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돌담을 따라 고요한 골목엔 어여쁜 취향이 가득하다. 볕 잘 드는 카페에서 생강라테를 마신 뒤 손으로 찍어낸 레터프레스 카드를 고르고, 그림이 걸린 한옥에서 다정한 음식을 먹는다.
벽돌 담장을 두른 안뜰에는 키 큰 은행나무 1그루가 지난 세월을 알려준다. ‘춘곡의 집’이라는 현판이 달린 일제강점기 개량 한옥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인 춘곡 고희동이 1918년 직접 설계하고 41년간 살던 곳. 사라질 뻔한 옛 가옥을 시민 기금으로 복원했다. 고희동은 20세기 국내 회화로는 처음 문화재로 지정된 작품 <자화상>의 주인공. 저고리 앞섶을 풀어헤치고 부채질을 하는 파격적인 모습은 1915년 당시 화단에 적잖은 충격을 줬다. 그의 서양화는 단 3점만 남아 있는데, 모두 자화상이다. 가옥 안에는 남정 박노수, 간송 전형필 등의 후학 양성에 힘썼던 춘곡의 화실과 사랑방이 복원되어 있다.
ⓘ 무료, 수~일요일 10am~6pm, 월·화요일 휴무, 02 2148 4165.
붉은 벽돌 건물에 들어서자 황홀한 빛과 소리가 시선을 붙잡는다. 화이트 큐브 대신 나무 마룻바닥과 노출된 콘크리트 외벽, 회색 페인트칠을 해놓은 캐주얼한 전시 공간이 독특하다. 작품 또한 액자에 걸지 않고, 종이만 무심하게 붙어 있거나 바닥에 툭 던져놓는 등 과감하게 배치했다. 인사미술공간은 동시대 작가의 실험적 미술을 소개하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ARKO)가 운영하는 곳. 35세 이하의 젊은 작가를 발굴해 소개하며 회화, 영상, 설치 등 다양한 장르의 작업이 하나의 주제 아래 어우러져 있다. 3월 중순에는 한국예술창착아카데미 시각예술(큐레이터)분야 성과보고전 <착화점>이 열릴 예정.
ⓘ 무료, 11am~7pm, 일·월요일 휴무, 02 760 4722.
저고리의 길이가 짧아지고 리본처럼 커다란 고름을 달기 시작한 것은 한복이 파티복의 역할을 하던 20세기부터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 이노주단의 작업실에선 조선 초기 생활복으로 입던 전통 한복을 짓는다. 치마는 활동하기 쉽도록 허리에서 시작하고, 섶을 길게 빼 한쪽을 감싸도록 만든 저고리엔 짧고 가느다란 고름을 단다. 미국에서 패션을 전공한 오인경 디자이너는 전통에 가장 부합한 방식을 고집하면서도, 톡톡 튀는 아이디어를 더한 한복을 디자인한다. 면, 레이스 등 기성복에 적용하는 소재나 파격적인 패턴으로 한복에 재미를 주는 것이 특징. 특히 만화 캐릭터 스폰지밥이 그려진 저고리는 큰 인기를 얻었다고. 맞춤 한복이 기본이지만, 저고리의 깃을 떼내거나 치마의 길이를 과감하게 자른 생활 한복도 웹사이트(inohjudan.com)에서 기성복으로 만날 수 있다. ⓘ 맞춤 한복 130만 원부터, 11am~8pm, 일·월요일 휴무, 인스타그램 @inohjudan
디자이너 고래는 ‘사라지는 아름다운 것들’에 대한 애정을 듬뿍 담아 손수 문구를 만든다. 잡화점 옆에 마련한 작업실에서 그녀가 주로 하는 작업은 옛 인쇄 방식으로 카드 엽서를 꾹꾹 찍어내는 일. 프레스 기계로 글자 하나하나를 눌러 담는 레터프레스 카드에는 마음을 울리는 소중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 앞면에 적힌 문구와 카드 뒷면의 위트 있는 글귀를 찾아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가격대는 비교적 높은 편이지만, 수작업의 가치를 아는 이라면 마음에 쏙 드는 카드를 발견할 수 있을 듯. 사라지는 야생동물을 모티프로 디자인한 실버 주얼리와 오브제 등 메시지를 담은 다양한 소품도 만날 수 있다.
ⓘ 레터프레스 카드 1만2,000원부터, 목~토요일, 격주 수요일 12:30pm~8pm, 인스타그램 @designshop54
“고래는 깊은 바닷속 수천 킬로미터가 떨어진 곳에서도 서로 소통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처럼 마음을 전하는 물건을 만들고자 브랜드 이름을 ‘고래가 고래에게’라는 뜻의 웨일투웨일(whale2whale)이라고 정했어요. 고래 모양의 오브제는 세밀한 수작업으로 틀을 만든 후, 은을 부어 만든 인장이에요.”
- 디자인잡화점54의 디자이너 고래
마을버스를 타고 원서동 끝자락에 닿으면 ‘빨래터’라는 이름의 정류장에 이른다. 카페란드리는 조선시대 빨래터 자리에 있던 한옥을 개조한 경양식 레스토랑. 회화 작가 권신홍과 뮤지션 권용환 남매가 독특한 분위기의 공간을 연출했다. 동네의 고즈넉함을 닮은 나무 대문을 밀고 들어가면, 테이블 3개를 둔 아늑한 공간이 나온다. 오래된 건물 구조를 거의 손대지 않은 채 흰색만 칠했고, 은은한 조명과 기타, 권신홍 작가의 그림으로 꾸몄다. 남매가 어릴 적 먹던 기억을 살려 맛을 낸 경양식 돈가스가 이곳의 시그너처 메뉴다. 부드러운 고기와 비밀 레시피로 직접 끓인 소스의 궁합이 좋다. 맥주도 판매하며 예약은 필수다.
ⓘ 돈가스 1만2,000원, 골든에일 비어 5,500원, 12pm~10pm, 인스타그램 @laundry_seoul
창덕궁을 한눈에 담는 가장 쉬운 방법은 원서동 초입에 위치한 버거뱅으로 가는 것이다. 3층짜리 건물의 통유리창에는 층마다 각기 다른 풍경이 담긴다. 탁 트인 서울 하늘을 마주하며 창덕궁의 기와를 내려다볼 수 있는 3층이 명당. 버거를 시키면 샐러드와 감자튀김을 함께 내 끼니를 든든하게 채울 수 있다. 매일 직접 구워내는 브리오슈 번을 사용하고, 패티에는 100퍼센트 쇠고기 알목심만 넣는다. 식자재 본연의 맛을 중시해 자극적이지 않고 건강한 맛을 내는데, 버거 종류마다 치즈와 소스를 달리하는 세심함도 엿볼 수 있다. IPA 맥주와 에일 맥주를 구비했고, 직접 로스팅한 신선한 커피도 맛볼 수 있다.
ⓘ 더 버거뱅 버거 9,000원, 아메리카노 4,500원, 11am~9pm, 일요일 휴무, 인스타그램 @burger_bang
편안한 동네 카페가 되고자 시작한 동네커피는 어느덧 9년째 창덕궁길을 지키는 중이다. 손님은 친구가 됐고, 카페는 주민의 사랑방이 됐다. 볕이 잘 드는 따뜻한 카페 안에는 구석구석 동네에 대한 애정이 듬뿍 묻어난다. 이진영 대표가 직접 그린 그림과 사진은 물론, 손님이 그려주고 간 그림 등 창덕궁길의 다양한 풍경을 모아 한쪽 벽면을 갤러리처럼 꾸몄다. ‘벽을 빌려 드립니다’ 프로젝트를 통해 이웃 작가의 그림도 종종 전시한다. 대추청과 생강청에 따뜻한 우유를 섞어 만든 대추라테와 생강라테를 맛보자. 달콤하고 고소한 맛이 골목의 따스한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
ⓘ 대추라테 4,500원, 생강라테 5,000원, 11:30am~8pm, 일요일 휴무, 인스타그램 @dongnaecoffee
“친구 작업실에 놀러 오면서 창경궁길을 알게 됐습니다. 궁 옆으로 차분하고 고즈넉한 느낌의 골목을 걸으며, 마치 천국을 발견한 기분이 들었어요. 결국 이곳으로 이사를 왔고, 한적한 골목 한가운데에 카페를 열었지요. 처음엔 주택가에 카페를 내는 걸 주변 사람들이 만류했어요. 이웃 어르신도 좋지 않은 내색을 하셨죠. 하지만 상관하지 않고 손님이 있든 없든 꾸준히 자리를 지켰어요. 1년 반 정도 지난 후, 마음을 연 이웃이 찾아오기 시작했고 곳곳에 작업실을 겸한 소규모 가게가 늘어났습니다.
이 골목에는 조용히 혼자서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고 또는 영화 작업을 하시는 분이 많아요. 그래서 휙휙 바뀌는 여느 곳과 다르죠. 이웃끼리 카페에서 우연히 만나 커뮤니티를 형성하기도 했어요. 그때 기분이 정말 좋았습니다. ‘동네커피’가 누구든 편안하게 와서 관계를 맺는 공간이 되길 바랐거든요.
이 골목에서는 꼭 밤 산책을 하라고 추천하고 싶어요. 텅 빈 밤거리의 분위기가 아주 좋거든요. 최근엔 드라마 <도깨비>도 촬영했지요. 원서동 초입에 위치한 ‘천하보쌈’은 보쌈뿐 아니라 갖가지 찬도 다 맛이 좋은 곳이에요. 언제나 한결같이 미소 짓는 사장님을 보면서 손님을 대하는 태도를 많이 배우게 됩니다.”
론리플래닛 매거진 코리아와 함께 최고의 여행을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