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찰을 걷고, 이곳에 땅을 일구고 전통을 이어가는 이들의 삶을 만난다.
하늘과 맞닿은 너른 땅은 오래된 이야기를 들려준다.
“초록빛으로 가득한 들녘 끝은 아슴하게 멀었다. 그 가이없이 넓은 들의 끝과 끝은 눈길이 닿지 않아 마치도 하늘이 그대로 내려앉은 듯싶었다.” 조정래의 <아리랑>은 이렇게 시작된다. 하늘이 그대로 내려앉은 그 땅. 서해안 고속도로를 타고 쭉 뻗은 길을 내달린다. 잿빛 풍경이 차츰 초록빛으로 물들자 복잡했던 마음이 제자리를 찾는 것 같다. 군산과 김제의 경계를 가르는 만경강을 건너 서김제 톨게이트로 방향을 튼다. 조정래 작가의 표현은 과장이 아니다. 풍경이 그린 그림은 8할이 하늘이다. 차창 밖에 보이는 것이라곤 아득하게 펼쳐진 논, 직각의 구획마다 서 있는 전봇대, 듬성듬성 자리한 작은 촌락이 전부. 유난히 높은 하늘을 도화지 삼아 이따금 비행기가 흰 선을 긋고 지난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지평선이 펼쳐지는 곳, 김제다.
남북으로 뻗은 29번 국도를 따라 부량면으로 향한다. 충적평야인 부량은 85퍼센트가 경작지라, 국도는 들녘 한복판을 통과한다. 고요한 풍경 안에는 모내기 준비가 한창이다. 트랙터로 땅을 갈아엎거나 불을 놓은 논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오른다. 그 풍경 속에 백제 시대 때 축조한 우리나라 최초의 저수지 벽골제가 있다. 벽골(碧骨, ‘볏골’의 한자음 표기)은 ‘벼의 고장’이란 뜻의 김제의 옛이름이다. 벽골제의 면적은 5,000정보(4만 9,585제곱킬로미터). 우리나라 고대 저수지 중 가장 큰 규모인데, 모악산에서 시작하는 50여 개 지류의 강물로 가득 채워져 1,700여 년간 드넓은 평야에 물을 댔다. “벽골제 제방은 흙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순수하게 사람의 손으로 쌓았죠.” 고정순 문화해설사를 따라 잔디가 덮인 제방 위에 올라선다. 제방 위에서 바라본 들녘은 사이사이에 나지막한 구릉을 품고 있다. 지대가 평평한 김제에서는 높이 50미터 남짓의 둔덕에도 산이라는 이름을 허락한다. 벽골제 보수공사를 하던 인부들이 짚신에서 털어낸 흙이 쌓여 이룬 것이라 전해지는 신털미산, 노역으로 지친 인부를 위로하기 위해 통일신라시대 단아 공주가 가야금을 탔다는 명금산도 마찬가지다. 신털미산에서 명금산까지 남북으로 이어지는 기다란 제방이 지금은 허허벌판으로 변한 벽골제의 위용을 짐작케 한다.
“일제강점기에 벽골제를 논으로 메웠습니다. 수탈을 위해 간척 사업을 벌이고 저수지까지 논으로 만든 것이죠.” 풍요로운 땅에는 가혹한 수탈도 잇따랐다. 그래서 김제는 동학농민운동의 발원지이자, 일제강점기의 수탈을 그린 소설 <아리랑>의 무대가 되었다. “일본은 벽골제에 우리 민족의 얼이 흐른다고 생각했는지 제방 한가운데에 물길을 냈어요. 저수지에서 간선수로로 모습은 바뀌었지만, 그래도 벽골제는 현재까지 제 역할을 하고 있는 산업 구조물이라고 할 수 있죠.” 제방 위로 원평천이 유유히 흐른다. 강물은 벽골제 제방을 지나 드넓은 땅에 물을 대고, 동진강을 거쳐 서해로 빠져나갈 것이다.
벽골제 근처에 조선 시대 만석꾼으로 알려진 정구례의 유별난 뒤주가 있다기에 찾아가는 길. 장화마을 입구를 가리키는 입석에는 가수 현숙이 기증했다는 문구가 각인되어 있다. 마을 초입에 자리한 장화정미소에 들러 길을 묻는다. "뒤주는 저짝 후장마을로 가면 돼야. 현숙이가 후장마을 출신이여. 그 오라버니가 나랑 동창이잖아. 1942년생.” 너털웃음을 짓는 이봉구 씨가 잘 안다는 듯 이야기한다. 앞동네를 전장마을, 뒷동네를 후장마을이라 부르고, 가수 현숙의 본명은 정현숙이며, 후장마을은 정씨 집성촌이라고. 방금 이발하고 오는 길이라는 그는 낡을 대로 낡은 정미소에 비해 멀끔한 모습이다.
“정미소 건물은 한 50년 됐제. 이걸로 자식들 다 교육시켰어.” 나무 골조에 철판을 다닥다닥 덧댄 정미소 앞에는 국가유공자 팻말이 떡하니 걸려 있다. 주문 내역을 적은 칠판과 저울까지 옛 모습 그대로인 정미소는 이봉구 씨가 파견 광부로 서독에 다녀온 후 인수했다고. 그는 50필지나 되는 논농사를 짓는 농부로, 주문이 들어올 때마다 이곳에서 방아를 찧는다. “이쪽에선 다 신동진벼를 키워. 쌀알이 굵고 실해서 김치만 있어도 밥 먹는다고 그려.” 그의 말에 은근한 자부심이 묻어난다. 최근 쌀 소비가 줄고 대형 도정 공장이 등장해 오래된 정미소는 점차 사라지고 있지만, 그때그때 도정한 질 좋은 쌀을 소매로 판매해 수익을 낸단다. 그의 기분 좋은 자랑을 뒤로하고 다시 길을 떠난다. 정미소 뒤에 자리한 커다란 당산나무 몇 그루를 지나 좁은 길이 이어지고, 매실밭에선 키 작은 매화나무가 흰 꽃잎을 떨어뜨린다. 작은 교회를 지나니 곧이어 커다란 느티나무가 그늘을 드리운 후장마을이 나타난다.
장화리쌀뒤주가 있다는 표지판은 오래된 한옥집의 대문을 가리킨다. 조심스레 들어간 대문 뒤에서 고즈넉한 운치를 풍기는 고택과 수선화가 곱게 핀 아담한 정원이 나타난다. 텃밭을 일구던 정주철 씨는 사람 좋은 미소로 손님을 맞는다. “이게 전라북도 민속문화재로 지정된 쌀뒤주예요. 옛날에 사도세자가 갇혀 죽었다던 뒤주는 이런 거고요.” 손짓하는 그를 따라가 헛간에 들어가니 쌀 1가마가 겨우 들어가는 일반 뒤주가 남아 있다. 하지만 이 가문이 지켜온 뒤주는 헛간 밖에 자리한다. 그가 사는 집 앞마당 한쪽에 자리한 장화리쌀뒤주는 초가지붕을 얹었을 만큼 커다랗다. 가문의 선조인 정준섭은 고종이 왕의 자리에 있을 때 구례군수를 역임했다고 해서 정구례라고 알려진 이로, 이곳에 쌀을 가득 채워 넣고 배곯는 이웃을 대접했다. 이 뒤주에는 쌀을 70가마까지 넣을 수 있다는데, 매일 수백 명의 손님을 맞이했기에 그 양도 1달이면 동이 났다고 한다.
정구례 고택 바로 건너편에는 열녀비가 서 있다. 남편이 병에 걸리자 둔부 살을 내주었다고 하는 부인을 기리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 동네 출신 가수 현숙도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7년간 간호해 효녀로 소문났다. 드넓은 평야를 접한 동네에서 넉넉한 인심이 나는 걸까, 느티나무가 드리운 그늘 아래 하나둘 피어난 봄꽃 향기가 장화마을 곳곳에 가득 넘쳐난다.
애주가 사이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1잔만 마셔도 기력이 회복된다는 이른바 ‘천하 3대 명주’. 백 살이 넘은 소나무 고목을 뿌리째 넣어 담그는 송화대력주, 불로초를 넣어 마시면 늙지 않는다는 불로주에 이어 사계절 피어나는 백 가지 꽃으로 담근 백화주가 그것이다. 흡사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야기지만, 세 가지 술 중 백화주만큼은 현실에서 만날 수 있다. 유일하게 백화주가 가전되는 김제 학성강당(學聖講堂)에서 말이다.
구불구불한 시골길을 따라 나온 성덕면 옥동마을에는 고요한 기운이 흐른다. 논에 다가서자 고고한 자태로 서 있던 학이 커다란 날개를 펴고 유유히 날아간다. 율곡 이이의 기호학맥을 잇는 전통 서당인 학성강당을 찾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학성강당이 성덕면에 정착한 지는 햇수로 17년째. 1954년 화석(和石) 김수연(金洙連) 선생이 사가에 문을 연 이래로 5,000명이 넘는 제자를 양성했다. 공부란 스스로 알아서 깨닫는 것이지 스승은 도움을 줄 뿐이라며 지금껏 무료로 가르치고 있으며, 학생들은 먹을 것을 가져와 공동생활을 하며 학습한다. 지금도 기와를 올린 높은 담장 너머로 글 읽는 소리가 들려온다.
“사람이 살아가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요.” 이곳에서 공부를 하는 박창영 씨의 눈이 반짝인다. 한의사인 그는 대학 재학 중 학교 선배의 소개로 학성강당을 찾았다가 유학에 매료돼 10년째 이곳에서 공부하고 있다. “기호학파 성리학은 학문이자 가치관, 삶의 철학, 마음가짐에 관한 것입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사람과 사물에 내재된 선한 양심을 회복시키는 것이죠.” ‘교기질지성(矯氣質之性)’. 배움을 통해 기질을 바꾸고 행동을 변화시키는 것이 유교의 핵심이라고 그가 차분히 설명한다.
학성강당의 백화주는 정확히 말하면 백초화춘(百草花春)이다. 백 가지 약초로 담근 약초주에 두 번 덧술을 하고, 사계절 동안 따다 모아 그늘에 말린 백 가지 꽃을 넣고 다시 20일을 기다리는 정성으로 빚은 술이다. 현재 학성강당에서는 백화주를 담그지 못하고 있다. 250여 년간 대물림 되는 백화주 비법을 아는 유일한 사람, 청곡 김종회 선생이 자리를 비운 상태라 기존에 담근 것을 몇 병만 보관하고 있다고. 귀한 대접에 감사를 표하며 백화주를 음미한다. 약주처럼 묵직하면서도 향긋하다. 달고, 시고, 쓴 맛이 오묘하게 조화되어 마시고 난 후에도 입안 가득 향기가 남는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밀주를 단속하던 시대를 지나며 가양주의 맥이 끊긴 어려운 상황에서 고집스레 전통을 이어온 것은 어떤 마음에서일까. 그것은 단순히 비법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정신과 태도에 관한 것일 테다. 그러는 사이 안채의 문이 열리고, 화석 선생이 걸어 나온다. 아흔이 넘은 춘추에도 정갈한 흰옷을 갖춰 입은 그는 상투머리에 관을 썼다. 손을 모아 크게 인사를 올린 후, 학성강당의 문을 나선다.
“내 나이가 내일 모레 여든이야.” 정휴당을 관리하는 홍정자 씨는 말끝에 고운 미소를 덧붙인다. 앞마당에는 꽃 핀 매화나무에 새가 앉았다 가고, 흰 털이 풍성한 사모예드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바라본다. 크기별로 장독이 주르륵 서 있는 뒷마당에는 목련이 만개했다. 백구면에 자리한 한옥 민박집 정휴당에는 오래된 물건을 사랑하는 이의 취향을 저격할 만한 것들이 가득하다. 삐그덕 소리를 내는 골마루에 올라 한지를 덧댄 문을 연다. 방 안에 쓰던 물건이 그대로 있다. 자개장, 괘종시계, 경대 등 세월을 탄 물건은 깨끗한 새것 같다. 80년을 지탱한 고택은 주인을 닮아 정갈하다. 홍정자 씨가 가정집이던 곳을 개방해 손님을 받은 지는 3년이 채 되지 않았다. 민박을 시작하면서 ‘고요하게 쉬는 곳’이라는 뜻으로 정휴당이라는 이름도 붙였다.
“내가 종갓집 첫째 며느리예요. 우리 집에 맨날 손님이 들끓었는데, 하이고 손님 대접하느라 얼매나 힘들었는지 몰라.” 정휴당에는 복도며, 방에 표구된 글씨와 그림, 도자기 등이 제법 많다. 군데군데 걸린 사진이 예사롭지 않다 싶었는데, 병풍을 살짝 젖히자 나타난 흑백사진 안에는 김구 선생과 독립운동 지사가 쭉 서 있다. “여기 서 있는 사람이 우리 시할아버지예요. 이 사진은 민립 대학 설립 운동하던 사람들이 같이 찍은 거고. 이 사진을 내가 발견해서 박물관에 갖다 줬더니 확대해서 전시를 해놨더라고.” 독립운동에 힘쓰던 홍정자 씨의 시조부가 가장 관심 있던 것은 교육이다.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이 실패로 끝난 후 세운 사립학교가 정휴당 바로 앞에 자리한 치문초등학교다. 시조부의 호를 딴 학교는 3·1운동 등의 항일운동에 참여해 여러 번 폐교가 되기도 했다고. 홍정자 씨도 그곳에서 30년 가까이 교편 생활을 했다.
이런저런 옛이야기를 주고받으니 정말 친할머니 댁에 쉬고 있는 듯 마음이 푸근해진다. 고즈넉한 정휴당의 매력은 홍정자 씨가 내주는 아침 밥상에서 꽃핀다. 직접 담근 고추장과 된장으로 끓여낸 찌개, 텃밭에서 직접 기른 작물이 밥상을 채운다. “이건 루꼴라 샐러드예요. 씨 뿌려놓으니 혼자서 계속 자라더라고.” 시골 된장으로 만든 구수한 찌개를 후루룩 들이켠다. 두릅, 쑥갓, 시금치 등 직접 기른 나물 반찬과 장아찌가 입맛을 돋운다. 동네 이웃이 수확한 쌀로 짓는다는 찰진 밥은 정미소에서 들었던 대로 정말 알이 크고, 속이 꽉 찼다. 종갓집 큰며느리라는 홍정자 씨의 손맛은 여느 식당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일품이다. “부침개 좀 더 부쳐줄까?” 이미 듬뿍 담아낸 찬이 혹시나 부족하지 않은지 돌아보는 그녀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만연하다. 식사 후 마루에 걸터앉아 쉬는데 그녀가 대추차가 담긴 잔을 내민다. 정휴당의 마당에는 따뜻하고 나른한 봄볕이 가득 쏟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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