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서퍼소녀와 함께 제주 해안을 일주한다. 아드레날린 샘솟는 액티비티와 느긋한 라이프스타일을 경험하며 발견한 제주 해변의 활기찬 매력.
글. 고현 사진. 최남용
7년 전 서핑에 입문한 김하정은 2012년 중문비치 국제서핑대회 초급부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이후 그녀는 블로그, 인스타그램에서 ‘제주서퍼소녀’로 활동하며 서핑의 매력을 알리고 있다. 국제학교에서 수영 강사로 근무하는 틈틈이 제주 해변의 환경을 보호하는 세이브제주바다 캠페인에도 참여한다. instagram.com/jejusurfergirl/
“제주 토박이예요. 모슬포가 제 고향이죠.” ‘제주서퍼소녀’로 활동하는 김하정 씨에게 언제 제주로 이주했는지 물어보자 뜻밖의 대답이 돌아온다. 그간 제주를 수차례 찾았지만, 이곳에서 나고 자란 이와 대면하는 일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2010년 이후 이주민의 수가 7만 명을 넘어섰으니, 제주에서 만난 이의 상당수는 저마다 출신이 달랐다. “제주 사람은 늘 바다를 가까이 두고 지내지만, 서핑 같은 새로운 문화에 대해서는 좀 시큰둥한 것 같아요. 저 같은 제주 출신 서퍼는 드문 편이죠.”
김하정 씨와 제주 서부의 관문 역할을 하는 애월해안도로를 질주한다. 드라마틱한 해안 절경이 펼쳐지는 길 끝에는 곽지해변이 기다린다. 방송 프로그램 <효리네 민박>에 등장하며 화제를 모은 SUP 패드보드를 대여해주는 숍이 군데군데 늘어서 있고, 널찍한 백사장이 깔린 해변은 발을 담그는 이들로 북적인다. 해변 초입에는 좀 낯선 광경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낡은 적빛 벽돌 건물 앞에 모인 이들이 카버보드를 타고 점프와 턴 등 고난도 동작을 연마하고 있다. 카페 겸 게스트하우스 그레이의 주인장 제이 씨와 수환 씨가 근방의 지인과 함께 즐기는 카버보드 모임이다. 그들은 파도가 약해 서핑을 하기 힘든 곽지해변에서 새로운 액티비티를 궁리하던 중 우연히 카버보드를 접했다.
이후 시간이 날 때마다 함께 라이딩을 즐긴다. 종종 손님에게 카버보드를 빌려주고 타는 요령도 알려준다고. “서퍼들은 평소 연습 삼아 카버보드를 타곤 해요.” 김하정 씨가 대열에 자연스레 합류한다. 도로 한복판을 지그재그로 넘나들고, 과감하게 곡선을 그리며 질주하는 그녀의 실력에 여기저기서 감탄사가 흘러나온다.
제이 씨는 과거 사이판의 한 리조트에서 액티비티 강사로 활동한 바 있다. “한국으로 돌아온 뒤에도 바다를 곁에 두고 느긋하게 살고 싶었어요.” 곽지해변에 정착해 그레이를 운영하기 시작한 그는 내일이 오픈한 지 딱 1주년이 된다고 말한다. 나무를 깎아 제작한 카버보드 진열대와 서프보드로 멋스럽게 꾸민 1층의 카페 겸 펍의 시그너처 메뉴는 소나이 샌드위치. “소나이는 제주 방언으로 사나이를 뜻하죠.” 미국 루이지애나의 서퍼가 즐겨 먹는 슈림프 포보이 샌드위치에서 착안한 이 메뉴는 한라봉 레물라드 소스를 가미해 맛이 상큼하다. 카버보드 라이딩의 마무리로도 제격이다.
“곽지해변에는 한여름에도 머리가 얼 듯한 시원한 용천수 샤워장이 있어요. 잔잔한 바다에서 물놀이를 즐긴 뒤개운하게 몸을 씻을 수 있죠. 해변 입구에서 카버보드를 타는 이들과 어울리는 것도 색다른 경험입니다. 해변을바라보며 자유자재로 질주하는 카버보드는 서핑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죠.”
금능해변 남쪽으로 판포포구를 지나 신창교차로에서 우회전하자 신창해안도로가 시작된다. 해 질 녘 이곳을 지나친다면 최적의 시간을 택한 것이다. 바다 위에 일렬로 도열한 풍력발전기와 희미하게 윤곽을 드러내는 추자도 너머로 핑크빛 석양이 그림 같은 정경을 자아내니 말이다. 낭만적 석양 드라이브를 만끽한 뒤, 핸들을 돌려 금능으로 되돌아간다. 약 1,500년 전 화산 폭발로 형성된 신비로운 비양도가 바라보이는 금능해변은 널찍한 현무암 대지를 사이에 두고 협재해변과 경계를 이룬다. 걸어서 10분 거리를 두고 떨어진 두 해변의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기암괴석과 백사장이 스펙터클하게 어우러진 협재해변 주변이 떠들썩한 관광지의 면모를 이룬다면, 포근하게 곡선을 그리는 만에 자리한 금능해변의 저녁은 차분하다.
해변에서 금능마을 안쪽으로 들어서면 안온한 분위기를 이어갈 만한 숙소가 기다린다. 40년 전 마을 교감 선생님의 사택으로 지었던 단층 가옥을 정갈하게 개조한 ‘추의 작은집’. 새하얀 외벽에 ‘House + Barn’이라 쓰인 문구처럼 3개의 1인실과 거실, 부엌이 딸린 본채와 옛 창고를 2인실로 꾸민 별채가 나뉘어 있다. 제주 전통 가옥의 대문 역할을 하는 정낭도 그대로 살려놓았다. 기다란 정낭 나무 2개가 땅에 내려져 있다면 투숙객을 환영한다는 의미. 목련나무와 야자수가 오묘하게 어우러진 안뜰 너머로 강아지 오구가 고개를 내밀고, 본관에선 어쿠스틱 뮤지션 이영훈의 ‘멀리 있는 그대에게’가 잔잔하게 흐른다. “이곳은 주로 ‘혼행족’이 찾는 편이에요. 여럿이오더라도 1인실에 각자 머물며 사적인 시간을 보내곤 하죠. 저 역시 친구와 제주 여행을 할 때 각자 1인실에 머문 적이 있어요. 고즈넉한 마을 분위기를 오롯이 느끼던 그때의 짧은 휴식이 인상적이었어요.” 두 달 전 제주로 건너와 직원으로 합류한 이민영 씨가 추의 작은집에서의 소소한 기억을 들려준다.
올여름 추의 작은집은 숙소 곁에 맥주 펍을 마련했다. 주인장 커플 이상원 씨와 추소명 씨의 성을 딴 ‘이와추’. 평소 맥주를 좋아하던 이상원 씨는 마을에 술 한잔 기울일 만한 장소가 없다는 사실이 늘 아쉬웠다고. 결국 그는 직접 추의 작은집에 어울리는 자그마한 술집을 구상했다. 제주의 옛 창고 형태로 지은 단층 건물부터 널찍한 스테인리스 테이블과 크래프트 맥주 탭을 갖춘 오픈 키친까지 수개월간 공들여 매만진 끝에 마침내 자신이 그리던 펍을 완성시켰다. 이제 금능마을의 분위기에 이끌린 여행자는 제주에서 양조한 맥파이 크래프트 맥주와 함께 연두부튀김 정식 같은 소담한 안주를 즐길 수 있게 됐다. 파도 소리가 희미하게 맴도는 금능마을의 저녁과 더없이 잘 어울리는 사적인 창고에서.
“바다와 가까운 거리를 두고 드라이브를 즐길 수 있는 신창해안도로는 제주의 여느 드라이브 코스보다 한적해 즐겨 찾아요. 해 질 녘이면 잠시 차를 한쪽에 세워두고 붉게 물드는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곤 하죠.”
“퇴사를 앞두고 떠난 제주 여행이 결정적이었어요. 당시 서핑을 처음 경험했는데, 정말 강렬했죠. 그후 몇 차례 서핑 여행을 다녀온 뒤, 제주에 살기로 결심했어요.” 이튿날 여정에 합류한 이송이 씨가 말한다. 김하정 씨와 절친한 그녀는 2년 전부터 제주서핑스쿨의 스태프로 일하며 원없이 파도를 타고 있다. 서핑 때문에 제주로 향한 이라면 대개 이송이 씨와 비슷한 충동을 느꼈을 듯하다. 특히 중문색달해변의 매혹적인 파도를 만난 뒤라면 더욱.
한여름 서귀포의 중문색달해변은 우리나라 최고의 서핑 포인트로 꼽힌다. 6월에서 9월까지 남쪽 해풍의 영향을 받은 파도가 꾸준하게 밀려오는 덕분이다. 해변 동쪽 끄트머리에 있는 중문 해녀의 집 앞에는 좀더 큼지막한 파도가 몰아친다. “중문 듀크 리프라 불리는 곳이에요. 우리나라 서핑이 탄생한 상징적 포인트라 할 수 있죠.” 김하정 씨를 포함해 제주 서퍼의 상당수가 사부로 여기는 이창남 서퍼가 1990년대 초반 이곳에서 최초로 서핑을 시도한 뒤 자신의 별칭으로 이름 붙였다고. 파도의 힘이 강한 데다, 날카로운 암초가 많아 숙련된 서퍼도 선뜻 도전하기 힘든 고난도 포인트로 꼽힌다.
동이 트기 시작한 이른 아침, 중문색달해변에는 수십 명의 서퍼가 파도를 기다리며 패들링에 열중한다. “오늘처럼 1미터 높이가 안 되는 파도는 파티 웨이브라 불러요. 좀 더 느슨한 분위기 속에서 서핑을 즐기는 거죠.” 김하정 씨가 리드미컬하게 밀려오는 파도를 응시하며 말한다. 라인을 맞춰 순서대로 파도를 타는 게 서퍼 사이의 암묵적 규칙. 그녀는 다른 서퍼들과 반갑게 인사를 건네며 보드에 왁스를 바른다. 이어 가볍게 스트레칭을 한 뒤, 파도를 향해 뛰어든다. 삼형제 아이와 보드를 타러 온 가족 서퍼와 오늘 첫 강습을 받은 초심자 그룹이 뒤섞인 바다에서 그녀는 이내 마음에 드는 파도를 골라 능숙하게 보드 위에 올라선다.
중문 인근 대평리에 있는 듀크서프비스트로는 제주 서퍼의 아지트 같은 곳이다. 이곳을 운영하는 양진성 씨 역시 제주에 정착한 서퍼 중 1명. 2000년대 초 호주로 워킹 홀리데이를 떠난 그는 서프 구조원으로 활동하며 자연스럽게 서핑 문화를 익혔다. 한국으로 돌아온 후에는 언제나 서핑을 즐길 수 있는 제주에 정착할 결심을 했다. “서핑이 좋아 무작정 제주로 내려왔는데, 막상 생계를 이어갈 만한 일이 없었어요. 그러다가 문득 해외의 서핑 포인트마다 즐비한 서퍼들의 단골 레스토랑이 떠올랐죠.” 제주의 호텔에서 근무하며 요리를 차근차근 익힌 그는 2016년 대평리에 터를 잡고 듀크서프비스트로를 열었다. 괜찮은 파도가 밀려오는 이른 아침이면 중문색달해변에 나가 서핑을 즐기고, 점심 무렵 느지막이 출근해 나시고렝, 피시 타코 등 서퍼가 찾는 메뉴를 만드는 것이 그의 일상이다. “올겨울에는 캘리포니아에 잠시 다녀올 계획이에요. 요즘 새롭게 떠오르는 레스토랑을 돌아보며 새 메뉴를 개발해보려고요.” 이제 음식에 관한 그의 열정은 서핑 못지않은 듯하다.
“중문색달해변은 우리나라 서퍼가 애정하는 최고의 서핑 포인트입니다. 여름이면 전국 각지에서 몰려드는 서퍼로 북적이죠. 크고 작은 여름 태풍의 직간접적인 영향을 가장 먼저 받아 훌륭한 파도를 경험할 수 있어요. 서핑의 매력을 잘 알려주는 곳이죠.”
글. 고현 사진. 최남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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