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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더로드 Nov 30. 2016

산양을 쫓는 양구 여행

Finding Gorals

옛날 옛적 유물이 묻힌 호수, 그림 속 마을과 버려진 골짝을 지나 깊고 깊은 산속에만 산다는 천연기념물 산양을 만나러 가자.

양구 산양복원증식센터에서 대암산 용늪으로 올라가는 도로. 동 튼 직후, 자욱한 안개가 위쪽으로 밀려 올라가고 있다. © 임학현


첩첩산중의 바다


춘천 휴게소를 출발한 차량은 계속해서 동쪽으로 달린다. 약한 빗방울이 차창을 두드리고 스피커 너머로 존 레넌이 ‘어크로스 디 유니버스(Across the Universe)’를 부른다. 산기슭을 관통하는 깊은 터널을 여럿 지나 ‘빛의 입구’라는 뜻의 양구(楊口)로 향한다. 이따금 도로변에 야생동물 보호 표지판이 보인다. 백두대간 깊숙하게 파고들어갈수록 빗줄기가 차차 잦아든다.


지도를 보면 강원도 양구와 화천의 경계에는 파로호가 뱀처럼 구불구불 뻗어 있다. 가을날 오후, 양구의 울창한 숲은 울긋불긋 물들기 시작했다. 낮잠에 빠진 듯 평화롭고 거대한 산봉우리 사이로, 맞은편에 오는 차 1대 없이 텅 빈 2차선 포장도로를 달려 인공 호수에 이른다. 구름 자욱한 하늘을 비추는 호수에는 한때 산이던 봉우리들이 육중한 몸을 담그고 있다. 수목이 자라던 하단부 기슭을 맨살처럼 드러낸 채로. 우기 때는 맨땅과 수목의 경계선까지 수면이 상승할 것이다. 소설가 오정희는 1989년작 <파로호>에서 호수의 풍경을 이렇게 서술했다. “단애의 끝에 호수가 있다. 산을 깎아낸 길 아래, 가파른 벼랑 끝의 호수는 그릇에 담긴 물처럼 고요하다.”


숲이 깎이고 들과 마을이 물에 잠긴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른 무렵, 일제 침략 세력이 전쟁에 쓸 용도로 수력발전 시설인 화천댐을 건설하면서부터였다. 산 사이에 거대한 호숫물이 고이게 된 지 7년 후, 1951년 한국전쟁 중에는 경기도 양평에서 화천과 양구 일대까지 쫓겨 온 중공군 2만여 명이 호수에 수장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한동안 파로호에서 난 물고기를 입에 대지도 않았다고 한다. 시체를 뜯어 먹고 자랐다는 이유로. 어쨌든 이승만 전 대통령은 승리를 기뻐하며 오랑캐를 무찔렀다는 뜻의 파로호(破虜湖)라는 이름을 지었다. 그 후 그는 파로호 끝자락의 조용한 동네인 상무룡리 호숫가에 별장을 짓고 얼마간 머무르며 낚시를 하거나 업무를 처리했다.


상무룡리가 옛 대통령의 은거지라는 사실은 오늘날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이따금 고기가 잘 잡힌다는 정보를 접한 낚시꾼이 찾곤 할 뿐. 더구나 오늘처럼 한가로운 수요일 낮에 이곳까지 찾아오는 이는 거의 없다. 상무룡리는 15가구 남짓 거주하는 작은 마을로, 주민들은 산비탈에 밭을 일구거나 낚시터와 펜션을 운영하며 살아간다. 이승만 별장 터는 구글 지도 상에 표시되지도 않으며 육로로 접근할 경우 길조차 나 있지 않은 야산을 한참 헤집고 들어가야 나온다. 파로호상무룡낚시터를 운영하는 여석민 씨를 호수로 내려가는 비탈에서 만난다. 그가 땅바닥 위에 긴 나뭇가지로 Y자 형태를 그리며 설명한다. “이쪽 뿌리에 배를 대고 내려 가운데 쪽으로 쭉 걸어 조금만 올라가면 별장이 나와요. 그러고서 반대편 뿌리로 내려오면 돼요. 여기는 동네 사람들도 잘 안 가요. 작년 가을인가, 아주 오랜만에 가봤는데 겨우 찾았어요.” 이윽고 세 사람을 태운 보트가 탈탈거리며 출발한다. 얼음장같은 산간 지방의 바람이 얼굴을 때린다. 유유히 호수 위를 떠 가고 있으나 사실은 산 사이의 허공에 떠 있는 셈이라고 생각하니 묘한 느낌이 든다. 어딘가에는 천연기념물 황쏘가리와 수달이 헤엄치고 있을 것이다. 여석민 씨는 무감한 표정으로 호수를 바라본다. “저는 상무룡리에서 태어났지만 물에 잠기기 전 마을 이야기는 거의 듣지 못했어요. 그 시절의 어르신은 거진 돌아가신 뒤였으니까요. 그러니 별로 그리울 것도 없지요.”

상무룡리에 자리한 이승만 별장은 지을 당시 멋진 호수 경관을 자랑했다고 한다. 현재 숲속에 방치된 채 일부 외벽만 남아 있다. © 임학현

몇 분 뒤, 공사판처럼 황량한 모래사장에 배를 대고 내린다. 사위가 적막하다. 조금 걸어 올라가니 숲이 펼쳐진다. 소나무, 상수리나무 등의 수목이 인간의 방해를 받지 않고 제멋대로 뻗어 올라가고 있다. 어디선가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수풀 너머로 황톳빛 형체가 휙 사라진다. 길도 없는 숲을 헤치고 가파른 언덕배기 정상까지 올라갔다 포기하고 내려가던 길, 운 좋게 별장 터를 발견한다. 무성한 수풀 사이에 돌계단과 벽 몇 개가 폐허가 된 채 남아 있다. 그 옆에는 1986년 5월 양구군청에서 세운 표지석이 유물처럼 서 있다. “세월의 변천과 더불어 잊혀가는 것이 안타까워 이곳에 서린 깊은 뜻을 후세에 전하고자 이 표지를 세운다”라는 글귀가 무색하다. 몇 백 미터 내려가자 ‘경호실터’라고 쓰인 표지판이 수풀에 가려져 있다. 온통 녹슬고 빛이 바래 글씨를 겨우 알아볼 수 있을 정도다. 다시 호숫가로 내려가며 배를 부르기 위해 전화를 건다. 산이며 하늘, 물가 모두 잿빛으로 물든 황량한 풍경을 다시 만나니 반갑다.


호수에 잠긴 상무룡리의 들판이 딱 한 번 다시 햇빛을 본 적이 있다. 1987년, 평화의 댐을 건설하기 위해 생태계 파괴 논란에도 불구하고 파로호의 퇴수 작업을 진행한 때다. 당시 호수 밑바닥에서 구석기와 청동기 시대 유물이 대거 발견되며 전국의 고고학자와 기자를 불러모았다. 학계에서는 파로호에 물을 채우는 것을 반대했으나 결국 미처 발굴하지 못한 유물은 다시 물속에 잠기고 말았다. 소설가 오정희는 당시 뉴스를 보자마자 물이 빠진 파로호를 찾았고, 동명의 단편소설을 구상했다고 한다. 무수한 이야기가 수장된 호수를 떠나 양구읍으로 향하는 길, 하늘이 파랗게 개기 시작한다.

양구 상무룡리에서 바라본 파로호. 우리나라 최북단의 호수로 화천과 양구에 걸쳐 있다. 상류에 평화의 댐이 자리한다. © 임학현


그림 속 마을


2002년 국립지리원에서 우리나라 국토 정중앙 지점 측정 결과를 발표했다. 섬을 포함한 우리나라 극지점 4곳을 기준으로 측정한 결과 동경 128도02분02.5초, 북위 38도03분37.5초로 양구군 남면 도촌리 산 48번지 일대가 선정되었다. 그 이래로 양구군은 이곳이 ‘한반도의 배꼽’이라고 적극적으로 홍보하기 시작했다. 양구군의 관광 정보에 따르면 국토 정중앙 지점에는 상서로운 기운이 감돌며 이곳을 찾는 이는 수명이 5년은 길어진다고 한다.


국토 정중앙에서 북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양구읍이 자리한다. 오늘은 강원도 5대 장 중 하나로 꼽던 양구 5일장이 서는 날이다. 양구 중앙시장에서 3대째 영업 중인 옥천식당에서 내장국밥으로 점심 식사를 한 뒤 시장 구경에 나선다. 양구 사과, 멜론, 도넛, 놋그릇…. 분식 포차는 인기 만점이다. 학교 체육복을 입은 학생들, 아기를 안은 엄마가 쪼르르 서서 행복한 얼굴로 배를 채운다. 앞치마를 두른 엄마는 아들의 등 뒤에 대고 도서관에 가라고 잔소리를 한다. 할머니들은 채소 가판대 앞에 종종 쪼그리고 앉아 수다 삼매경이다. 시장을 마주 보는 평화사우나는 양구 땅을 북으로부터 수복(收復)한 이래로 같은 자리에서 영업 중이다. 사우나 입구에 딸린 단칸방 안에는 나이 지긋한 주인장이 러닝셔츠 바람으로 달콤한 낮잠에 빠져 있다. 사우나 옆의 형제자전차점 주인아저씨는 단골손님의 자전거 수선을 끝낸 뒤, 트랙터를 개조한 애마에 시동을 걸고 길을 나선다.


“한로(寒露) 직후까지 철이에요.” 송이버섯과 능이버섯, 노루궁뎅이버섯을 담은 박스 뒤에서 곱게 화장을 한 이두남 씨가 목욕탕 의자에 쪼그리고 앉아 설명한다. 지나가던 동네 주민마다 걸음을 멈추고 서서 진귀한 것을 감상하듯 바라보고 값을 묻는다. “모두 남편이 직접 채취한 거예요. 남편은 산에 자주 가니 산양을 많이 본다는데 저는 딱 한 번 봤어요. 올봄 언젠가 남편 차를 타고 방산면 도고터널에서 막 빠져나왔을 때 새끼 산양을 마주쳤어요. 도로변에서 이쪽을 가만히 쳐다보더니 산 위로 폴짝 뛰어 올라가더라고요. 얼마나 귀엽던지. 또 보고 싶어서 그 후로 도고터널을 지날 때마다 두리번거린다니까요.” 아쉽다는 듯 자랑하며 생글거린다. “다른 지방보다 양구의 버섯 품질이 뛰어나요. 강원도에서도 깊은 오지니까요.”

양구의 특산물인 송이버섯은 소나무 군락지에서 자라며 10월 말까지 수확한다. © 임학현

중앙시장에서 몇 블록 떨어진 곳에 흐르는 좁은 서천(西川)은 양구읍을 가로질러 파로호까지 이어진다. 서 천 건너편의 정림리는 한갓진 밭과 낮은 집이 옹기종기모인 작은 동네다. 1914년 겨울, 정림리의 한 부잣집에서는 3대 독자가 태어난 것을 축하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 이가 보통학교에 입학할 무렵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고, 빚을 갚기 위해 마지막으로 남은 집까지 팔아넘긴 뒤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때 양구를 등진 화가 박수근은 두 번 다시 고향 땅을 밟지 못했다. 박수근이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장녀이자 현재 양구 박수근미술관의 명예관장인 박인숙 씨는 아버지의 고향에 처음 발을 디뎠다. “처음 양구에 왔을 때 아버지 품처럼 푸근하게 느껴졌어요. 양구 장터의 소박한 사람들을 보면 아버지 그림이 살아 숨 쉬는 듯했죠.” 그렇게 말하는 그녀 자신이 박수근 작품 속 단발머리 소녀의 모델이기도 하다.

박수근미술관 앞의 정림리 마을 일대는 2014년부터 예술 마을로 조성하기 시작했다. 박수근로의 한 가정집 담에 설치한 이 작품은 그 일환이다. © 임학현

양구교육지원청 뒤편의 언덕에는 300년 넘은 느릅나무가 서 있다. 양구보통학교 재학 시절에 박수근이 즐겨 그린 나무다. 그가 네 차례나 그린 작품 <나무와 두 여인>의 소재기도 하다. 현실 속 저녁 하늘의 옅은 푸른빛을 배경으로 굽은 나뭇가지 끝자락에 희미한 반점 같은 초승달이 떠 있다. 어디선가 풀벌레 소리가 들려온다. 사위가 박수근이 즐겨 쓰던 쓸쓸하고 정다운 색으로 물들어간다.

양구교육지원청 뒤편의 박수근 나무는 화가가 어린 시절 즐겨 그린 소재였다. © 임학현


사람들이 사라진 골짜기


1983년 6월 21일, 강원일보에는 양구군 방산면 천미리의 한 주민이 폭설로 길을 잃고 헤매던 새끼 산양을 집으로 데려와 14개월 동안 키우다가 입건되었다는 기사가 실렸다. 그는 산양을 집에서 키우는 것이 불법인 줄 몰랐다고 한다. 양구에는 산양에 얽힌 별별 이야기가 떠돈다. 산양을 밀렵해 뿔로 도장을 만들었다거나 탕을 끓여 먹었다거나. 특히 산세가 험한 방산면을 중심으로 목격담이 많다.

민통선 북쪽에 위치한 계곡 두타연은 내금강으로 이어지던 길목에 위치하며 수질이 깨끗해 천연기념물 열목어의 서식지기도 하다. © 임학현

맑은 가을날 아침, 올봄에 이두남 씨가 새끼 산양을 목격했다는 도고터널을 지나 방산면 북쪽을 향해 차를 몬다. 민간인 출입통제선 안쪽에 위치한 두타연으로 가는 길이다. “대암산 기슭의 생태식물원 쪽이나 두타연에 가보세요.” 며칠 전, 양구 산양복원증식센터의 안재용 사무국장과 전화 통화를 하던 중 어디에 가면 산양을 볼 수 있는지 묻자 그가 조언했다. 그는 2007년 개관한 산양복원증식센터의 초창기 설립 멤버다. “하지만 목격하기 아주 힘들 거예요. 겨울에나 먹이를 찾아 이따금 내려오곤 하니까요.” 그에 따르면 산양이 자주 출몰하는 시각은 이른 아침이나 해 질 녘이라고 한다. 한때 우리나라 전역에 서식했고 고대 문헌에도 종종 등장하는 산양은 오늘날 천연기념물 제217호이자 멸종위기 야생생물 1급으로 지정되어 있다. 수십 년간 공공연하게 밀렵이 벌어졌고, 고속도로를 건설하면서 산과 산 사이의 길목이 끊기며 집단 간의 자연스러운 교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결정적 사건으로는 1960년대 강원도 지방에 내린 대규모 폭설 때 3,000마리가 넘는 산양 떼가 민가로 내려와 포획된 것을 꼽는다. 최근 꾸준히 산양 보호 노력을 벌인 덕분에 현재 전국에 약 1,000마리가 서식하는 것으로 추정한다.

해 질 녘 산양복원증식센터에서 풀을 뜯어 먹는 새끼 산양. © 임학현

군부대가 주둔하는 안내소에서 출입 신청을 한 뒤 몇 분 더 들어가자 두타연 입구가 나온다. “여기서는 산양을 자주 봐요. 산양을 본 다음 날이면 우리끼리 ‘어제 산양 내려왔다’고 얘기하곤 하죠.” 두타연으로 걸어가는 길에 해설사 유리 씨가 해맑게 자랑한다. “저 산 위에 보이는 돌 비탈을 너덜겅이라 해요. 산양이 자주 나타나는 곳이죠. 아주 귀여워요. 꼬리가 하얗고 몸집이 작지요. 산양복원증식센터에서 키우는 것들과는 다르게 생겼어요.” 초목이 자라지 않는 저 가파른 비탈에서 산양은 신나게 뛰어내려가거나 가만히 웅크리고 볕을 쬔다고 한다. 하지만 오늘은 코빼기도 비추지 않는다.


너덜겅이 위치한 산봉우리는 단장(斷腸)의 능선이라 불린다. 맨 꼭대기에는 투구를 쓴 병사의 얼굴 같은 사지암이 남쪽을 바라보고 있다. 사지암이 죽음을 막아준다고 믿던 동네 사람들은 누군가 아플 때마다 저 높은 바위를 올려다보며 기도를 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사지암은 말이 없었을 것이다. 60여 년 전 전쟁의 비극을 목격했을 때도 마찬가지였을 듯하다. 한국전쟁 당시 주요 격전지던 두타연 일대에서는 총 9차례의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고 한다.

두타연 생태탐방로는 지난 60여 년간 발길이 닿지 않은 풀숲 사이를 지난다. © 임학현

철조망과 지뢰 주의 표지판으로 막아놓은 수풀 사이를 걸어 금세 두타연에 도착한다. 금강산에서 흘러내려온 맑은 물이 수천 년간 그래왔듯 기암절벽 사이로 세차게 흘러내린다. 유리 씨가 계곡 앞의 울창한 언덕을 가리킨다. “저 산등성이가 피의 능선이에요. 한국전쟁 때 전투가 벌어져 온통 붉은 피로 뒤덮였다는데, 실종자만 13만 명에 달해요.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소재가 되기도 했죠. 시체가 하도 많아 아직도 유해 발굴 작업이 진행 중이에요.” 그 아래쪽 암벽에는 커다란 굴이 뚫려 있다. 스산한 분위기의 저 굴에서 1,000여 년 전, 금강산에서 내려온 혜정스님이 여인으로 변신한 관세음보살과 3년간 살았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그녀가 관세음보살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스님은 깨달음을 얻고 두타연 옆에 두타사라는 절을 지었다고 하나, 조선 시대에 소실되었다.


한때 마을이던 숲 사이로 난 오솔길을 천천히 걷는다. 발밑에서 낙엽이 바스락거린다. 지뢰가 묻혀 있다는 땅에서 초목은 아랑곳없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예전 마을 사람들은 두타연을 지나 금강산으로 소풍을 가곤 했어요. 아침 일찍 집을 나서서 해 질 무렵 돌아왔죠. 전쟁이 일어나자 사람들은 전부 북쪽으로 도망쳐버렸고 마을은 텅 비게 되었어요.” 전쟁이 일어나기 전, 두타연 앞의 건솔리와 문등리는 각각 1만여 명이 사는 큰 마을이었고 근처의 광산 덕분에 양구읍보다도 번성했다고 한다. 유리 씨는 수풀 사이에서 집터나 화장실 터를 가리킨다. 어느덧 오솔길은 탁 트인 두물머리에 이른다. 금강산에서 내려온 수입천과 문등천은 이곳에서 하나로 만나 수도 서울까지 140여 킬로미터를 흘러가고 있다.



산에서 만나다


“1년 중 안개가 끼는 날이 170일, 영하로 떨어지는 날이 150일입니다.” 자연환경 해설사 한수철 씨가 설명한다. 해발 1,280미터, 양구와 인제에 걸쳐 있는 대암산의 가장 높은 능선 한복판. 우리는 나무 덱에서 큰 용늪을 내려다보는 중이다. 한낮인데 용늪의 하늘은 좀처럼 개지 않는다. 알록달록한 야생화는 이미 오래전 졌고, 울긋불긋 물들기 시작한 산등성이를 배경으로 탁 트인 습지와 아담한 웅덩이가 펼쳐져 있다. 전설에 따르면 승천하던 용이 이 늪에서 쉬어갔다고 한다.

국내의 유일한 고층습원으로 생태적, 학술적 가치가 높은 용늪은 1966년 DMZ 지대 생태계 조사 과정에서 처음 발견됐다. © 임학현

지난여름 늪을 푸르게 뒤덮던 키 작은 사초(莎草)는 이제 누렇게 말랐다. 그림처럼 쓸쓸한 늪의 풍경은 4,500여 년에 걸쳐 자연이 서서히 완성한 작품이다. 고산지대의 추운 날씨 탓에 지난 수천 년 동안 낙엽, 풀 등 식물의 잔해가 썩지 않고 매년 약 1밀리미터씩 이탄층을 쌓아온 것이다. 이는 해외의 생태학자들까지 용늪에 열광하는 이유 중 하나다. 우리는 용늪 사이로 난 목조 생태탐방로를 따라 걸어간다. “밟으면 스펀지처럼 튕겨 올라오는 층이죠.” 한수철 씨가 이탄층에 대해 쉽게 알려준다. 세계적으로 희귀한 고층습원인 용늪은 천연기념물 제246호이자 산림유전자원보호구역이며, 국내 최초의 람사르 습지이자 국제 보호 습지다. 동시에 군사보호구역이기도 하며 하루 출입 인원을 100명으로 제한한다. “식물 343종, 동물 304종이 이곳에 서식해요. 멧돼지, 오소리, 너구리는 물론이고 담비, 삵도 있어요. 여름에는 온통 야생화 천지인데 지금은 다 져버렸어요.” 비룡담, 끈끈이주걱, 큰용담, 어수리…. 한수철 씨가 읊어주는 식물 이름은 거의 외국어처럼 들린다.

용늪에는 토종 자작나무종인 사스래나무 군락이 있다. © 임학현

해 질 녘, 대암산 기슭은 적막하다. 이따금 탄식 같은 총성이 서늘한 공기를 가른다. 산양복원증식센터는 이 기슭에 자리한다. 산양 캐릭터가 그려진 표지판을 지나 부지에 들어서자 곧바로 산양 방사장이 나온다. 울타리 너머의 바위에서는 산양 1마리가 홀로 느긋하게 거닐고 있다. 그 순간, 아직 진화가 덜된 수만 년 전 동물의 얼굴이 우리를 마주 본다. 작고 갸름한 얼굴에 귀 안쪽으로 난 짤막한 뿔, 까맣게 빛나는 둥근 눈동자, 짧은 다리. 산양은 바위와 구별하기 힘든 잿빛을 띠지만, 목과 꼬리, 네 발에는 흰 털이 나 있다. “산양은 살아 있는 화석 짐승이라 불려요.” 홍재용 팀장과 함께 방사장을 둘러본다. 자그마한 새끼 산양이 풀밭 한가운데서 풀을 뜯어 먹다가 우리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올봄에 태어난 놈이에요. 일하면서 가장 행복한 때는 새끼가 태어날 때예요.” 홍재용 팀장이 귀엽다는 듯 말한다. 저쪽 암벽에서는 산양 몇 마리가 풀을 뜯다가 돌연 떼를 지어 언덕 아래로 날쌔게 달려 내려간다. 한 녀석은 바위 틈에 혼자 가만히 웅크리고 있다. “쉬는 거예요. 산양은 쉴 때 몇 시간이고 꼼짝 않고 가만히 있어요. 가끔씩 산에서 산양 시체를 봤다는 제보가 들어오는데, 알고 보면 단지 쉬고 있던 녀석인 경우가 많아요.” 건초로 된 먹이대에는 저녁을 먹으려는지 산양 3마리가 붙어 있다. 심지어 한 녀석은 건초 위에 올라가 있다. 산양들은 저마다 끊임없이 움직이지만 아무도 울음소리를 내지 않아 다소 기이한 적막이 흐른다.

산양은 진화가 덜된 동물의 신체적 특징을 간직하고 있다고 한다. © 임학현

현재 산양복원증식센터에서는 산양 25마리를 보호하고 있다. 삼척부터 울진까지 백두대간을 따라 산양 구조 작업을 벌이고 증식한 후 자연 방사하는 것은 물론, 방사한 산양의 적응 상태를 모니터링한다. 그 덕분인지 2007년경부터 국내의 산양 개체 수가 꽤 늘기 시작했고, 주민들 사이에서 신비롭던 이미지도 조금씩 희석되었다고. 홍재용 팀장의 우려는 딱 하나다. “다만 산양 수가 늘면서 멧돼지나 고라니처럼 주민에게 피해를 주는 유해 조수(鳥獸)가 될까 걱정이에요. 저도 여기서 일하기 전까지는 농가에 피해를 주는 산짐승이라면 질색했거든요. 이 일을 시작하면서 좀 다르게 생각하게 됐어요. 동물을 지키는 건 그저 해야 할 일이죠.”

단편소설 ‘파로호’에 묘사된 것과 같은 양구의 가을 저녁이 깊어간다. 산 너머로 초승달이 떠오를 무렵 산양은 잠에 들 채비를 하고 우리는 다시 길을 떠난다.


"가을 해는 짧고 더욱이 산골은 밤이 빠르다. 햇살은 밝은데 벌써 산그늘이 불안하게 어리고, 바람결이 세어지고 있었다.”



이기선은 <론리플래닛 매거진 코리아>의 에디터다. 임학현은 <론리플래닛 매거진 코리아>의 사진기자다. 취재 내내 “혹시 산양 보셨어요?”라는 질문을 입에 달고 다녔다.


취재 협조 산림청(forest.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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