작은 공장에서 아이스크림을 만들어요. 우리 가게가 특별한 건 채식 아이스크림을 만든다는 점이에요. 거의 모든 재료를 이탈리아에서 수입하죠. 현지인에게는 바나나보트와 고소하고 달콤한 너트 크래커 아이스크림이 인기 있어요.” 알록달록한 아이스크림 쇼케이스 앞에서 시선이 바빠지는 건 만국 공통일 것이다. 고심 끝에 고른 상앗빛 라임 맛 아이스크림을 한 입 베어 물자 몇십 년 전으로 돌아간 듯 인공 과일 향과 달착지근한 맛이 난다. 통유리창으로 햇살이 가득 쏟아져 들어오는 가게 안에 아바(Abba)의 ‘I do I do I do I do I do’가 흘러나오고, 마주앉은 가족과 연인의 얼굴은 행복으로 빛난다.
북쪽 해안가 포트(Fort) 지구의 분위기는 한층 예스럽다. 영국 식민지 시절의 거대한 아케이드 건물, 새하얀 콜롬보 등대, 대통령 궁 그리고 유서 깊은 호텔들. 그중 1곳인 더 킹스버리(The Kingsbury)의 스카이라운지(Sky Lounge)는 콜롬보에서 트렌디한 루프톱 바를 꼽을 때 꼭 빠지지 않는다. 꼭대기 층에 도착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감탄사가 흘러나온다. 라운지 한복판을 차지한 새하얗고 둥근 바는 마치 우주선처럼 보인다. 우아하게 차려입고 대화를 나누는 손님은 얼핏 크루즈에 앉아있는 듯하다. 인도양 위에서 드는 첫 잔은 시그너처 칵테일인 킹 코코넛 리프레셔(King Coconut Refresher)가 제격이겠다. 스리랑카에서 흔한 음료인 킹 코코넛 워터에 라즈베리 보드카와 박하잎, 딸기 과육을 첨가한 것이다. 이국적이고 새콤달콤한 과일 향의 여운이 입안에 감돌 무렵, 인도양의 노을이 지기 시작한다. 칵테일의 체릿빛과는 다른, 콜롬보의 추억 같은 붉은빛이 몇 분간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물들인다.
스카이라운지 칵테일 950스리랑카루피부터, 5:30pm~4am, thekingsburyhotel.com
카니발 아이스크림 아이스크림 1스쿠프 95스리랑카루피부터, 10am~11pm, facebook.com/Carnival-Ice-Cream-1427756857536624/
배가 벤토타 강가(Bentota Ganga)의 고요한 수면 위를 미끄러져 간다. 선미에서 선장 릴 코랄라지(Leel Koralage)가 두 눈을 가늘게 뜬 채 강 저편을 바라본다. 길이 48킬로미터 남짓한 작은 강은 울창한 망고나무 숲 사이를 흘러가 금방 인도양에 닿을 것이다. 땅거미가 내릴 무렵, 자연의 정적을 깨는 것은 나지막한 배의 엔진 소리와 새소리뿐이다. 코랄라지는 스리랑카 해군에서 22년간 복무한 후 막 은퇴했다. “스리랑카 해군의 역사는 트링코말리(Trincomalee)에서 시작했어요. 스리랑카에서 가장 아름다운 바다가 있는 곳이죠. 완전히 새파란 바다요.” 스리랑카, 인도, 파키스탄 등지의 바다 위를 떠돌던 그는 이제 벤토타 강가의 보트 호텔 야트라 바이 제트윙(Yathra by Jetwing)에서 선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이따금 수상스키를 타는 이와 현지인을 실은 조각배가 배 옆을 지나간다.
벤토타는 은퇴 후 느긋한 삶을 보내기에 나쁘지 않은 듯하다. 콜롬보에서 차로 2시간 정도 걸리는 작은 해안 도시로 광활한 금빛 해변, 수상 스포츠를 즐기기 좋은 라군과 강으로 인기를 얻고 있다. 지푸라기로 지붕을 엮은 전통 목조선 야트라 바이 제트윙은 스리랑카 최초의 보트 호텔이다. 야외 덱과 부엌, 객실 2개로만 이뤄진 아담한 규모로, 2명의 버틀러와 셰프, 전기 기술자가 상시 대기하며 프라이빗 서비스를 제공한다. 이곳에선 배에 머물며 리버 사파리와 고래 관찰, 악어 사냥 등의 액티비티를 즐길 수 있다. 코랄라지가 저 멀리 망고나무 숲 사이에서 독수리와 암꿩, 원숭이를 차례로 가리킨다. 눈을 부릅뜨고 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쪽을 두리번거리다가 이내 탄성을 지른다. “우리 모두가 강을 존중해요. 이곳은 해 질 때 가장 아름답죠.” 어느덧 어둑한 붉은빛 노을이 강을 물들이고 숲과 독수리와 원숭이 등 온갖 생물은 검은 그림자 속에 숨어버린다. 배가 강 어귀에 정박하자 이미 사위는 어둑해져 있다. “20분 만 있으면 야외 덱에 놓인 테이블에 저녁 식사가 준비될 거예요.” 코랄라지가 미소를 짓고는 사라진다. 전통 스리랑카식 저녁 식사를 기다리며 휘장을 친 침대에 늘어져 있자니, 창밖으로 강 저편에서 멱을 감는 마을 아이들이 보인다.
야트라 바이 제트윙 250달러부터, jetwinghotels.com/yathra
갈레 성곽(Galle Fort)에 부딪치는 파도가 사파이어처럼 파랗게 반짝인다. 찬란한 햇살 아래서 여행자들은 땀을 뻘뻘 흘리며 셔터를 누르고, 잡상인들은 나무 그늘에서 호객 행위를 한다. 한때 보석과 향신료 교역으로 번성하던 고대 항구도시 갈레는 스리랑카의 남서쪽 귀퉁이에 자리한다. 아담한 곶의 해안선을 따라 뻗은 성곽은 갈레의 상징이다. 16세기 포르투갈 식민 시대에 처음 세웠고, 뒤이어 스리랑카를 점령한 17세기 네덜란드 세력이 확장했다. 2004년 인도양 일대를 휩쓴 지진 해일로 스리랑카 남서부와 갈레 신시가 또한 상당한 피해를 봤지만, 튼튼한 성곽 덕분에 갈레 구시가는 무사히 살아남았다. 한 상인이 바구니에서 녹슬고 닳아빠진 동전을 꺼내 보인다. 크기와 모양이 다른 동전에 상형문자 같은 글씨와 정체 모를 인물 초상이 새겨 있다. 상인은 갈레 앞바다에 잠긴 난파선에 직접 잠수해 건진 것이라며 값을 4만~5만 원이나 부른다.
갈레는 지나간 영광의 추억으로 살아가는 늘그막 영웅 같다. 성곽 안에는 비좁은 골목이 얽혀있고, 네덜란드와 영국 식민지 시절 건물이 옹기종기 늘어서 있다. 그중 상당수의 건물이 부티크 숍, 게스트하우스, 카페로 운영중이다. 네덜란드 양식의 주택에 자리한 히스토리컬 맨션(Historical Mansion)은 개인 소장품을 전시한 박물관. 1747년에 제작한 시계를 걸어놓은 기둥 너머로 들어가면, 사방에 잡동사니가 아무렇게나 쌓여 있어 마치 할아버지 집에 놀러 온 듯한 분위기다. 알록달록한 스리랑카 전도, 시계나 축음기, 녹슨 타자기 같은 골동품, 몇백 년 전 도시 풍경이나 표범 따위를 그린 액자…. 그중 대부분에 가격표가 붙어 있으니 골동품 애호가라면 눈에 불을 켜고 뒤져보자.
새하얀 갈레 등대 인근 골목에 있는 데어리 킹(Dairy King)은 갈레 최초이자 가장 유명한 아이스크림 가게다. 주소를 찾아가면 낮은 담장 너머로 100년 넘은 아르데코 양식의 흰 주택이 나온다. 분홍빛으로 칠한 현관에 아이스크림 쇼케이스가, 좁은 안뜰의 테라스에는 테이블 몇 개가 놓여 있다. 현관의 초인종을 누르자 주인 타리크 샤하눈(Tariq Shahanun)이 나와 손님을 맞는다. 메뉴판에는 열대과일 이름이 잔뜩 쓰여 있다. 망고, 패션프루트, 라임, 코코넛, 파인애플…. “우리 아이스크림은 갈레뿐 아니라 스리랑카에서 최고예요. 갈레산 신선한 우유와 과일만 사용하고 인공 첨가물은 절대 넣지 않아요. 100퍼센트 수제로 생산하는데 매일 100개 정도 만들어 팔죠.” 샤하눈이 작은 플라스틱 용기에 담긴 패션프루트 맛 아이스크림을 건네준다. 패션프루트가 조각째 들었고, 맛은 더없이 새콤하다. 더위를 한 숨 식힌 여행자는 그늘진 뜰에 앉아 가이드북을 팔랑팔랑 넘기며 다음 행선지를 정한다.
히스토리컬 맨션 무료, 9am~6pm, 31-39 Leyn Baan St.
데어리 킹 아이스크림 200스리랑카루피부터, 8:30am~10pm, 69 Church St.
사람들은 세 가지 ‘S’를 찾아 스리랑카에 온다고 한다. 태양(sun), 모래(sand) 그리고 서핑(surf). 스리랑카 남부에는 이 세 가지가 전부 있다. 누구라도 스리랑카 남부에 오면, 어느 해변에 갈지 행복한 고민에 빠질 듯하다. 광활한 백사장, 짙푸른 파도, 바다를 향해 휘어진 키 큰 야자수. 누구나 한 번쯤 상상해봤을 법한 이상적인 해변이 연이어 펼쳐지는 곳이니까. 도저히 결정하기 어렵다면, 일단 출발부터 하자. 해안을 달리다가 마음에 드는 해변이 나오면 차를 세우고 원하는 만큼 머물면 된다.
이른 아침, 게으른 휴양객은 아직 잠에 빠져 있을 시각. 코갈라 비치 호텔(Koggala Beach Hotel) 앞의 텅 빈 백사장에는 위협적일 만큼 거센 파도가 몰아친다. 코갈라 해변에서 25년째 장대 낚시를 하고 있는 니샨타(Nishanta)는 이때쯤 낚시 도구를 챙겨 바다로 나온다. “보름달 뜰 때만 빼고 거의 매일 낚시를 하러 와요. 물고기를 판 돈으로 가족 모두 먹고살죠.” 얕은 바다에 설치한 장대에 올라 앉아 고기를 낚는 전통 장대 낚시는 스리랑카에서 점차 사라지는 추세다. 그나마 남아 있는 어부 중 많은 이가 관광객을 상대로 사진 촬영 비용을 받아 생계를 유지한다.
코갈라에서 흰긴수염고래가 즐겨 찾는 항구도시 미리사(Mirissa)를 지나면 한적한 마타라 해변이 나온다. 해 질 무렵, 바다에서 서퍼들이 서핑보드를 팔에 낀 채 하나둘 걸어 나와 집으로 돌아간다. 그중 1명인 부키(Bookie)는 현지 서핑 학교에서 교사로 일한다. “마타라는 10년쯤 전부터 서핑으로 유명해지기 시작했어요. 최근에는 서핑을 하러 찾아오는 외국인 여행자가 점점 늘고 있죠. 겨울이면 파도가 높아 능숙한 서퍼가 즐겨 찾아요.” 그의 말대로 해변에 서양인 서퍼가 꽤 많이 눈에 띈다. 마타라의 여러 게스트하우스에서는 서핑용품을 제공한다. 여기서 동쪽으로 더 가면 인기 있는 휴양지 탕갈레(Tangalle)와 얄라 국립공원(Yala National Park) 그리고 스리랑카 최고의 서핑 포인트로 꼽히는 아루감 베이(Arugam Bay)가 나온다. 모험을 계속할지 아니면 좀 더 머물지는 당신의 선택에 달려 있다.
코갈라 비치 호텔 60달러부터, koggalabeachhotel.bookings.lk
이기선은 <론리플래닛 매거진 코리아>의 에디터다. 김재욱은 음식부터 여행까지 다양한 분야를 넘나드는 사진가다. 둘은 이번 취재에서 인도양에 딱 종아리까지 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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