론리플래닛 매거진 코리아 창간 7주년 특집. 세계에서 가장 압축된 도심과 울창한 산이 공존하고, 100년 넘은 노포와 핫 플레이스가 이웃한 홍콩섬의 상반되는 측면 7가지를 경험해보자.
2층 트램이 누비는 완차이 메인 스트리트 뒤편의 플레밍 로드(Fleming Road) 41번지. 티끌 하나 없이 새하얀 복도를 지나 진홍빛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리자, 웨스 앤더슨(Wes Anderson)의 영화에 나올 법한 아늑한 로비가 나타난다. 목조 리셉션 데스크 뒤에 걸어놓은 객실 키를 보관하는 붉은 천, 황동 게 조각과 테라리움(terrarium) 식물. 이곳이 지난 10여 년간 평범한 비즈니스호텔이었다고 상상하기는 쉽지 않다. 2017년, 홍콩에서 주목받는 디자인 에이전시 어 워크 오브 서브스턴스(A Work of Substance)는 더 플레밍(The Fleming)의 개조와 브랜딩을 맡았다. 에르메스 부티크의 쇼윈도 디스플레이, 셩완의 떠오르는 레스토랑 비보(BIBO) 등 홍콩의 여러 핫 플레이스가 그들의 솜씨다.
호텔 곳곳에 쓰인 황동 소재와 스트라이프 패턴, 객실과 엘리베이터의 곡선형 문, 객실에 걸린 소지품 보관용 주머니와 원형 거울에서 배를 떠올린다면 정확히 맞힌 것이다. 더 플레밍의 모티프는 선박업과 제조업이 번영기를 맞은 1960~1970년대 홍콩, 특히 홍콩의 명물인 스타 페리다. 위트 있는 디자인은 물론이고, 침대 머리맡에 마련한 독서등과 USB 포트 등 투숙객에 대한 배려가 객실 구석구석에 숨어 있다. 기능과 디자인의 조화는 종종 짜릿한 순간을 선사한다. 가령 객실 문 안쪽의 황동 나사를 돌리자 문 바깥의 ‘THE FLEMING’ 사인이 ‘Do not Disturb’ 사인으로 변할 때나, 버튼을 누르자 스마트폰에 저장된 음악이 방 안 전체에 울려 퍼질 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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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플레밍 1박 1,588홍콩달러부터, thefleming.com
1888년 개장한 아시아 최초의 케이블카 피크 트램(Peak Tram)은 홍콩의 명물이다. 하지만 피크 트램을 타고 빅토리아 피크에 올랐다가 인증 사진만 찍고 내려왔다면, 정작 중요한 것은 놓친 셈. 피크 트램의 종착지인 더 피크에서부터 잘 닦인 하이킹 트레일이 시작하니 말이다. 빅토리아 피크 정상을 감싸고 도는 피크 순환 트레일은 물론, 홍콩섬의 5개 컨트리 파크에 걸쳐 있는 홍콩 트레일(Hong Kong Trail)도 이곳에서 출발한다. 홍콩섬 동쪽 끝의 빅 웨이브 베이(Big Wave Bay)까지 구불구불 이어지는 길이다.
가볍게 걸으며 다채로운 풍경을 보고 싶다면 더 피크부터 룽푸샨 컨트리 파크(Lung Fu Shan Country Park)까지 2시간짜리 코스를 택하자. 화창한 주말, 트레일은 가족 여행객으로 북적거린다. 도심 한가운데라는 사실을 잊을 만큼 울창한 숲속을 걷다 보니 홍콩의 14대 총독 이름을 딴 루가드 로드(Lugard Road)에 이른다. 아찔한 절벽 아래로 홍콩섬의 빌딩숲과 빅토리아 항구 너머 카우룽 반도까지, 홍콩의 지형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하이킹의 끝자락, 룽푸샨 컨트리 파크의 소담한 오솔길을 걸을 무렵에는 살짝 아쉬움마저 든다. 위압적인 마천루를 내내 발밑에 두고 걷는 경험은 아마도 쉽게 잊히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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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피크에서 룽푸샨 컨트리 파크까지, 4.5킬로미터의 하이킹 코스를 완주하는 데 2시간 정도 걸린다. 하산 지점인 홍콩대학교 근처에 홍콩대학교 MTR역이 있다. hiking.gov.hk/eng에서 자세한 하이킹 정보를 얻을 수 있다.
2015년 말, 도쿄의 힙스터 성지로 통하던 오모테산도 커피(Omotesando Koffee)가 문을 닫았다. 비록 건물 재건축 때문이긴 했지만 전 세계 커피 애호가에겐 충격적인 뉴스였다. 오모테산도 뒷골목의 허름한 전통 가옥이라는 입지와 대조되는 진중한 장인 정신, 손님을 일대일로 응대하는 맞춤형 서비스는 유례를 찾기 힘든 조합이었으므로. 그 이듬해 완차이에 오픈한 오모테산도 커피 홍콩 지점은 원조의 정신을 계승한다. 고급스러운 부티크가 늘어선 아케이드 1층에 들어서 있는데, 목조를 주조로 한 실내는 미니멀리즘 그 자체다. 먼저 카운터에서 메뉴를 고르고 계산한 다음, 안쪽의 커피 바로 향하자. 흰 가운 차림의 바리스타에게 영수증을 건네면 본인의 커피 취향에 대한 사려 깊은 질문을 받게 된다. 바는 완전히 오픈된 구조라 커피를 만드는 전 과정을 볼 수 있다.
“우리의 하우스 블렌딩 원두는 클래식한 일본 스타일입니다.” 손님이 줄을 잇는 화창한 토요일 아침, 바리스타 헤이맨(Hayman)은 카운터 뒤에서 잠시 숨을 돌리는 중이다. “블렌딩 커피는 다크와 라이트 로스팅 두 종을 선보입니다. 인도네시아, 에티오피아 등 4개국의 원두를 직접 블렌딩하죠. 싱글 오리진 커피 원두는 호주 멜버른의 코드 블랙 커피(Code Black Coffee) 등 전 세계 최상급 로스터리에서 공수해요.” 곧 과묵한 바리스타가 약을 처방하듯 드립 커피와 드립용 필터에 담긴 작은 정육면체 형태의 카눌레를 건넨다. 더할 것도, 덜할 것도 없는 커피 맛의 비결은 무엇일까? 홍콩 지점 오픈을 앞두고 현지 매체와 진행한 어느 인터뷰에서 오모테산도 커피의 창립자 구니모토 에이치(Eiichi Kunimoto)는 “원두와 로스터, 블렌딩의 삼박자가 중요하다”고 답했다. 이는 곧 기본에 충실하는 것이 비법이라는 말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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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모테산도 커피 홍콩 커피 32홍콩달러부터, ooo-koffe.com
압축한 듯 조밀한 홍콩의 도시 풍경은 이방인에게 감탄의 대상이지만, 어떤 홍콩거에게는 예술적 영감을 안겨주기도 한다. 이 도시에서 나고 자란 주얼리 디자이너 웡윙한(Wong Wing Han)의 경우처럼. 센트럴의 복합 문화 공간 피엠큐(PMQ)에 자리한 자신의 주얼리 숍 겸 공방에 출근하는 길조차 그녀에게는 영감의 원천이 된다. “홍콩은 무척 콤팩트한 곳입니다. 이 도시가 제게 주는 긴장감을 작업으로 풀어내려고 해요.” 더 리틀 핑거(The Little Finger)의 주말 오픈 준비를 하며 웡윙한이 말한다. “그래서 제 작품은 다분히 구조적이에요. 세부 형태는 복잡하지만, 전체 구조는 단순한 작품을 만들고자 합니다.” 실내에 진열된 금속 주얼리는 삼각형, 사각형, 원 등 기하학적 형태를 바탕으로 해 주얼리라기보다 그 자체로 하나의 오브제처럼 보인다. 몇몇 제품에는 파스텔 색감의 실을 결합했다. 어떤 것은 거미줄 같기도 하다. “시간과 품이 많이 드는 공예 기법인 손뜨개를 적용해 홍콩거로서 공간에 대해 느끼는 감각을 표현하려고 해요. 밀가루처럼 독특한 소재로 만드는 제품도 준비하고 있답니다.” 웡윙한이 말한다.
피엠큐 뒷골목에는 쇼핑객을 위한 또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경사가 가파른 셩완 일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오래된 래더 스트리트(ladder street, 돌계단길) 한쪽. 세련된 카페 옆으로 푸른색의 낡은 셔터 문이 활짝 열려 있다면 당신은 운이 좋은 셈이다. 한때 인쇄소가 즐비하던 동네에 자리 잡은 빈티지 상점 야오유 스튜디오(You Wu Studio)는 주인장이 내킬 때면 여는 곳. 광둥어로 ‘우연한 만남’을 뜻하는 가게 이름처럼 운이 좋아야 문 너머를 볼 수 있다는 얘기다.
“30년 넘게 빈티지 제품을 모아왔는데, 물건이 하도 많이 쌓여 빈티지 가게를 열게 되었답니다.” 목이 늘어난 티셔츠 차림의 윙퀜풍(Wing Kuen Fung)이 생후 10개월 된 고양이 무이무이의 잿빛 털을 쓰다듬으며 말한다. 카우룽 본점에 비하면 코딱지만 하다지만, 그래도 꽤 널찍하다. 앤티크 엽서와 꽃무늬 보온병, 지구본, 코닥의 식스-20 브라우니(Six-20 Brownie) 카메라, 그 밖에 정체를 알 수 없는 골동품이 무질서하게 널려 있어 눈동자가 바쁘게 돌아간다. 그 사이에는 이곳 인쇄 골목의 역사가 고스란히 밴 고서적 무더기와 타자기도 있다. “이 향수병을 보세요.” 윙퀜풍이 고풍스러운 조각이 새겨진 빛 바랜 유리병 표면을 소중히 어루만지며 말한다. “오래된 물건은 디자인이 훌륭하죠. 저는 그것이 버려지지 않기를 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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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리틀 핑거 thelittlefinger.com
◎ 야오유 스튜디오 17 Shing Wong Street, Sheung Wan, Hong Kong.
글. 이기선 사진. 임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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