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그 어느 나라보다 다채로운 문화와 톡 쏘는 향신료처럼 여운을 남기는 맛의 조응. 놀라운 변화를 마주한 싱가포르 미식의 오늘과 내일을 맛보다.
보태닉 가든스(Botanic Gardens)는 언제 찾아도 싱그럽다. 도심의 작은 허파처럼 싱가포르 시민에게 짙고 푸른 기운을 발산한다. 아침과 저녁에는 산책과 조깅의 무대로, 낮 동안에는 여유를 품은 휴식처로. 사실 1859년, 영국의 지배 아래 문을 연 보태닉 가든스는 싱가포르 낙농원예협회용 공원이자 열대식물을 연구하는 시설이었다. 난초 교배를 활발히 연구했는데, 싱가포르의 국화인 반다 미스 조아킴(Vanda Miss Joaquim)도 이곳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
나심 게이트(Nassim Gate)를 통과해 보태닉 가든스에 들어가면, 호젓한 오르막을 걷다 건물 1채를 발견한다. 열대림 속 비밀의 저택 같은 코너 하우스(Corner House)다. 1910년 식민지 시대에 지은 전형적인 블랙 앤드 화이트(Black and White) 양식으로, 현재 이런 건물은 싱가포르 전역에 500여 채 남아 있다.
보태닉 가든스의 코너 하우스는 좀 더 특별한 방갈로다. 1929년부터 1945년까지 보태닉 가든스의 부소장으로 근무한 식물학자 엘드리드 존 헨리 코너(Eldred John Henry Corner)가 거주하던 곳이자, 창의적 요리로 미슐랭 1스타를 받은 레스토랑이기 때문이다. 아시아 유수의 레스토랑에서 실력을 쌓은 셰프 제이슨 탄(Jason Tan)은 코너 하우스의 요리를 가스트로 보타니카(Gastro-Botanica)라고 정의한다. 레스토랑을 둘러싼 환경과 매우 어울리는 콘셉트다. 2층 공간에는 식민지 시대의 정찬을 준비하듯 테이블이 펼쳐진다. 프랑스 요리를 바탕으로 여러 식자재를 조합한 결과물은 접시 위에 보태닉 가든스를 구현한 것 같다. 식물을 이종교배하듯 메뉴를 구성했고, 전체적으로 세심한 가니싱과 플레이팅이 돋보인다. 자몽과 사과 등을 곁들인 푸아그라, 고수와 땅콩을 곁들인 찹쌀떡과 소르베 등. 경계를 허무는 메뉴 구성은 신선한 미각 체험을 이끌어낸다. 발코니 너머로 넘실대는 초록의 정원이 만든 풍경만큼이나 보기 좋고 자연스럽게.
--------------------
코스 점심 메뉴 58싱가포르달러부터, 선데이 브런치 88싱가포르달러, cornerhouse.com.sg
왼쪽부터 야쿤 카야 토스트 본점. 야쿤 카야 토스트 본점에서 먹는 세트 메뉴. ⓒ 허태우
그 많은 카야 토스트 중에서도 야쿤 카야 토스트는 오늘날 싱가포르를 대표하는 간식으로 알려져 있다. 마치 제록스(Xerox)가 복사기를, 폴라로이드(Polaroid)가 즉석 카메라를 상징하듯 말이다. 야쿤 카야 토스트의 카야잼이 특별한 것도 아니다. 코코넛 밀크와 달걀로 만든 카야잼은 단맛이 강해 맛의 차이를 크게 느끼기 어렵다. 싱가포르 코피티암(copitiam, 싱가포르식 카페)이 흔히 내는 카야 토스트 중 하나일 뿐이다. 여기에 굳이 차별점을 찾자면, 창업자 로이 아쿤(Loi Ah Koon)의 와이프가 카야 토스트를 먹기 좋게 잘라서 팔기 시작했다는 것.
로이 아쿤은 중국 하이난(海南省)성에서 온 이민자였다. 하이난성 사람들은 유달리 싱가포르 요식업에 많이 종사하는데, 아쿤도 그랬다. 1944년 그가 자신의 노점을 열었을 때, 초창기 반응은 미지근했다. 그러다가 바삭한 빵에 카야잼과 차가운 버터를 바르고 삼각형으로 자른 토스트를 팔면서 급성장한다. 무더운 날 오후, 고된 노동에 지친 이들에게 달디단 야쿤 카야 토스트와 코피(kopi, 싱가포르식 커피)는 거리의 에너지 같았으리라. 야쿤 카야 토스트를 후딱 해치우고 자신의 일터로 돌아가 삶의 희망을 이어갈 수 있는.
오늘날 아시아 곳곳에 매장을 둔 야쿤 카야 토스트의 본점은 파 이스트 스퀘어(Far East Square)에 자리한다. 말끔한 주변 건물과 달리, 허름한 외관의 코피티암이다. 이곳은 늘 아침부터 사람들로 소란스럽다. 실내에는 야쿤 카야 토스트의 홍보물이 덕지덕지 붙어 있고 주방에서 들려오는 중국어는 어지럽다. 숱하게 많은 토스트와 커피가 쟁반에 실려 나온다. 달그락거리는 자기 컵에 담은 커피가 받침대로 살짝 넘쳐 흐른다. 좁은 테이블에 도란도란 앉은 손님들은 수란에 카야 토스트를 찍어 한입 베어 문 후 따뜻한 커피를 홀짝 마신다. 단 몇 조각이라도 속을 채우기에는 충분하다. 달콤함이 몸속으로 퍼지기까지는 몇 분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
카야 토스트와 커피, 수란을 포함한 세트 4.8싱가포르달러부터, yakun.com.sg
싱가포르 현지인이 즐겨 마시는 커피는 일반적인 커피와 좀 다르다. 흔히 ‘코피’라고 부르는 싱가포르식 커피는 설탕과 마가린을 넣어 로스팅하기 때문에 맛이 짙고 강하며, 캐러멜과 버터 향도 난다. 이런 코피는 블랙으로 마시거나 연유, 농축 우유 등을 섞어 마신다. 물론 요새는 스타벅스도 많고, 커피 본연의 맛을 제대로 살리는 로스팅 카페도 많다. 그렇지만 싱가포르를 여행할 때에는 한 번쯤 코피티암에서 마셔봐야 하지 않을까? 아래 용어를 참고해 진짜 현지의 코피를 음미해보자.
코피(kopi) 농축 우유를 넣은 커피. 설탕을 추가하지 않아도 농축 우유 덕분에 달다.
코피-오(kopi-O) 설탕을 넣은 블랙커피.
코피-오 코송(kopi-O kosong) 설탕을 뺀 블랙커피.
코피-시(kopi-C) 연유와 설탕을 가미한 커피(C는 유명한 연유 브랜드인 ‘카네이션(Carnation)’을 의미함).
코피-시 코송(kopi-C kosong) 연유를 넣은 커피. 설탕 무첨가.
코피 펭(kopi peng) 농축 우유를 넣은 아이스커피.
코피 가오(kopi gao) 진한 커피(더블 에스프레소 수준).
코피 포(kopi poh) 연한 커피.
페라나칸은 싱가포르 문화의 한 축을 담당한다. 현지 말레이족 여성과 결혼한 이민자의 후손을 일컫는데, 중국계 페라나칸의 비중이 큰 편. 이들은 고유의 관습과 문화를 따르며, 시각적으로 화려한 요소가 일상에 배어 있다. 정교하고 아름다운 공예, 원색을 강조한 주택, 12일간 계속되는 결혼식 등을 살펴보면 예사롭지 않다. 음식도 매력적이다. 중국에서 많이 사용하는 식자재와 말레이 소스, 향신료를 결합한 개성 있는 요리를 탄생시켰다. 갈랑갈(생강의 일종), 타마린드, 부아 켈루악(buah keluak), 칠리 그리고 비장의 삼발 벨라칸 소스 등을 두루 넣어 맛과 향이 강렬하다.
캔들너트는 전 세계 최초이자 유일하게 페라나칸 요리로 미슐랭 1스타를 받았다. 뎀시 힐(Dempsy Hill)에 자리잡은 캐주얼한 레스토랑으로, 최근 현지에서 한창 주가를 높이는 중이다. 경영학을 공부하다 요리 학교에 입학해 진로를 바꾼 맬컴 리(Malcom Lee)가 캔들너트의 셰프. 그는 페라나칸 출신인데, 프렌치 스타일을 접목한 현대식 페라나칸 요리를 통해 독자적 세계를 펼친다.
리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혔다. “어머니께서는 주방 일을, 아버지는 지배인을 맡으셨고, 그리고 친구들은 레스토랑 서비스나 웹사이트 꾸미는 것 등을 도와줬습니다. 메뉴는 심플했는데, 가정식인 찹치에(chap chye)나 아얌 부아 켈루악(ayam buah keluak), 가족이 좋아하는 어머니의 카레나 쿠에 파이 티(kueh pie tee) 등의 음식을 선보였죠. 그때에 비해서는 지금 정말 많이 발전한 것 같습니다.” 그의 말처럼 캔들너트는 페라나칸 가정식에 세련미를 보탰다. 뭉근히 조린 아얌 부아 켈루악이나 바삭한 쿠에 파이티는 여전히 테이블에서 주요 자리를 차지하고, 노앙(ngoh hiang)과 크랩 커리도 빠지지 않는다. 향신료와 채소를 적극 활용해 요리마다 인상이 확실하다. 자극적인 맛은 부드러운 식감의 소스나 락사(laksa) 수프로 중화할 수 있어 부담스럽지 않다. 맛이 맛을 부르고 이끄는 형세다. 가정식 만찬처럼 갖은 요리가 등장하고 나면, 테이블이 부족할 지경. 손님들은 잡담을 나누며 자신의 그릇에 요리를 담고 또 먹는다. 페라나칸 특유의 환대가 완성되는 만족스러운 순간이다.
--------------------
메인 요리 20싱가포르달러부터, 코스 메뉴 1인 88싱가포르달러, comodempsey.sg/restaurant/candlenut
글. 허태우
싱가포르 미식 여행 Part 2. 프렌치 다이닝부터 호커 센터까지
론리플래닛 매거진 코리아와 함께 최고의 여행을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