짙푸른 바다와 활기 넘치는 항구가 이어지는 강원도의 동해안을 질주해보자. 양양에서 강릉을 거쳐 동해에 이르는 여정에는 일곱 가지 색다른 즐거움이 기다리고 있다.
글 고현 ・ 사진 정수임
‘강원도의 맛’을 논할 때 막국수를 빼놓을 수 없다. 영서 지방과 영동 지방을 포함해 강원도 어디에서든 동치미 국물에 시원하게 말아서 내는 막국수는 가장 만만하면서 실패할 확률이 적은 향토 음식이니 말이다. 하지만 각 지역마다 막국수 맛을 내는 비법이 조금씩 다르고, 그 맛을 제대로 유지하는 집 또한 흔하지 않다. 속초에서 양양으로 넘어가는 도중에 자리한 강현면 장산리의 실로암 메밀국수는 양양뿐 아니라 강원도를 대표하는 막국숫집 중 하나다. 40년 넘는 오랜 내력을 자랑하는 이 집은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의 단골집으로 세간에 알려지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주인이 바뀌었다, 대기업에 팔았다 등 최근 여러 소문이 돌더군요.” 실로암 메밀국수를 시작한 김정수 할머니의 손자 박재형 씨의 말이다. 2년 전 원래의 허름한 옛집에서 바로 옆 신축 건물로 이주했는데, 모던한 갤러리가 연상되는 새 건물의 외관 탓에 그런 소문이 제법 난 모양이다. “여전히 할머니가 매일 직접 양념을 확인하고, 동치미 간을 봐주고 있는데도 말이죠.” 소문과 무관하게 이곳은 평일에도 단골손님이 끊이지 않을 정도로 여전한 인기를 자랑한다. 그 비결은 바로 살얼음으로 갈아서 내는 동치미 국물의 맛. 영업 초창기부터 사용한 옛집의 지하 암반수로 동치미 국물을 만드는데, 바로 그 물 때문에 타지로 식당을 옮기는 일은 언감생심이라고 한다. 실로암이라는 이름 또한 성경의 ‘우물’에서 갖고 온 것이라 하니 암반수로 만든 동치미 국물에 관한 강한 자부심과 신뢰감이 동시에 느껴진다. 까칠까칠한 메밀 면발에 40년 세월 동안 이어온 한결같은 동치미 국물이 어우러진 맛은 담백하면서 개운하다. 상큼한 동치미 국물과 함께 설탕 대신 오로지 채소로만 단맛을 낸 덕분이다.
메뉴판에 있는 삶은 돼지고기 또한 이 집에서 놓칠 수 없는 별미. 일반 수육과 달리 미역에 싸 먹는 것이 좀 독특한데, 새우젓과 다진 마늘에 갖은 양념으로 만든 장맛 또한 예사롭지 않다. 금세 포만감이 찾아오는 메밀국수에 삶은 돼지고기까지 곁들이려면 배를 완전히 비운 상태로 방문하는 것이 좋겠다.
+ 실로암 메밀국수
메밀국수 8,000원, 삶은 돼지고기 2만4,000원
10:30am~8pm, 수요일 휴무
033 671 5547
양양군 강현면 장산리 228.
양양 여행의 트렌드가 해를 거듭할수록 바뀌고 있다. 낙산사를 구경한 뒤, 인근 낙산해변이나 하조대해변에서 해수욕을 즐기는 것이 전형적인 코스였다면, 최근 양양을 좀 다녀본 이는 이보다 남쪽에 있는 죽도해변으로 곧장 향한다. 이 아담한 해변 마을에 들어서면 그간의 변화를 실감할 수 있다. 캐러밴이 줄줄이 세워진 죽도오토캠핑장 뒤편으로 서프 숍과 수제 버거 가게가 늘어서 있고, 그 앞으로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지나가는 레게 머리의 외국인과 스쿠터에 올라 탄 서퍼가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모습은 마치 하와이 오아후(Oahu)의 노스 쇼어(North Shore)나 발리의 쿠타 비치(Kuta Beach)를 떠올리게 한다.
“서핑을 시작한 지 3년째인데, 아예 죽도에 정착하게 됐어요. 최근 저처럼 서핑 때문에 양양에 눌러앉은 타지 사람이 꽤 많더라고요.” 지난주 죽도해변에 새로 문을 연 모쿠 서프 앞에서 만난 이찬우 씨의 말이다. “죽도에 서프 숍이 12개 있는데, 그중 블루코스트는 매우 중요한 곳이에요. 양양에 서핑 붐을 일으킨 숍이니까요.”
죽도해변 북쪽 동산항 근방에 자리한 블루코스트. 그곳에서 샤워 부스 확장 공사를 하던 조남수 씨가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알렉스’로 통하는 정형섭 씨와 함께 블루코스트를 공동으로 운영하는 그는 죽도해변의 유명 인사 중 1명이다. “서핑은 분명 매력적이지만, 반대로 굉장히 위험한 아웃도어 스포츠라 할 수 있지요. 서핑을 처음 접하는 이들에게 거친 파도에 맞서는 방법을 제대로 알려주고 싶어요.” 2009년에 문을 연 블루코스트는 죽도의 터줏대감 같은 서프 숍. 장비 대여는 물론, 서퍼를 위한 게스트하우스와 펍을 함께 운영하는데, 주목해야 할 것은 당연히 서핑 강습이다. “기초 강습과 전문 강습을 동일한 내용으로 구성하고 있어요. 이는 서핑을 조금이라도 아는 이는 물론 초심자까지 심도 있게 서핑을 즐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죠.”
죽도해변이 서핑 메카로 떠오른 데는 지형 조건이 한몫을 했다. 보통의 동해 바다와 달리 이 일대는 해변에서 60~70미터까지 떨어져도 수심이 어른 키와 비슷할 정도로 완만해 초심자도 안전하게 파도를 가를 수 있다. 특히 여름은 파도 높이가 낮은 편이라 서핑을 도전하기에 딱 알맞은 시기다. 마침 한 무리의 강습생이 보드에 몸을 누인 채 팔을 힘차게 저으며 패들링을 배우고 있다. 이내 가볍게 일렁이는 파도를 등지고 서프보드에 몸을 일으켜 세우는 테이크오프를 시도한다. 누군가는 그대로 바닷 속으로 고꾸라지고, 몇몇은 마침내 파도를 가로지르는 데 성공한다. 이들 중 서핑의 매력에 눈을 뜬 누군가는 뻔질나게 이곳을 다시 찾겠지.
+ 블루코스트
강습 5만 원부터(장비 별도), 서프보드 대여 3만5,000원
033 672 4499
양양군 현남면 동산큰길 21-1
바다를 면한 양양의 7번 국도를 따라 질주하다 차창 밖을 내다보면 어느새 풍경이 규칙적으로 바뀐다. 너른 백사장이 깔린 해변(혹은 철조망으로 가려진 군사보호구역)을 하나 지나면 이내 방파제 사이로 움푹 들어간 아담한 항구가 나오는 식으로 말이다. 해변과 항구는 인접해 있지만 둘의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주로 외지인이 거니는 해변과 달리 현지인이 일상을 영위하는 항구에서는 바다의 삶이 오롯이 남아 있으니까. 남애항 같은 곳이라면 더욱 그렇다.
남애항은 인근의 주문진항, 속초의 대포항처럼 규모가 크고 이름난 항구는 아니지만, 바닷가의 일상을 살피기에 딱 적당한 곳이다. 하루 중 가장 시끌벅적한 때는 단연 이른 아침. 바다로 나간 어선이 속속 돌아오고 부둣가 위에 제철 맞은 물가자미와 물망치, 다랑어, 쥐치 등 그날 잡은 싱싱한 수산물이 우수수 쏟아지며 항구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이윽고 경매의 시작. 수협 직원이 경쾌하게 호루라기를 불면 이내 상인이 둥그렇게 모이고, 경매지를 바쁘게 주고받으며 사각 바구니에 담은 수산물을 나르는 모습은 호기심을 자극한다. “7년 전 무작정 바다를 찾아 이곳에 정착해 살기 시작했어요.” 항구를 거닐던 중 우연히 만난 최선민 씨는 남애항의 매력에 단단히 빠졌다. 그녀는 얼마 전 직장 때문에 강릉으로 이사했는데, 간만에 이곳을 찾았다고 한다. “남애항은 외지인에게 넉넉하게 마음을 나누는 곳이라 언제나 마음이 편해요.” 마침 한 어민이 그녀를 알아보고 갓 잡은 방어 1마리를 회를 떠 건넨다. 남애항의 이색 풍경 중 하나는 최근 늘어난 젊은 어부들. 인근 해변에서 서핑, 스쿠버다이빙 등을 즐기려고 정착한 이들 중 일부는 시간이 남을 때마다 멍게를 다듬는 등 소일거리를 찾아 종종 남애항으로 모인다고.
40여 척의 배가 드나드는 오전과 달리 남애항에 오후가 찾아오면 적적한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지난해 여름 방파제 초입에 세운 바다전망대에서는 망망한 동해의 수평선과 푸근한 남애항의 전경을 동시에 감상할 수 있다. 전망대의 투명한 유리 바닥 아래로는 청록빛 파도가 바위 앞에서 규칙적으로 부서지며 적막을 깨운다. 이곳에서 파도 소리와 갈매기의 울음소리만이 떠도는 오후의 남애항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노인과 바다>의 한 장면처럼 고독함과 안온함이 교차한다.
+ 남애항
양양군 현남면 매바위길.
영진항 부근에 자리한 카페 보헤미안. 커피 애호가에게 일종의 성지로 통하는 곳이다. 좁다란 시골길을 따라 언덕 끝까지 들어가야 하는 이 외진 곳에 수많은 방문객이 모이는 까닭은 국내 바리스타 1세대라 불리는 박이추 씨가 내리는 구수한 커피 향 때문일 게다. 더불어 창밖으로 보이는 넉넉한 바다 풍경은 처음 찾은 이를 단단히 반하게 만든다. 이제 그 풍경을 곁에 두고 하룻밤 청하는 일도 가능하다. 지난해 여름 보헤미안 바로 옆에 문을 연 펜션 시닉94(Scenic94)에서라면 말이다.
“9개의 객실과 4개의 테마를 갖춘 곳이라는 의미의 이름이에요.” 2년 전에 개업한 아트힐 펜션 옆자리에 새롭게 시닉94를 지은 주인장 민병철 씨가 말한다. “모든 객실에서 아름다운 동해의 일출이 바라보이고, 소나무의 은은한 향을 느낄 수 있지요. 또 편백나무로 천장을 마감한 스파를 갖췄고, 가든 파티와 문화 공연 또한 즐길 수 있습니다.” 그가 요목조목 설명한 네 가지 테마는 이곳에 머무는 하룻밤 사이 하나씩 경험할 수 있다.
먼저 동향의 2개 동으로 나뉜 각 객실의 정면부는 통유리로 덮여 있다. 일출은 물론 동해 바다가 언제든 눈앞을 가득 채운다. 심지어 각 방의 화장실 좌변기 높이에 맞춰 창문을 낸 것도 바로 그 경관을 위해서다. 이런 설계 덕분에 최근 강원도청에서 실시한 ‘경관 우수 건축물’ 중 하나로 선정됐다고. 펜션 앞으로 푸른 바다가 펼쳐진다면 펜션 뒤에는 울창한 소나무 숲이 있어 선선한 바람이 자연스럽게 오간다. 특히 펜션 부지 내에 우뚝 서 있는 장대한 소나무 3그루의 나이를 합치면 무려 1,200년. 그중 가장 나이가 든 500년 된 소나무는 펜션 뒤편 계단 사이로 가지가 뻗어나갈 수 있도록 고안했다. 건축주와 건축 사무소가 6개월의 설계 기간 동안 고심 끝에 결정한 것이다.
펜션 앞 동의 1층에 마련되어 있는 카페 겸 레스토랑 시닉 베이(Scenic Bay)는 꼭 투숙을 하지 않더라도 한 번쯤 방문해볼 만하다. 간단한 식사와 커피를 맛볼 수 있고, 지역 예술가의 작품을 시기별로 전시하는 갤러리로 꾸몄기 때문이다. 레스토랑 밖 나무 덱은 계단식으로 설계했는데, 이는 작은 음악회를 열기 위해서다. “그저 하룻밤 머물고 가는 숙박 시설이 아니라 복합 문화 공간으로 운영하고 싶어요.” 진중한 고민이 담긴 공간은 언제나 여행자의 마음을 사로잡기 마련이다. 그의 바람이 이어진다면 언젠가 ‘보헤미안 옆 시닉94’가 아닌 ‘시닉94 옆 보헤미안’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 시닉94
9만 원부터(비수기 기준)
010 5296 8739
강릉시 연곡면 홍질목길 5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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