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스한 온기가 감도는 숙소에서의 하룻밤. 일상에서 누리기 힘든 체험과 함께한다면 특별한 여행을 완성할 수 있다. 여기 이색 프로그램을 준비하는 전국의 스테이 6곳을 안내한다.
경복궁 서쪽 영추문 건너편. 자줏빛 벽돌 외벽에 낡은 여관 간판을 내건 단출한 2층 건물이 80년 넘도록 한 자리를 지키고 있다. 바로 1936년 서정주, 함형수가 시(詩) 동인지 <시인부락>을 펴내는 등 숱한 문인이 들락날락하던 보안여관이다. 수십 년간 본연의 기능에 충실하던 이곳은 시대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한 채 2004년 폐업에 이르고 만다. 철거 위기에 내몰린 보안여관은 최성우 대표가 인수하면서 전환점을 맞는다. 적산가옥 형태의 목조 골조와 간판을 그대로 남긴 채 실험적인 전시를 여는 갤러리로 바꾼 것이다. 여관을 인수한 지 10년째인 지난해 여름에는 바로 옆에 복합 문화 공간 보안1942를 새롭게 선보였다. 어깨를 기댄 듯 나란히 서 있는 두 건물은 형제처럼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우리나라 근현대사에서 여관은 단지 숙박뿐 아니라 창작의 공간이었어요. 보안1942 역시 예술가의 활동을 돕는 일종의 창작 플랫폼이라 할 수 있지요.” 최성우 대표의 말처럼 지하 2층, 지상 4층으로 이뤄진 보안1942는 창작과 라이프스타일을 선보이는 공간으로 알차게 내부를 구성했다. 통유리 안쪽으로 정갈한 바 형태의 테이블이 놓인 1층은 한국의 전통 식문화를 모던하게 재해석한 카페 겸 식당 ‘일상다반사’. 지하 1층 갤러리를 지나 지하 2층으로 내려가면 오후에는 서점으로, 저녁에는 바로 운영하는 ‘보안책방’이 기다린다. 3~4층은 총 7개의 객실을 갖춘 ‘보안 스테이’로 운영하며 과거 여관의 기능도 회복시켰다. 실제로 이곳 스테이는 오픈한 지 반년도 지나지 않아 문화·예술 종사자의 안식처로 떠오르고 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교환교수로 서울을 찾은 플레처 매키(Fletcher Mackey) 메릴랜드 예술대학교 교수가 20일간 머물며 세미나를 개최하기도 했고, 최근에는 서울시립미술관의 <미래 과거를 위한 일> 전시에 참가한 남미 작가들이 투숙하기도 했다.
보안 스테이 41호에서 바라보이는 차분한 정경은 단아한 객실과 조화를 이룬다. 매년 특정한 테마에 맞춰 책을 선별하는 보안책방. 바닥은 옛 추사 김정희 집 터의 흔적을 볼 수 있도록 유리로 설계했다. ⓒ 임학현
예술적 경험은 스테이에 머무는 동안 은연 중 이어진다. 객실과 거실 곳곳에는 토종 벼를 주제로 진행한 전시 <먹는게 예술이다. 쌀>의 벼 표본 작품, 장준호 작가의 단안한 목가구 등 보안1942를 거쳐간 작가의 작품을 자연스럽게 배치했다. 이는 호텔에서 작품을 관람하는 아트 페어를 경험한 최성우 대표의 아이디어. 순백의 한지를 두른 내벽과 도자기 소재의 단아한 조명, 대표가 직접 컬렉트한 1950~1960년대 빈티지 오디오 세트 등 차분하고 모던한 미감을 완성하는 요소가 군데군데 섞여 있다. 보안 스테이에서 접한 예술적 경험은 경복궁 방향으로 낸 창문에서 극대화된다. 영추문 너머로 경회루가 바라보이는 차분한 정경은 단숨에 시선을 사로잡는다. “영추문은 조선 시대 때 예술가들이 입장하던 문이었다고 해요.” 보안1942의 큐레이터 신현진 씨의 설명을 듣고 한 번 더 창밖을 응시하니 서촌 길목에 들어선 오랜 여관과 이를 부활시킨 보안1942가 결코 우연한 인연이 아니란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
★ 주중 8만 원부터, 서울시 종로구 효자로 33, b1942.com
• 경복궁 전망이 가장 훌륭한 객실은 31호와 41호다.
• 투숙객에게 대여하는 접이식 자전거를 타고 서촌과 경복궁 일대를 돌아다니자.
• 주방이 딸린 루프톱 테라스를 대여하면 프라이빗 파티를 즐길 수 있다.
골짜기 너머로 해가 사라지고, 선홍빛 스펙트럼이 하늘의 색채를 뒤바꾸는 늦은 오후. 가평 북면의 백둔천을 곁에 둔 산간 도로에는 드문드문 자리한 펜션에서 옅은 불빛이 새어나올 뿐, 서서히 짙은 어둠이 찾아온다. 차 1대가 간신히 지나칠 만큼 비좁은 임도를 만난 직후, 조심스레 핸들을 틀며 한참을 오르자 요새처럼 숨어 있는 통나무집의 실루엣이 모습을 드러낸다. 탑처럼 솟은 원형 돔 4개가 이곳이 천문대란 사실을 암시한다. 2004년 이래 김상종 씨 부부가 운영하고 있는 자연과별 가평천문대에 도착한 것이다.
“20여 년 전 이곳에 왔을 때는 그야말로 빛 한 줄기 찾아볼 수 없었죠.” 전원 생활을 갈망하던 김상종 씨는 인적이 드문 명지산 중턱의 임야를 사들여 손수 자신이 머물 집을 지었다. 밤이 되면 하늘을 가득 채우는 무수한 별을 감상하던 그는 어릴 적 자신이 품은 꿈을 차근차근 실현해나갔다. “열 살 때부터 별 관측에 대한 막연한 호기심이 있었어요. 직접 망원경 렌즈를 만들어보기도 했죠. 당시만 해도 천체망원경을 구경하는 일이 쉽지 않았으니까요.” 천문학을 전공하지 않은 그는 취미 삼아 망원경을 하나 둘 수집했고, 급기야 통나무집 위에 돔형 관측실을 세우기에 이른다. 이후 숙소를 갖춘 사설 천문대로 운영하며 체계적인 별자리 관측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오늘은 구름 이동이 많아서 제대로 별을 관측할 수 있을지 장담하지 못하겠네요.” 실제 이날 야간 관측 프로그램을 예약한 다른 팀에게는 취소 통보를 보낸 참이라고. 일단 해가 완전히 저물고, 밤이 깊어지기를 기다리며 천문대 곳곳을 둘러본다.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을 따라 본관 2층으로 올라가자 오랜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산장 같은 객실이 나온다. 유행을 좇아 스파나 대형 TV 등을 구비한 주변의 펜션과 달리 잠자리에 충실한 기본 침구만 간소하게 놓여 있다. 그 대신 객실과 이어진 테라스에선 멀찍이 떨어진 연인산의 포근한 산등성이가 한눈에 담긴다.
저녁 7시를 지나 구름이 조금씩 걷히더니 어느덧 하늘 위로 촘촘하게 별이 반짝이기 시작한다. 김상종 씨도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소년처럼 미소를 짓는다. “겨울은 오리온자리, 쌍둥이자리 같은 1등성 별자리를 관측하기에 가장 좋은 계절이죠. 하지만 요즘은 미세먼지 때문에 별이 보이는 날도 차츰 줄어들고 있어요. 그런 점에서 오늘은 운이 좋네요.” 천문 관측 프로그램은 그가 직접 별자리와 망원경 사용법을 알려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프로그램의 하이라이트는 돔형 주관측실에서 막스토프 16인치 광학망원경으로 진행하는 별자리 관측. 계절별로 관측 가능한 은하와 성단을 찾아 이를 직접 확인하도록 도와준다. 2시간 남짓의 프로그램이 끝난 뒤 아직 여운이 가시지 않는다면 투숙객에게 개별 대여해주는 망원경을 들고 테라스에서 별 관측을 이어나가자. 별에 관해서라면 누구보다 애정이 깊은 주인장의 해설을 들으며 말이다. “저 역시 주로 밤 12시부터 아침 6시까지 별을 관측하곤 해요. 별똥별이 떨어지는 날이면 아예 밤을 지새우기도 하죠.”
-------------------
★ 1박 2일 프로그램 2인 14만 원부터, 경기도 가평군 북면 백둔로342번길 115-33, naturestar.co.kr
• 천문 관측 프로그램은 예약이 필수이며, 당일 기상 조건에 따라 실내 프로그램으로 대체될 수도 있다.
• 숙박을 제외한 당일 야간 프로그램도 함께 운영한다(2인 기준 5만 원).
• 사진 애호가이기도 한 주인장에게 천문대와 밤하늘을 담는 촬영 노하우를 배워보자.
고리타분한 술로만 여겨지던 전통주가 나날이 과감한 변신을 꾀하고 있다. 세련된 라벨과 디자인으로 시선을 사로잡거나 한식을 비롯한 세계 각국의 음식과 적극적인 페어링을 시도하는 것이다. 또 외국인이 양조한 전통 소주가 역으로 주목을 받기도 한다. 그럼에도 전통주는 아직 일부 애주가의 영역에 머물러 있다. 전통주의 진정한 가치를 이해하기 위해선 일단 정성스러운 양조 과정을 들여다보는 경험이 좀 더 필요해 보인다. 그런 점에서 농림축산식품부가 매년 전국 각지의 전통 양조장을 선정하고 알리는 ‘찾아가는 양조장’ 프로그램은 주목할 만하다. 양조장을 직접 방문해 시음하고 양조 노하우를 익히며 각 전통주가 지닌 고유의 매력을 확인할 수 있다. 그중 홍천 내촌면의 예술은 전통주를 음미하고 배우는 것은 물론, 하룻밤 머물며 풍류를 만끽할 수 있는 곳이다.
우선 예술이란 이름은 중의적 의미를 담고 있다. ‘예부터 전해온 술 부터 예(醴, 단술 예)와 술을 합친 단어, 술을 빚는 행위를 예술에 빗댄 의미까지 아우른다. 사려 깊은 의미를 담아 양조장의 문을 연 이는 정회철 대표. 법학대학원 교수이자 변호사로 일하던 그는 돌연 모든 것을 뒤로한 채 2012년 연고 없는 강원도 산골 마을에 터를 잡고 술을 빚기 시작했다. “아내와 전국을 여행하며 여생을 보낼 만한 곳을 찾았어요. 그저 자연이 가까이 있고, 햇살이 잘 드는 곳이길 바랐는데, 내촌이 딱 마음에 들었죠.” 평소 취미로 알음알음 독학하며 전통주를 빚어온 그는 새로운 터전에서 양조장을 열고 전통주를 알리기로 결심했다.
예술에서는 총 여섯 가지의 전통주를 양조한다. 자체 제조 누룩을 사용해 2년 이상 숙성한 증류식 소주 ‘무작 은 전통주 애호가 사이에서 걸작으로 추앙 받기도 한다. 찹쌀로 두 번 빚은 술 ‘만강에 비친 달’과 청주인 ‘동몽(同夢) , 프리미엄 막걸리 ‘홍천강탁주’ 그리고 떠 먹는 이화주 ‘배꽃필 무렵 까지. 초심자와 애호가 모두 부담 없이 즐길 만한 폭넓은 전통주를 갖추고 있다.
안타깝게도 올해는 예술에서 술을 양조하지 않는다. “아내와 느긋하게 여행도 다니고, 새로운 술도 개발할 예정이에요. 양조장을 한 번 점검하며 돌아볼 시간이 온거죠.” 그 대신 정회철 대표가 진행하는 우리술 문화체험교실은 계속 운영할 예정이다. 교육장으로 사용하는 전통주 체험관에서 당일 코스의 전통주 빚기 체험부터 누룩을 디디는 체험을 포함해 느긋하게 전통주를 시음할 수 있는 1박 2일 코스, 3박 4일짜리 전통주 단기 양조학교까지 체계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왕이면 1박 이상의 체험을 권하고 싶다. 마음 놓고 예술에서 양조한 전통술을 음미하는 풍류 여행을 완성하고 싶다면 말이다. 체험관을 비롯해 뒤편에 별채로 마련한 단아한 숙소는 선(禪)의 건축으로 유명한 김개천 교수가 설계를 맡았다고. 숙소 동 앞으로 펼쳐진 백합나무 숲의 풍경을 마주하면 예술이란 이름을 한 번 더 떠올리게 될 듯하다. “우리술은 한자리에 앉아 오랫동안 마셔야 진가를 알 수 있지요. 게다가 좋은 술은 숙취가 없는 법이에요.” 정회철 대표가 정성스럽게 양조한 전통주를 음미하는 밤은 결코 짧지 않을 것이다.
-------------------
★ 1박 2일 체험 프로그램 1인 10만 원, 강원도 홍천군 내촌면 동창복골길 259-5, ye-sul.com
• 우리술 문화체험 교실은 예약으로만 진행하며, 4인 이상 참여할 수 있다.
• 외부 술 반입이 가능하지만, 희석식 소주는 금한다. 전통술의 맛을 해치기 때문이다.
• 숙소로 사용하는 별채는 인터넷과 와이파이 이용이 제한되어 있다.
글. 고현 사진. 임학현
론리플래닛 매거진 코리아와 함께 최고의 여행을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