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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더로드 Feb 10. 2017

모든 몽상가는 파타고니아에 온다

All dremers come to Patagonia

포르투갈의 탐험가 마젤란이 처음 남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했을 때, 그는 포효하는 거인 파타곤(Patagon)을 보았다. 그 후 수백 년간 사람들은 꿈꾸듯 파타고니아로 떠났다.

파타고니아의 이주민은 대농장 에스텐시아를 세워 목축을 시작했다. © 최남용

파타고니아에는 왕이 있다. 아라우카니아 파타고니아 왕국(The Kingdom of Araucania and Patagonia)의 왕. 한 몽상가가 꿈꾸던, 존재하는 땅의 존재하지 않는 왕. 1860년, 프랑스 도르도뉴(Dordogne)의 한 시골 마을 출신 변호사 오렐리 앙투안 드 투냉(Orellie-Antoine de Tounens)은 꿈을 찾아 배를 타고 칠레에 도착했다. 대부분의 유럽 인에게는 아직 낯선 땅이었다. 몽상가적 기질이 다분하던 그가 진정 원하던 일이었을까? 그는 우연치 않게 원주민 마푸체(Mapuche) 족 추장들의 신임을 얻어 대표로 추대됐다. 칠레와 아르헨티나 남쪽 지역에 걸쳐 거주하던 마푸체 족은 아라우카니아 어(Araucanian)를 쓰는 원주민 부족 중 가장 큰 무리였고, 항상 정복자에 대항해 용감하게 투쟁해왔다. 잉카제국도 그들을 제압하지 못했다. 무슨 연유로 마푸체 족이 앙투안을 추대했는지는 알 수 없다. 메시아의 전설을 순진하게 믿었을 수도 있고, 프랑스 인의 힘을 빌려 자신들을 핍박하던 칠레와 아르헨티나에 대항하려는 고도의 전략이었을 수도 있다. 혹은 한 몽상가의 꿈에 호기롭게 동조한 것일지도 모른다. 희대의 에피소드처럼 들리는 사건이지만, 파타고니아에서 몽상은 종종 현실이 된다.


앙투안의 몽상은 거대했다. 그는 아르헨티나 콜로라도 강 남단의 파타고니아와 칠레 비오비오 강(Rio Biobio) 이남의 아라우카니아 땅을 영토 삼아 스스로 입헌군주제 국가를 공표하며 왕위에 올랐다. 아라우카니아 파타고니아 왕국. 그는 이 왕국을 누벨 프랑스(Nouvelle France)라고 표현했다. 프랑스가 북아메리카를 지배할 때 명명한 것처럼 말이다. 곧이어 고국을 포함한 여러 나라에 왕국의 탄생을 알렸다. 비록 지방 신문에 몇 줄 실리는 게 전부였으나 몽상을 채우기에는 충분했다. 그는 칠레 정부에 대항하며 유럽의 사교계에 열띤 외교술을 펼치기도 했다. 몇몇 새로운 왕국에 동조하는 이도 있었으나 대부분의 반응은 비슷했다. 이런 미치광이.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출발한 비행기는 2시간 남짓 날아 에스켈(Esquel) 공항에 착륙한다. 추부트(Chubut) 주의 내륙 깊숙하게 자리한 이 도시는 파타고니아의 숙명인 듯, 황무지 바다에 떠 있는 섬 같다. 저 멀리 황갈색의 메마른 대지가 펼쳐지고, 방황하는 야생동물처럼 드문드문 관목이 흩어져 있다. 그 한편, 안데스산맥에서 뻗어 나온 줄기는 에스켈을 감싸 안으며 몇 겹의 육중한 장막을 세운다. 안데스의 능선을 거칠게 타고 넘어온 파타고니아의 바람은 에스켈의 조용한 거리에 들어와 라 트로치타(La Trochita) 철로에 버려진 종이 조각을 몇 번 흩날리다 사라질 것이다.


여행 작가 폴 서루(Paul Theroux)의 표현을 빌리자면, ‘거의 세상의 끝(almost at the end of the world)’으로 가는 협궤 열차. 1945년 운행을 시작한 라 트로치타는 사실상 아르헨티나의 끝을 향해 달렸다. 리오네그로 주(Rio Negro Province) 잉헤니에로 자코바치(Ingeniero Jacobacci)를 출발해 14시간을 달려 종착지 에스켈까지. 부에노스아이레스부터 무려 1,800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곳이다. 1979년 발간된 서루의 여행기 <낡은 파타고니아 특급열차(The Old Patagonian Express)>는 전 세계 배낭여행자에게 환상을 심어줄 수 밖에 없었다. 증기기관차와 세상의 끝이라는, 이 두 가지 클리셰에 현혹되지 않을 여행자가 과연 어디 있을까. 더군다나 서루의 문장은 떠나야 하는 자의 욕망을 한껏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특히 그의 책에서 다음과 같은 문장을 읽을 때면 말이다. “혼자, 혼자. 이것은 성공의 증거와도 같았다. 이 고독한 조건에 도달하기 위해 나는 아주 멀리 멀리 여행한 것이었다.”

협궤 기관차 라 트로치타의 종착지인 에스켈 역. © 최남용

에스켈의 기차역에는 낡은 화물차와 객실 차량 몇 대가 서 있다. 플랫폼은 텅 비었다. 길게 뻗은 75센티미터 넓이의 협궤 철로만 오후의 강렬한 태양 아래에서 반짝인다. 라 트로치타는 보이지 않는다. 아마 어딘가에 탈이 나 정비 중인 듯하다. 모두 20세기 초반에 생산된 라 트로치타의 기관차는 불협화음을 뿜어내는 증기기관에 아직까지 의지한다. 하루에 단 한 번, 불과 16킬로미터 떨어진 나우엘 판 역(Nahuel Pan Station)까지만. 파타고니아의 전설을 찾아온 여행객을 위해 가까스로 노쇠한 몸을 움직이는 것이다. 역사에 들어가니 허름한 붉은색 점퍼에 청바지를 입은 사내가 슬그머니 나타난다. 그러고는 벽에 붙어 있는 라 트로치타의 옛 사진을 가리키며 스페인 어로 설명을 늘어놓는다. 그의 생김새는 안데스 지역 원주민의 혈통을 이어받은 듯하다.

양모는 파타고니아 지역의 주요 생산품이다. © 최남용

19세기 중반, 대서양을 건너온 초기 웨일스 이주민은 파타고니아의 추부트 깊은 곳 안데스산맥 인근까지 들어와 신세계를 꿈꿨다. 에스켈과 이웃 마을 트레벨린(Trevelin)은 그때 세워졌다. 그후 그리스 인, 폴란드 인, 우크라이나 인, 터키 인, 미국 인 등이 몽상을 이어받는다. 광부, 농부, 협잡꾼, 퇴역 군인, 도망자, 부치 캐시디와 선댄스 키드 같은 현상범이 파타고니아에 들어왔다. 그중 일부는 황무지에 찾아와 협궤 철로를 놓는 고단한 노역에 투입되기도 했는데, 또 몇몇은 정착해 원주민과 가정을 이뤘다. 통이 넓은 봄바차스 데 캄포(Bombachas de Campo) 바지와 보이나스 엘로세기(Boinas Elosegui) 베레모를 쓴 금발의 늙은 가우초를 보라. 신대륙에서의 새로운 삶은 파타고니아의 후손을 낳았다. 그러니 어떤 이에게는 이곳이 세상의 끝이 아니라, 삶과 여행의 출발점이다.


브루스 채트윈(Bruce Chatwin)은 절반은 몽상적이고 절반은 노골적인 여행기 <파타고니아>에 이렇게 썼다. “파타고니아 사막은 모래와 자갈이 아니라 부러지면 고약한 냄새가 나는 회색 가시덤불로 이루어진 사막이다.아라비아사막과 달리 영혼을 극적으로 고양시켜주는 곳이 아님에도, 그곳은 인간 체험의 기록들 속에서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로스 알레르세스 국립공원(Parque Nacional Los Alerces)의 비포장도로에서 남영호 탐험가가 자전거를 세운다. “이렇게 먼 곳에서 만났는데, 제 꼴이 말이 아니네요.” 멋쩍은 듯 웃으며 그가 말한다. 얼굴은 확연히 그을렸고, 온몸은 흙먼지로 뒤덮였다. 지금까지 그는 전 세계 곳곳의 사막을 1만 킬로미터 이상 걷거나 뛰고, 자전거를 타며 가로질렀다. 약 1년 전에는 멕시코와 미국 사이에 놓인 치와와(Chihuahua) 사막을 1,200킬로미터가량 팻바이크를 타고 건넜다. 이번에는 파타고니아의 북쪽 끝 도무요(Domuyo)부터 남쪽 끝 우수아이아(Ushuaia)까지 4명의 팀원과 함께 무동력 종단에 도전하고 있다. 총거리 3,400킬로미터로, 그의 여정에는 고산과 계곡, 빙하와 해협, 황무지가 차례를 기다린다. 무엇보다도 익숙한 사막도 함께. 아무런 문제가 없다면, 크리스마스에는 꿈을 이루고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돌아가 샴페인을 터뜨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이따가 봐요.” 잠시 숨을 고르던 남영호 탐험가는 다시 페달을 밟는다. 자갈길을 가르는 파열음이 흩어지는가 싶더니 그의 모습이 서서히 멀어져간다.


결말을 들려줄 수 없는 도전과는 별개로, 가없이 짙은 녹음과 시리도록 투명한 호수가 드넓게 펼쳐진 로스 알레르세스 국립공원은 평화롭기 그지없다. 칠레와 안데스산맥을 두고 맞닿은 이 일대는 불과 몇 킬로미터 밖의 자연환경과 판이하게 다르다. 지구 상에서 가장 오랫동안 생명을 유지하는 수목 중 하나인 알레르케(Alerce) 나무가 공원의 조밀한 숲을 이뤄 파타고니아의 열기를 식혀주고 있다. 50미터 높이까지 자라는 몇몇 알레르케의 수령은 3,000년이 넘는다고 한다. 황량함에 익숙한 현지인에게 이 공원은 떼놓을 수 없는 오아시스다. 호수변 곳곳에 픽업 트럭을 세워놓고 휴식과 물놀이를 즐긴다. 공원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거인(patagon)의 땅’이라는 별명처럼 우뚝 솟은 나무 아래로 서서히 어둠이 내려앉는다. 겹겹의 가지를 펼친 거목 사이로 빛과 그림자가 한없이 일렁인다. 아라야네스(Arrayanes) 강 옆 캠핑장에서는 말 몇 마리가 어슬렁거리고 있다. 어둠이 완전히 내리자 하늘에는 억만의 별이 충돌하듯 깨어나고, 파타고니아의 밤이 연기처럼 일어난다.

안데스 산맥에 자리한 로스 알레스사스 국립공원으로 향하며 짙푸르게 변화하는 풍경을 발견한다. © 허태우

“코모도로리바다비아(Comodoro Rivadavia)에서는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여기서 1,000킬로미터 떨어진 바이아블랑카(Bahia Blanca)에서는 20분 후에 두 번째 메시지를 포착했다. ‘하강하고 있음. 구름 속으로 들어감???.’” 현재 시각, 위치 그리고 이동 상황을 정리한 짧은 메시지는 이제 도착하지 않는다. 생텍쥐페리의 소설 <야간비행>에서 우편 배달기는 파타고니아 상공을 뒤덮은 폭풍우를 뚫지 못하고 추락하고 만다. 작가가 무모함과 용기의 차이를 시험하는 무대로 파타고니아를 끌어들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작은 불빛 하나가 생사의 열쇠로 작용하는 땅에서 용기는 무모함을 넘어서야 하니까.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저 소박한 별 하나는 외딴집 1채다.” 여행자는 수십 킬로미터 바깥에서 일순간 빛나는 등불을 보며 안도한다. 자신이 갈 수 있는 길을 찾았기 때문이다.


오후 5시 10분. 루타 40(Ruta 40)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는 2층 버스가 에스켈 버스터미널을 출발한다.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긴 국도 루타 40은 북쪽 끝 후후이 주(Jujuy Province)의 국경 마을 라 키아카(La Quiaca)에서 남쪽 끝 산타크루즈 주(Santa Cruz Province)의 리오가예고스(Rio Gallegos)까지 5,000여 킬로미터를 잇는다. 일단 도로 위에 들어서는 순간, 비현실적인 대지의 풍경과 왕복 2차선 도로는 무한 반복되는 다큐멘터리처럼 이어진다. 승객 50여 명을 태운 2층 버스는 파타고니아에 작은 왕국이라도 세우려는 독립군처럼 목적지를 향해 전진할 뿐이다.


6시 30분, 데카(Tecka) 도착. 7시 40분, 고베르나 도르 코스타(Gobernador Costa) 도착. 저녁 8시, 아직도 북서쪽 지평선 위에 해가 또렷하게 걸려 있다. 마치 한여름의 오후 5시처럼. 버스 안의 몸집 좋은 승무원이 차갑게 식은 도시락을 나눠준다. 저녁 12시, 파타고니아 서부의 주요 개척 도시 중 1곳인 페리토 모레노(Perito Moreno) 도착. 이미 사방은 어둠 속에 들어와 있고, 버스는 일정한 엔진 소리를 내며 밤을 새워 나아간다. 이곳에서부터 약 450킬로미터 떨어진 트레스 라고스(Tres Lagos) 사이에는 단 하나의 마을이 있고, 그곳의 인구는 100여 명에 불과하다. 아침 5시, 남동쪽 지평선이 누렇게 물들고 빛이 황폐한 선인장 군락을 감싼다. 아침 7시, 루타 40을 잠시 벗어난 버스는 25번 국도 변 마을 고베르나도르 그레고레스(Gobernador Gregores)에 멈춰 서서 우편물을 싣고 내린다. 아침 8시 30분, 루타 40의 비포장 구간에 정지하더니 아침 식사를 나눠준다. 파타고니아의 바람이 버스를 주기적으로 세차게 흔들어댄다. 황금처럼 타오르는 황야 한복판의 버스 안에서, 여행자들은 온갖 상상이 부풀어 올라 마술적 사실주의에 빠져들지 모른다.

총길이 5,140km에 달하는 도로 루타 40은 세상의 끝과 끝을 연결하는 것 같다. © 최남용

차창 밖으로 건초와 관목이 고개를 숙이고 풀 더미가 세포처럼 증식해 자리 잡은 땅은 지평선마저 삼키려고 한다. 간혹 저 멀리 능선은 메사(mesa)가 되었다가 여러 곡선을 그으며 안데스산맥을 덮은 먹구름 속으로 사라진다. 신기루처럼 서 있는 미루나무 몇 그루가 대농장 에스탄시아(Estancia)의 존재를 알린다. 에스탄시아의 저택은 고독을 과시하듯 뾰족한 지붕 아래 서 있고, 수만 개의 말뚝을 연결한 펜스가 이를 감싼다. 마치 괘종시계의 분침처럼 일정한 간격으로 지평선까지 늘어선 말뚝은 개척자의 지난 시간을 선연하게 표시한다. 말과 소, 양, 과나코 무리는 그 안쪽에서 너무 많은 시간의 경계를 찾지 못하고 헤매고 말 것이다. 오전 11시 40분, 트레스 라고스 도착. 서쪽을 바라보니 멀리 안데스산맥의 잔재가 맹수 이빨을 드러내듯 융기하고, 빛은 운무에 막혀 수십 광년의 돌진을 멈춘다.

파타고니아 남부로 다가갈수록 바람은 거세지고 낮은 관목이 일정한 방향으로 고개를 숙인다. © 최남용

목적지 엘 찰텐(El Chalten)이 얼마 남지 않았다.비 에드마(Viedma) 호수를 지날 때, 건너편 창가에 앉아 있던 젊은 아르헨티나 여행자가 띄엄띄엄 영어로 말한다. “저기를 봐. 비에드마 빙하(Viedma Glacier)야. 오른쪽으로 피츠로이(Fitz Roy) 봉우리가 있는데, 오늘도 구름에 덮여 보이지 않네. 날씨 때문에 쉽게 볼 수 있는 날이 드물지.” 비에드마 호수 위로 얼음 조각이 떠다니고 있다. 버스는 계속 전진한다. 여전히 몽상이 떠돌고 바람이 떠돈다.

라구나 데 로스 트레스에서 바라보는 피츠로이. 파타고니아를 대표하는 봉우리다. © 최남용

칠레와 아르헨티나는 앙투안을 붙잡아 세 번이나 국외로 추방했다. 아무리 미치광이의 일탈이라고 해도 그는 식민제국으로 위세를 떨치던 프랑스 국민이었다. 자칫 일이 꼬이면 프랑스가 무슨 트집을 잡아 왕국을 차지해버릴지도 모르는 일. 결국 그는 자신의 왕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도르도뉴의 시골 마을에서 평범하게 생을 마감했다. 그렇다고 왕국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니, 실존하지도 않았으니 사라질 일도 없었겠지만. 프랑스의 부르주아 몽상가들은 아라우카니아 파타고니아 왕국의 왕가와 귀족 자리를 전리품처럼 탐했다. 매관으로 왕위를 계승했고 귀족 작위를 주고받았다. 왕국의 활동과 소식을 전하는 허술한 공식 웹사이트는 2014년 여섯 번째 왕의 죽음을 알렸고 일곱 번째 왕의 즉위도 공표했다. 그들은 표면적으로 아라우카니아 파타고니아 왕국의 망명 정부다. 그와 동시에 현재 남아메리카에 거주하는 100만 여 명의 마푸체 후손을 대표해 원주민의 권리를 찾는 국제 활동을 벌인다고 선전하고 있다. 일곱 번째 군주의 자리를 이어받은 앙투안 4세(Prince Antoine IV)는 자신의 왕국 어디에서 그들을 맞이할 수 있을까?

파타고니아 대지에 물드는 석양을 받으며 낡은 버스가 주민을 실어 나른다. 추부트 주 내륙 깊은 오지에서는 하루에 한 번씩 다니는 버스가 유일한 대중교통 수단이다. © 최남용



▶︎ 모든 몽상가는 파타고니아에 온다 PART2

▶︎ 파타고니아 여행 노하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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