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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더로드 Jan 26. 2017

남쪽 끝, 고흥에서

INLAND & ISLAND In GOHEUNG


풍요로운 대지와 바다, 사시사철 푸르른 숲, 작은 위로를 안겨주는 섬이 있는 곳. 머나먼 남쪽, 넉넉한 자연을 품은 고흥에서 차분하게 새해를 시작해보자.



새로운 싹을 틔우다


서울에서 차를 타고 5시간 남짓 가야 하는 고흥은 멀다. 심지어 이웃한 순천이나 여수, 보성에서 출발해도 1시간은 족히 잡아야 한다. 이는 입구가 좁다랗고 밑동이 두툼한 항아리처럼 생긴 고흥반도의 독특한 지형 때문이다. 어느 방향으로 가든 북쪽 동강면을 거쳐 진입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전국에서 군 단위로는 두 번째로 넓은 면적을 자랑하기에 지역 곳곳을 둘러보려면 이동 시간 또한 만만치 않게 필요하다.


이 머나먼 남쪽 땅은 제주를 제외하고 한반도에서 가장 온화한 기후를 자랑한다. 한파가 몰아친 12월, 서울은 영하로 곤두박질쳤지만, 고흥반도에 다다른 순간 따스한 공기가 주위를 감싼다. 차량의 실외 온도계는 영상 7도. 아직 단풍 빛깔이 남아 있는 메타세콰이어를 곁에 두고 이제 막 싹을 틔우기 시작한 마늘과 청보리가 파랗게 구릉을 채운 풍경은 겨울을 잠시 미룬 듯 보인다. 일조량이 풍족하고 부드러운 해풍이 불어오는 고흥은 우리나라 최대 유자 산지기도 하다. 전국 유자 수확량의 3분의 1가량을 차지할 만큼 어디에서든 유자나무를 흔하게 볼 수 있다. 과역면과 두원면, 풍양면 등 주로 내륙 지역에 유자 농가가 모여 있는데, 수확은 보통 11월에 시작해 첫눈이 내리기 전까지 이어진다. 과역면의 농가에선 유자 외에도 석류와 참다래, 마늘 등 다양한 농작물을 기른다. 그리고 최근 이곳에 색다른 작물이 등장했다. 석봉교차로의 굴다리에 큼직하게 내걸린 ‘커피愛 땅 과역’이란 문구가 이를 알리고 있다.

고흥 과역면 도천리의 해안에 있는 유자 밭. 해풍을 머금은 고흥산 유자는 향과 맛이 깊다. ⓒ 오작

“고흥은 2012년 우리나라 최초로 커피를 시험 재배한 곳이죠.” 한적한 농촌 마을 어귀에 자리 잡은 산티아고커피농장의 김철웅 대표가 말한다. 원래 무안이 고향인 그는 도시에서 커피 관련 사업을 이어가던 중 2014년 고흥으로 이주를 결심했다고 한다. “사실 우리나라가 커피 재배에 이상적인 기후를 갖춘 곳이 아니에요. 그렇지만 겨울이 따뜻하고 여름이 서늘한 고흥은 상대적으로 커피를 재배할 수 있는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했죠.” 김철웅 씨는 커피 재배에 관한 데이터가 전무한 고흥의 외딴 농가에서 갖은 시행착오 끝에 지난해 처음으로 커피 체리를 수확했다. 보통 열대지방의 커피 농장에선 우기 때 꽃이 피는데, 고흥에서는 5~6월 무렵 인위적으로 물을 공급해 꽃을 피우게 만든다. 이어 겨울과 봄 사이에 커피 열매가 빨갛게 익고, 3월부터 본격적으로 커피 체리를 수확한다. 그렇게 얻은 체리는 3차례에 걸쳐 껍질을 제거해 생두를 만들고, 건조하고, 로스팅하는 과정을 차례로 거쳐야 한다. 과역면의 산티아고커피농장을 비롯해 고흥 전역의 약 20여 농가에서 커피를 기르는 실험에 골몰하는 중이다.


김철웅 씨가 자신이 수확한 고흥산 아라비카 원두를 블렌딩한 커피 1잔을 직접 내려준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국내에서 양조한 와인처럼 토착지가 갖지 못한 한계가 분명 있으리라 짐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흥산 커피는 산미가 강하지 않으면서도 고소하고 부드러운 향이 감도는 의외의 매력이 있다. “커피는 원두나 드립 방법에 따라 맛이 천차만별이에요. 게다가 다른 분야와 쉽게 접목할 수도 있죠. 사람들이 이곳에서 커피를 마시는 것뿐 아니라 커피의 수확 과정을 배우고, 다양한 문화를 즐겼으면 해요.” 산티아고커피농장에서는 농장 견학과 시음을 포함해 로스팅, 핸드 드립 등 커피를 주제로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곧 봄이 오면 카페와 농장 사이의 빈 공터에 누구나 자유롭게 공연을 펼칠 수 있도록 야외 무대도 조성할 예정이다. 정성스럽게 직접 기른 커피를 마시며 보내는 차분한 오후. 익숙하면서도 생경한 경험이다.



푸른 숲과 까만 밤


차를 타고 고흥 동쪽 일대를 돌아다니면 어느 곳에서든 8개의 장대한 바위 암석으로 된 봉우리를 발견할 수 있다. 과거 중국 위나라 왕의 세숫물에 8개의 봉우리가 비칠 정도로 산세가 대단했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팔영산이다. 빽빽한 편백나무 숲이 펼쳐지고, 휴양림을 갖췄으며, 다도해해상국립공원에 걸쳐 있어 고흥 최고의 명산으로 꼽힌다. 팔영산 최고봉의 높이는 해발 609미터. 그리 높은 편은 아니지만, 산세가 험준해 정상까지 오르내리는 데 한나절은 꼬박 걸린다.


팔영산 외에도 여러 봉우리가 고흥 내륙 곳곳에 솟아 있다. 그중 고흥 남단 한복판, 해발 550미터의 천등산은 팔영산 대신 오르기에 좋다. 차로 정상 언저리까지 간편하게 닿을 수 있으니 말이다. 77번 국도에서 도화면의 신호리 마을로 향하면 차 1대가 간신히 지날 만한 비좁은 도로가 이어진다. 구불구불한 커브와 울퉁불퉁한 비포장 도로가 반복되는 이곳의 산길은 오프로드 드라이브 마니아 사이에서 인기 코스로 알려져 있다. 그렇게 20분 남짓 달리면 해발 400미터 높이의 전망대에 다다른다. 이곳에 차를 세우고 30분 정도 걸으면 정상까지 손쉽게 오를 수 있다. 은빛 억새로 둘러싸인 정상 주변은 봄이 오면 철쭉으로 온통 빨갛게 물든다고. 겹겹이 포개진 산자락 너머로 멀리 쪽빛 남해 바다와 거금도가 어우러진 고흥의 전경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천등산에서 바라 본 고흥의 전경. ⓒ 오작

천등산 동쪽 중턱에는 금탑사가 자리한다. 신라 문무왕 때 원효대사가 처음 창건한 이 사찰은 송광사의 말사이자, 비구니의 수행 도량이다. 처연히 서 있는 동백나무 1그루를 곁에 둔 극락전 앞에 서자 남다른 기운이 느껴지는데, 이는 주변을 감싸고 있는 숲의 존재 때문일 것이다. 약 13만 제곱미터의 땅에 3,300그루의 비자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어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앙상한 나무 사이로 푸른 자태를 뽐내고 있는 비자나무는 사시사철 잎의 색이 변하지 않는다. 300여 년을 버텨낸 이 곧게 뻗은 비자나무 숲은 최근 산림청에서 ‘아름다운 숲’으로 선정했다. 숲 아래로 듬성듬성 떨어져 있는 아몬드처럼 생긴 비자 열매는 소화에 효능이 탁월해 약재로 쓰이기도 한다.

금탑사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비자나무 숲. ⓒ 오작

해가 저문 뒤에는 고흥 서쪽으로 발길을 돌리자. 녹동항을 지나 바다를 향해 솟아 있는 장기산에 오를 차례다. 야트막한 산 정상에는 고흥우주천문과학관이 자리한다. 이곳은 국내 유일의 바닷가에 면한 시민 천문대다. “낮에는 태양을, 밤에는 성단과 별자리를 관측할 수 있도록 개방된 곳이죠.” 2011년 개관 때부터 별 관측 투어를 진행하고 있는 김병하 씨가 말한다. 주경 지름 800밀리미터의 반사망원경을 갖춰 개관 당시 시민 천문대로는 국내 최대 규모를 자랑했다고. “사실 렌즈 사이즈가 중요한 것은 아니에요. 기상 조건에 따라 관측할 수 있는 별자리가 달라지니까요.” 낮에는 7개의 망원경이 설치된 보조 관측실에서 수려한 다도해의 풍경과 함께 태양의 흑점을 관찰할 수 있다. 종종 해무가 끼는 탓에 시야가 확보되지 않은 날도 있지만. “오늘은 날씨가 썩 좋은 편은 아니네요. 동쪽 방향으로 황소자리와 오리온자리 정도를 관측할 수 있겠어요.” 망원경 렌즈 너머로 지구에서 수광년 떨어진 곳에 있는 별 하나가 희미하게 반짝인다. 우수수 은하수가 쏟아지는 밤하늘을 기대했다면 조금 실망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적막한 바다와 녹동항의 야경이 사방을 가득 채운 가운데, 별빛이 아스라이 깜빡이는 밤하늘은 잠시나마 일상의 상념을 지우기에 충분하다.

장기산 정상에 자리한 고흥우주천문과학관 주관측실의 반사망원경. ⓒ 오작


풍요로운 겨울 바다


흔히 반도를 3면이 바다에 접한 곳이라 일컫지만, 고흥반도에서는 수백 면이라고 해야 옳을 듯하다. 리아스식해안을 따라 달리면 시시각각 다른 방향에서 입체적으로 바다와 마주치게 되니 말이다. 고흥 내륙 한복판을 통과하는 855번 지방도로를 지나 해창만 방조제에서 77번 국도에 합류하면 본격적으로 잔잔한 남해 바다가 펼쳐진다. 구불구불하게 섬 남쪽을 향해 이어진 도로는 포두면 남성리에 이르러 두 갈래로 나뉜다. 이곳에서 77번 국도를 계속 따라가면 고흥의 남쪽 해안을, 15번 국도로 갈아타면 고흥 동남쪽 끄트머리에 이어져 있는 나로도로 향한다. 내나로도와 외나로도는 모두 다리로 이어져 있어 사실상 고흥과 하나로 연결된 육지나 다름없다. 두 섬을 통칭해 부르는 나로도는 고흥에서 가장 잘 알려진 전국구 명소일 것이다. 2013년 외나로도의 나로우주센터에서 국내 최초로 로켓 발사에 성공하면서 세간의 주목을 한몸에 받았으니까. 2018년 국내 자체 기술로 완성한 로켓 시험 발사까지 성공하면 이곳은 우리나라 우주 산업의 새 역사를 쓰게 된다.

우주의 원리를 살펴볼 수 있는 나로우주센터의 우주과학관.

사실 100여 년 전의 외나로도 역시 지금 못지않은 위상을 자랑했다. 일제강점기에 수백 척의 배가 외나로도항을 오가며 인근 청정 해역에서 잡은 삼치, 장어, 새우 등이 산처럼 쌓인 대규모 파시가 열렸기 때문이다. 해방 이후에도 수산물 거래가 활발하게 이뤄졌지만, 차츰 교역량이 줄어 번창하던 외나로도항의 풍경은 이제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더 이상 과거처럼 삼치로 만선을 이룬 배가 매일같이 항구에 들어오진 않는다. 그래도 겨울철 고흥 앞바다가 가장 풍요로운 시기라는 사실은 여전하다. 무게가 족히 3킬로그램이 나가는 큼직한 삼치와 살이 실하게 오른 새우, 알이 굵은 굴 그리고 미역과 톳 등 갖가지 해조류가 제철을 맞았다. 인근 여수나 장흥, 완도 등에서 명성을 쌓아온 수많은 해산물 또한 고흥에서 건너간 것이 다수를 차지한다.

크고 작은 만으로 가득한 고흥 앞바다는 겨울철 어획량이 풍족하다.

외나로도항 주변에는 고흥의 겨울 별미를 맛볼 수 있는 식당이 몇몇 자리한다. 골목 안쪽에 간판도 제대로 갖추지 않은 ‘먹는이야기’는 현지인이 즐겨 찾는 사랑방 같은 곳. 할머니 혼자 조촐하게 운영하는 식당으로 메뉴판이 따로 없다. “동네 사람들끼리 소박하게 술 한잔 하기 좋은 곳인디, 어떻게 여길 알고 들어왔소?” 바로 옆 테이블에서 거나하게 술상을 벌인 동네 주민이 넌지시 말을 건넨다. 식당의 시스템은 통영의 다찌집을 떠올리게 한다. 주문을 하지 않더라도 삼치회와 서대회, 낙지찜, 생굴 등 맛깔나는 제철 해산물 요리가 테이블 위로 척척 올라온다. 기름이 적당이 차오른 삼치회가 입안에서 부드럽게 녹는 것은 물론이고, 세 가지의 싱싱한 굴 요리는 저마다 다른 식감을 자랑한다. 이 같은 항구 식당의 넉넉한 인심 역시 고흥 겨울 여행의 특권이다.

삼치회는 겨울철 나로도 최고의 별미다.


다시 해가 차오르고


나로도의 진가는 하루의 시작과 끝 무렵에 알게 된다. 동서로 올록볼록하게 만을 형성한 내나로도의 지형 덕분에 바다 너머로 펼쳐지는 환상적인 일몰과 일출을 동시에 만날 수 있다. 형제섬농원 앞 자그마한 해변에선 나란히 떠 있는 2개의 무인도 형제섬이 보인다. 매일 저녁 이 섬 너머로 일몰이 은은하게 깔린다. 달이 차오르고 바닷물이 조금씩 들어오면서 층층이 그러데이션을 이룬 일몰은 지나간 기억을 하나둘 떠올리게 만든다. 저무는 해를 등지고 반대편 방향으로 5분 남짓 걸으면 닿을 수 있는 동백도 방면의 갯벌이 일출 포인트. 이를 모두 누리기 위해선 결국 하룻밤을 나로도에서 보내야 한다.


동백도를 마주보고 있는 언덕에는 제각각 다른 방향을 바라보는 새하얀 집이 듬성듬성 자리한다. 그중에 최화준 대표가 북스테이로 운영하는 ‘가고파.그.집’이 있다. 3채의 가옥으로 이뤄진 이곳은 당초 고향인 고흥으로 귀향한 부모님을 비롯해 이모, 사촌 누나 등 일가친척이 전원 생활을 하기 위해 지은 집이었다. 그러다가 2016년 여름, 부모님을 제외한 나머지 친척의 고흥 이주가 미뤄졌고, 빈방을 렌트하게 된 것이다. “단지 하루 머물고 떠나는 숙소가 아니길 바랐어요. 자연을 벗삼아 느긋하게 책장을 넘길 수 있는 공간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렇게 그는 서울의 독서 모임에서 만난 윤형근 씨와 함께 가고파.그.집을 북스테이 콘셉트로 운영하기 시작했다. 하얀 캔버스처럼 단아한 집 안에는 널찍하게 통유리가 설치되어 있어 내나로도 앞바다의 너른 풍광이 작품처럼 내다보인다.


가고파.그.집에서 카페 겸 라이브러리로 사용하는 올 더 네이처(All The Nature)에는 기부 받은 책이 서가에 꼽혀 있으며, 필사를 위한 원고지도 마련해놓았다. 책을 테마로 한 북스테이치고는 서가에 빈 공간이 제법 많다. “책을 좀 더 줄일까 해요. 물론 여느 책방처럼 서가를 책으로 가득 채운 공간으로 꾸밀 수도 있겠죠. 하지만 누군가에게 취향을 강요하고 싶지는 않아요.” 대신 이곳은 투숙객이 원하는 책을 요청하면 사전에 구매해주는 ‘북 앤드 베드(Book and Bed)’ 프로모션을 진행한다. 모던하게 꾸민 객실이나 테라스 혹은 햇살이 비치는 올 더 네이처의 의자에 앉아 자신이 원하던 책을 읽고 짧은 서평을 남겨 다른 투숙객에게 남기는 식이다. 언덕 아래로 외떨어진 집은 현재 윤형근 씨가 머무는 공간. “곧 형근 씨가 프랑스로 떠날 예정인데, 저 집을 1인 도서관 객실로 만들어보면 어떨까 싶어요. 오롯이 책과 하루를 보낼 수 있는 곳으로요.”

내나로도의 주변 풍광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도록 설계한 가고파.그.집. ⓒ 오작

적요가 감도는 어둑한 이른 아침, 가고파.그.집 주변을 둘러싼 리아스식해안이 서서히 윤곽을 드러낸다. 집아래 길가로 내려가자 밤사이 물이 빠져나간 갯벌 너머로 동백섬의 실루엣이 차츰 선명해진다. 저 멀리 수평선에서는 서서히 진홍빛 여명이 밝아오고 물 위에선 힘차게 해가 차오르며 나로도 안으로 보드라운 빛줄기가 감싼다. 시간이 넉넉한 이라면 가고파.그.집에 하루쯤 더 머물러봐도 좋겠다. 태평하게 독서 삼매경에 빠지고, 저녁에는 은은한 노을이, 이른 아침에는 차분한 일출이 눈앞에 펼쳐지는 이곳에서라면 해묵은 기억을 완전히 털어내고 산뜻한 새 기운을 얻게 될 것이다.

내나로도의 가고파.그.집 아래로 형성된 갯벌 너머로 여명이 밝아오고 있다. ⓒ 오작


사슴 섬 건너 예술 섬


고흥 연안에는 크고 작은 160개의 섬이 점점이 흩어져 있다. 이는 남해안에 면한 지역의 숙명과도 같다. 동쪽의 나로도처럼 서쪽에는 다리로 연결된 섬이 있다. 먼저 고흥을 찾은 적이 없더라도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소록도. 일제강점기 당시 한센인을 강제 수용한 서글픈 역사를 품고 있는 섬이다.


소록도 동쪽에는 지난해 새하얀 외벽에 테라코타 지붕을 얹어 재단장을 마친 소록도성당이 자리한다. 성당 안에는 국내 유일의 돔형 스테인드글라스를 설치했다. “이 스테인드글라스에는 소록도의 역사가 아로새겨 있어요. 붕대로 감은 십자가는 한센병 환자를, 녹색 삼각형은 소록도를 그리고 눈물은 하느님을 의미하죠.” 소록도성당의 김연준 주임 신부가 설명한다. 12년 전 보좌신부로 처음 소록도를 찾은 그는 당시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한센병 환자들은 일반인보다 더 삶의 기쁨을 알고 있는 듯했어요.” 소록도에 한센병 환자를 수용하는 병원이 들어선 지 지난해로 100년이 됐다. “과거의 아픔을 이야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제는 그 상처를 치유한 이들의 이야기에 주목해야 할 때라고 생각해요.” 그는 소록도에서 약 반세기가량 머물며 한센병 환자를 돕고 고국 오스트리아로 돌아간 마리안느 슈퇴거(Marianne Stöger)와 마가렛 피사렉(Margareth Pissarek) 할머니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제작에 힘을 보태는 중이다.

한때 6,000명에 이르던 소록도의 한센병 환자는 오늘날 500명 정도로 줄었다. 의학의 발달에 따라 한센병은 완치가 가능해졌고, 이제는 노환이 오거나 병세가 심한 환자가 요양을 위해 머문다. 소록도성당을 비롯해 소록도병원 그리고 한센병 환자를 동원해 조성한 중앙공원은 일반인에게 개방 중이다. 한센병 환자를 격리시킨 부락, 그들이 이용하던 선창 그리고 환자와 자녀가 먼발치를 두고 만나던 수탄장 거리까지 섬 곳곳을 거닐다 보면 현실을 벗어난 세계를 부유하는 기분이 든다. 이는 오랜 세월 세상과 단절하면서 과거에 머문 듯 섬의 때묻지 않은 풍광이 한몫했을 것이다. 문득 소록도가 ‘아기사슴(小鹿)’ 섬이란 사실이 떠오른다.

소록도에 머문 사람들의 초상을 모자이크로 꾸민 벽화 . ⓒ 오작

‘지붕 없는 미술관’은 얼마 전부터 고흥군이 내세운 캐치프레이즈. 지역 곳곳의 빼어난 풍광을 은유적으로 담은 표현일 테지만 이를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일단 소록도 너머의 거금도로 향하자. 섬 서쪽의 신양선착장과 마주보고 있는 연홍도가 바로 그 현장이다. 10명이 간신히 탈 수 있는 연홍호는 500미터 정도 떨어진 선착장과 연홍도 사이를 주기적으로 오가는 다리 역할을 한다. 50가구 남짓이 살고 있는 이 아담한 섬에는 10여 년 전, 옛 초등학교 건물을 개조한 미술관이 문을 열었다. 남도문화예술원에 소속된 서양화가의 작품을 전시하는 연홍미술관. 그러나 2012년 태풍 볼라벤이 섬 전체를 휩쓸면서 미술관을 크게 훼손했고, 한동안 정상적으로 운영하지 못했다. “당시에는 정말이지 그대로 수장되는 줄 알았어요.” 미술관 복원 공사를 살피던 연홍미술관의 선호남 관장이 말한다. 올봄 공사를 완전히 마치면 미술관은 연홍도의 변화를 이끌 예정이다. 전라남도에서 연홍도를 ‘가고 싶은 섬’ 프로젝트 중 하나로 선정하면서 미술관 단장과 더불어 마을 담장에 주민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마을 카페와 공방이 들어선 예술의 섬으로 변모하게 된다.

버려진 김 공장도 연홍도에선 예술 작품의 소재가 된다. ⓒ 오작

“일본의 나오시마(直島)도 처음에는 쓰레기로 가득한 섬이었다고 해요. 연홍도 역시 다도해상의 평범한 섬에 불과했지만, 미술관이 들어선 이후 이렇게 변화가 찾아왔어요. 머지않아 여러 작가들이 공공 미술 작품으로 섬 곳곳을 채울 거예요.” 선호남 관장이 말한 변화는 서서히 진행 중이다. 선착장과 바다 한복판에는 연홍도를 주제로 한 조형물을 설치했고, 미술관 인근의 옛 김 공장은 알록달록한 도트 무늬로 갈아입었다. 그렇다고 이 머나먼 작은 섬에 요란한 변화가 올 거란 기대는 하지 않는다. 지금의 안온한 풍경을 잘 간직한 채 누군가에게 예술적 영감을, 다른 누군가에게 작은 위로를 건네는 섬으로 기억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고흥의 다른 여느 곳처럼.

연홍미술관 앞바다에 설치된 거대한 물고기 조형물. ⓒ 오작


 고현 · 사진 오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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