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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더로드 Feb 20. 2017

합천에서 보물 찾기

Treasures of Hapcheon

홍류동 계곡을 따라 억겁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돌 위에 새긴 1,000년 전 삶과 만물을 깨우는 해인사의 새벽, 다라국의 흔적을 좇는 합천 보물의 기록

최치원의 칠언절구 시가 4글자만 남아 있는데, 그 주변으로 그를 동경하던 이들이 새긴 석각이 빼곡하다. ⓒ 김경수


돌에 새긴 마음


널찍한 붓대 하나를 한쪽 주머니에 꽂고 뒷짐을 쥔 채 저멀리 풍경을 빠르게 훑는다. “어, 차 조심!” 짧게 외치며 도로변 아래 너럭바위로 경쾌하게 뛰어내리는 이는 스스로를 ‘돌도사’라 칭하는 산승, 종현 스님이다. 홍류동 계곡 주변의 석각을 찾아 가야산 바위를 3년간 홀로 좇아 다녔으니 과연 돌도사라 불릴 만하다. 날렵한 몸짓의 스님 뒤를 쫓는 것도 쉽지 않지만 축지법을 쓰듯 계곡을 뛰어 다니니 감히 따라 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이 길을 찾는 데 얼마나 오래 걸렸다고. 계속 바위만 바라보면 보여요. 그림자가 지나칠 때, 햇살이 흐드러질 때, 소나무 이파리가 떨어져 석각을 뒤덮을 때 비로소 글자가 보이지.” 스님이 흩어진 바위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한다. 새하얀 포말을 흩뿌리며 거침없이 쏟아지는 계곡의 외침 때문에 목소리가 허공에 부서진다. 안전한 길을 찾아 더듬거리며 이동하는 발걸음 뒤로 칼날 같은 바람이 머리카락을 곤두세운다. “이건 아무것도 아니야. 폭풍이 칠 때 홍류동 계곡을 와야 해요. 물이 서서 내려오거든. 홍류동 계곡 소리에 세상의 시비가 다 끊긴다고 노래한 고운 최치원의 둔세시(遁世詩)가 바로 여기에 있지요.”

석각 기록을 좇아 3년간 홍류동 계곡 반석을 뛰어다닌 종현 스님. 10년간 편집장을 지냈고, 현재 대구 도림사의 주지다. ⓒ 김경수

가야산국립공원에서 해인사 입구까지 4킬로미터가량 이어진 계곡은 치원대(致遠臺)에서 그 물길의 세기가 제법 꺾인다. 바로 이곳에 우리나라 문인의 시조로 평 가받는 최치원의 칠언절구 시 1편이 친필로 쓰여 있다. 평평한 바위에 음각으로 새긴 ‘광분(狂奔)’ ‘고교(故敎)’ 오로지 4글자만 겨우 남아 있는데, 해인사 역사서 <해인사지>를 집필한 지관 스님의 풀이에 따르면 내용은 이러하다. “미친 물 바위 치며 산을 울리어/ 지척에서 하는 말도 분간 못 하네/ 행여나 세상 시비 귀에 들릴까/ 흐르는 물 시켜 산을 감쌌네”


오후의 햇빛을 받은 암각은 선명하게 튀어 오른다. 천 년 전, 석각장이가 돌을 매만지고 두드리는 소리가 홍류동 계곡 전체를 뒤흔들었을 것이다. 최치원의 친필을 새겨 넣은 커다란 바위 주변으로 이름과 시구를 새긴 석각이 즐비하다. “최치원을 추앙하던 선비, 묵객, 문인들은 모두 여기 와서 이름을 남겨야 했을 거예요. 바위마다 거의 도배되어 있지요. 가족의 이름을 새기기도 하고, 시 1편을 쓰기도 하고요.” 한마디로 이곳은 가야산에서 생을 마감했다고 추정되는 최치원의 성지에 가깝다. 그를 존경하는 열혈 팬에게 그 성지를 찾아 추모시와 찬양시를 짓고 바위에 방명록을 남기는 일은 평생 한 번 있을 영광이었을터. 폭풍과 장마로 마모된 글자는 1700년대에 한 번 더 조각을 했는데, 최치원의 친필이 아니라는 논란은 반복되었다. 1994년, 당시 해인사 주지이던 지관 스님이 최초의 최치원 시가 여기 있다고 쓴 비를 바위 앞에 세워 논란의 종지부를 찍기 전까지 말이다. 과거 성주로 가던 길이던 홍류동 계곡은 이제 쭉 뻗은 도로가 그 옆을 가로지른다. 종현 스님은 도로 너머에 있는 치원대 맞은편 암벽으로 발걸음을 돌린다. 


도로를 향해 살짝 튀어나온 암벽에는 조선을 유교의 나라로 만든 학자 우암(尤庵) 송시열의 암각문이 늠름하게 햇살을 받고 있다. 최치원의 둔세시가 사라지는 것을 아쉬워한 송시열이 자신의 서체로 다시 새긴 흔적이다. 흥미로운 것은 조선 시대에 돌을 새기는 일을 주로 스님이 했다는 점이다. 숭유억불 정책이 만연하던 조선 시대에 스님은 홍류동 계곡을 찾은 묵객의 요청에 따라 바위에 각을 하고, 그것으로 불사를 하고 절 살림에 썼다고. 유교를 숭상하던 조선 선비가 치원대가 내려다보이는 농산정(籠山亭)에 둘러 앉아 단풍놀이와 물놀이를 하며 풍류 를 즐기다가 시 1편 지어 바위에 새기는 풍경이 머릿속에 그려지는 듯하다.

홍류동 계곡의 농산정과 치원대. ⓒ 김경수

“여기가 해인사로 올라가던 길목이거든. 조선 시대에 억불 정책이 있었지만 대장경판을 보관하던 해인사는 왕이 특별히 보호하던 사찰이기도 했지. 여기 보면 출입 을 통제하는 임금의 명령이 적혀 있어요. 오늘날로 말하면 ‘차량 통행 금지’ 표지판이야.” 종현 스님이 도롯가 암벽 중앙에 선명하게 드러난 암각을 짚으며 차례대로 읊는다. “하교(下敎) 남녀(藍輿) 필파(筆罷) 서정규(徐廷圭)” 풀이하면, ‘해인사는 성지이니 반드시 가마를 타고 다니는 행위를 파하라(금한다)’는 뜻이다. 1891년 법무민사국장을 지낸 서정규는 왕의 명령서를 기록한 실무 담당자 정도 되겠다. 딱히 표지판이라는 게 없던 시절 길목의 바위나 나무가 그 역할을 대신했을 것이다. 아스팔트 도로 한복판에 서 있어 무심코 지나치던 글자의 숨은 의미를 알아가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고개를 돌릴 때마다 저마다 역사를 품은 글자가 입체영화 안경을 쓴 것처럼 튀어 오른다.

수려한 서체의 주인공은 1712년 전후로  해인사에서 정진하던 화암 정혜 스님이다. 그 위에는 누군가가 최치원을 흠모하며 그의 시 맨 끝자의 음을 따서 지은 차운시가 새겨 있다. 

계곡의 우렁찬 소리를 들으며 신선이 남쪽을 향해 피리를 불었다는 취적봉으로 향한다. 암벽에는 밑그림만 남은 붓자국의 흔적이 미세하게 보이는데, 각을 미처 새기지 못한 이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취적봉에서 나무 덱으로 이어진 길을 따라가노라니 홍류동 계곡의 장쾌한 소리가 공간을 압도한다. 칼날 같은 바람의 흔들림이나 사람의 발걸음 소리는 계곡 앞에서 까마득하다. 너럭바위가 지천인 농산정과 달리 층층히 쌓인 결을 날카롭게 자른 듯 한 암벽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바로 홍류동 계곡의 하이라이트라 불리는 낙화담(落花潭)이다. “ 저런 절벽에 어떻게 석각을 새겼을까, 그저 감탄스럽죠. 대부분 관직자와 그의 가족 이름인데, 벼랑에 밧줄을 타고 내려와 글을 새겼다 고 합니다. 혹시 나무나 바위에 고정한 밧줄이 남아 있지 않을까 싶어 절벽 위에 올라가봤지만 흔적은 없었어요. 여기 매달려 글자를 새기는 모습이 빌딩에 매달려 유리창을 닦는 이처럼 보였겠지.” 지금이야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바위에 각을 하는 것이 금지되었지만, 1970년대까지만 해도 등반을 하면서 암벽에 이름을 새기는 직업이 있을 정도로 석각이 일반적이었다고. 옥빛 계곡 물 건너편에서 바라본 글자는 깊고 선명하다. 해인사 방향으로 올라갈수록 좀 더 날카롭고 깊게 새기는 일련의 흐름이 보인다. 돌을 다루는 방식과 형식도 세월에 따라 진화하는 것일 테다.


홍류동 계곡에 흩어진 석각은 무수히 많지만 최치원의 암각이나 유명 관직자를 제외하고 체계적으로 기록한 것은 없다. 종현 스님은 조선 선비의 여행 일지에 담긴 석각 이야기에 솔깃했다. 여행기에 나온 바위를 찾아 홍류동 계곡 주변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한 것. “1821년 문정유가 쓴 <유가야기(遊伽倻記)>는 그가 친구인 면섭, 입섭과 함께 가야산을 여행한 유람기예요. 그 일지를 보면 홍류동 계곡 반석 위에 3명의 이름을 당시 유행하던 서체인 팔분체(八分體)로 새겼다는 기록이 있거든. 내가 문정유가 되어 삼총사 여정을 따라 며칠을 샅샅이 찾은 거야. 여기쯤 있겠다 싶었는데, 딱 이름 새긴 반석이 보인 거지.” 종현 스님의 말소리가 빨라진다. 스스로 “시간이 많은 사람이라 가능했다”고 농을 하지만, 스님의 오랜 집념이 없었더라면 기록 문화로서 석각의 가치에 관해 진지하 게 생각할 기회가 없었을 듯. 300년 전 가야산 경치에 반한 젊은 선비의 기록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묘한 흥분감이 퍼진다. 마치 보이지 않는 거대한 끈이 과거와 현재를 단단하게 연결하고 있는 것처럼.

도롯가 옆 돌에 새겨진 이른바 ‘가마 통행 금지’ 암각문. ⓒ 김경수


만물을 깨우는 소리


해발 1,430미터의 가야산 일대에 해인사와 크고 작은 암자가 자리하는데, 해인사는 매표소에서 약 1.5킬로미터 들어가야 만날 수 있다. 홍류동 계곡을 지나 소나무 그림자가 도로를 향해 아치형으로 구부러진 산길을 굽이굽이 올라간다. 길 위에 산고양이가 웅크리고 있다가 헤드라이트 불빛에 놀라 산으로 몸을 숨긴다. 만물의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칠흑 같은 밤, 푸른 달빛만이 아스라이 길을 내어 준다. 이른 새벽에 찾은 해인사의 봉황문은 아직 굳게 닫혀 있다. 일주문에서 봉황문에 이르는 길 양쪽으로 키 큰 소나무가 위풍당당하게 벽을 이루고, 해인사 창건의 역사와 나란히 했다는 느티나무 고사목이 둥치만 남아 불꽃처럼 솟아 있다. 작은 랜턴이 움직이는 것과 동시에 봉황문이 열리자 발가락으로 흙을 움켜쥐고 조심스럽게 사찰 내부로 들어간다. 강렬한 조명으로 어둠을 몰아내는 대적광전 앞에는 도량석(道場釋)을 준비하는 스님이 적막처럼 서 있다.

가야산의 해인사 일주문에서 본 봉황문. 가로수 가운데 1,200년 된 고사목이 자리한다. ⓒ 김경수

새벽 3시가 되자 목탁에 맞춰 스님이 불경을 읊으며 사찰을 돈다. 사찰의 아침을 깨우는 의식이다. 일정한 리듬의 목탁 소리는 산속 작은 암자 전체에 울려 퍼질 듯 강렬하면서 절도가 있다. 도량석이 끝나면 법당에 있는 종을 치며 게송을 읊는 종송(鐘頌)이 이어지는데, 그 장엄한 분위기 때문에 꼼짝 못하고 몸의 온 감각을 열게 된다. 만물을 깨우는 웅장한 소리가 어둠 속에서 오랫동안 퍼지고, 이어지는 운판(雲版), 법고(法鼓), 목어(木魚), 범종(梵鐘)을 두드리는 빠른 진동에 맞춰 심장이 함께 뛴다. 푸른 달빛과 선명하게 보이는 밤하늘 별, 아름다운 사찰의 산수화 아래 치르는 경건한 의식은 가야산을 넘어 합천 전체를 아우르는 듯하다. 


해인사는 대장경판과 그것을 봉안하고 있는 대장경고가 있는 것으로 유명하지만, 본래 화엄사상의 본거지 이자 불교의 근본 진리라고 하는 삼보(三寶)를 상징하는 사찰로 의미가 더 크다. 화재가 수차례 발생해 재건 이전의 모습만 못하다는 말도 들린다. 하지만 산속에 파묻힌 해인사의 신비로움, 산허리와 어우러진 건축물의 조화는 이곳에 오래 머물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한다. 대적광전 에는 비로자나불삼존상 앞에서 염주를 손에 쥐고 절을 하는 불자가 띄엄띄엄 앉아 있다. 매서운 추위가 불어닥친 새벽의 법당 안에 하얀 입김이 피어오른다. 스님 한 분이 두툼한 담요를 방석 아래 깔아주자 법당 안에는 오히려 다정한 온기가 흐른다. 레게 머리를 근사하게 묶은 푸른 눈의 서양인이 쭈뼛거리며 예불을 따르고 제법 올바른 방법으로 절을 한다. 낯이 익어 곰곰이 생각하니 한낮에 기타를 어깨에 메고 일주문에 들어서던 외국인이다. 요즘 사찰의 새로운 풍경이기도 하다. 꼬박 108배를 마치고 법당 문지방을 넘으니 허벅지가 후끈거린다. 대장경고 담장 너머 언덕 모퉁이로 올라가 해인사를 내려다본다. 아직 해를 맞지 않은 해인사의 나지막한 지붕이 밤바다에 너울대는 파도처럼 일렁인다. 맞은편에는 최치원이 은거했다고 전해지는 학사대가 아른거리고 멀리서 발걸음을 재촉하는 손짓이 허공 안에 허우적댄다.

봉황문에서 바라본 해인사 일주문. 봉황문에 모시고 있는  사천왕상 탱화는 불법을 보호하고 사찰을 지키는 역할을 한다. ⓒ 김경수

사실 해인사가 범인(凡人)의 입에서 본격적으로 오르내리기 시작한 것은 조계종 종정 성철 스님이 열반에 든 1993년 11월 4일 전후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 다”라는 법어로 유명한 성철 스님은 1936년에 출가해 해인사에서만 57년간 칩거하며 정진했다. 16년간 생식을 하고 8년 동안 눕지 않은 채 장좌불와(長坐不臥)로 오로지 구도에만 몰입한 스님의 행적은 많은 이에게 깊은 감동과 화두를 던졌다. 해인사 입구에서 홍류동 계곡으로 방향을 돌려 성철 스님 사리탑으로 향한다. 너른 양지에 빙 둘러 참배할 수 있는 원형 대좌를 두고 크기가 다른 반구 2개 위에 하나의 구를 오뚝이처럼 올려놓았는데, 기존에 보아온 일반적인 사리탑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누구보다 검소하고 번거로운 것을 싫어하시던 큰스님이 사리탑을 만들었다고 야단이나 치시지 않을까 모르겠다” 하고 상좌인 원택 스님이 말했지만, 그 덕분에 현재까지 성철 스님을 기리고 참배할 수 있으니 대중 입장에서는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성철 스님이 정진하던 백련암은 가야산의 부속 암자 중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다. 해인사에서 산길을 30분 정도 걸어 올라가면 도착하는데, 한파 때문인지 방문객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성철 스님은 3,000배를 하지 않으면 만나주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지요. 특히 고위 공무원일수록 더 까다로웠다고 해요. 그러면서도 아이들을 어찌나 좋아하는지 천진난만한 소년 같은 면도 있었습니다.” 해인사의 부속 암자인 보현암에서 정진한 지우 스님이 암자의 산비탈을 걸으며 설명한다. 가장 유명한 일화는 1977년 구마고속도로 개통식에 참석한 박정희 전 대통령이 해인사를 들렀을 때의 일이다. 당시 주지 스님이 백련암으로 올라와 대통령 영접을 부탁했지만 “나는 산에 사는 중인데, 대통령 만날 일이 없다 아이가.”(원택스님 <성철스님 시봉 이야기>)하고 단번에 거절했다고 한다. 왜 그토록 까다로울까 싶지만, 성철 스님의 생전 인터뷰를 읽으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부처님을 찾아왔으면 부처님부터 뵈라는 뜻입니다. 부처님을 정말로 뵈려면 3,000배는 해야지요. 부처님한테는 무엇보다도 신심이 제일입니다. 부처님을 알 때까지 절하는 정신이 중요한 겁니다. 그래야 부 처님이 ‘너 왔구나’ 하실 게 아니오.” 신심이 강한 불자는 백련암에 수일을 머물며 2만 배 이상의 기도 여정에 돌입 하기도 한다고. 또 백련암에서는 매년 대중을 상대로 아비라 기도 수련회를 연다. 기도와 참선을 병행하며 3박 4일간 정진하는 것으로 성철 스님이 생전에 권장하던 수행법 이기도 하다. 큰스님은 떠났지만 오렌지 불빛이 새어 나오는 백련암 도량에는 불공을 드리는 불자들의 기도가 끊임 없이 흘러나온다. 무언가를 참회하고 염원하는 각자의 간절한 마음이 산중에 아득하게 울러 퍼지고 머리 위로는 딱따구리가 열심히 나무를 쪼며 적요를 깨운다.

운판, 법고, 목어, 범종 소리가 만물을 깨우면 대적광전에서 새벽 예불이 시작된다. 세상에서 가장 빨리 하루를 맞이하는 사찰의 새벽 풍경. ⓒ 김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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