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 동북쪽의 산간 지방을 에워싼 무주, 진안, 장수. 소백산맥 줄기에 걸친 세 도시를 넘나들며 자연에 기대 사는 순박한 삶을 만나다.
대전이냐 전주냐. 무주와 진안, 장수로 떠나기 전, 기점으로 삼을 도시를 미리 정해야 한다. 충청남도와 전라북도 대도시 틈에 끼어 있는 무진장(무주, 진안, 장수)을 찾아 들어가는 과정은 여러 번 마우스를 굴려 지도 화면을 확대해야 하는 것처럼 번거롭기 때문이다. 지도 위에서 눈을 비비고 찾아야 하는 지명은 세 도시를 묶어주는 소백산맥 줄기에 걸쳐 있다. 지리산권 안에서 삼각형 모양을 그리는 고원지대. 웅장한 산세가 사시사철 지배하는 산간분지는 초고속 열차나 맨들맨들한 콘크리트 빌딩을 쉽사리 허락하지 않을 듯 고고한 기세다. 세 도시에 서린 삶의 자취는 자연스럽게 산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자연에 기댄 삶 속에는 소외된 고향에 새로운 문화를 전파하는 청년, 지역과 환경을 고민하는 귀촌인이 구석구석 숨어 있다. 그러니 ‘무진장’의 진가를 들여다보려면, 자동차를 끌고 비포장도로를 따라 산골 끝까지 가보는 수밖에 없다. 삶에 필요한 최소한의 개발만 허락한 골짜기 그리고 저마다의 이유를 갖고 자연의 품에 들어온 사람들. 오지 마을엔 우리가 동경하는 유유자적한 삶과 순수한 자연이 공존하는 세상이 펼쳐진다.
“계곡, 산, 스키. 무주를 대변할 수 있는 건 이게 전부였죠.” 최근 무주에 새롭게 문을 연 독채 펜션 서림연가의 주인 최상훈 씨가 자조적인 목소리로 말한다. 여름은 계곡, 겨울은 스키. 마치 수학 공식처럼 박혀버린 지역 이미지는 세월이 지나도 화석처럼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무주의 여름 풍경 또한 수십 년 동안 별일 없이 이어져온 듯 보인다. 큼지막한 글씨로 ‘튜브대여’ 현수막을 내건 펜션은 도너츠, 홍학 등 형형색색의 커다란 튜브를 밖에 걸고 여느 때처럼 성수기 장사에 박차를 가한다. 줄줄이 늘어선 펜션 간판 사이에 불 꺼진 스키 렌털 숍이 잠시 물러나 있고, 전봇대에 매달린 음식점 플래카드가 강한 볕에 그을린 채 풀 죽어 휘날린다. 매년 여름 이런 떠들썩한 풍경을 묵묵히 지켜봤을 대로변의 오래된 가옥 앞에는 나이 지긋한 노인이 그늘에 앉아 하염없이 시간을 보낸다.
서림연가의 분위기는 바깥 풍경과는 사뭇 다르다. 정갈한 야외 갤러리처럼 꾸며놓은 정원은 퇴색한 관광 단지 한복판에서 만난 낙원처럼 말끔하다. 불과 100미터 밖 대로변의 번잡한 간판은 어느새 머릿속에서 사라진다. 마치 세상과 단절된 공간에 들어선 기분이다. 주변 마을과 분리하기 위해 쌓은 노출 콘크리트 외벽 너머로 풍성한 산머리가 교묘하게 걸터앉아 있다. 적막한 공기 속에 얕은 바람 소리와 청아한 새소리가 또렷이 들린다. 정원에 띄엄띄엄 앉은 투숙객은 짙푸른 산을 멍하니 바라보며 휴식을 취한다. 금붕어가 헤엄치는 인공 연못에서는 귀를 간지럽히는 물소리가 쉼 없이 들리고, 뒷문을 살짝 열어두니 커다란 바위가 엉켜 있는 해맑은 계곡이 빼꼼히 얼굴을 내민다. “아무것도 안 해도 좋지 않나요? 언제 오더라도 온전히 휴식할 수 있는 곳. 펜션으로 문을 열긴 했지만, 궁극적으로 제가 원하던 공간이었어요.” 최상훈씨가 먼 산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이야기를 건넨다. 올해 5월, 그는 몇 해 전 사놓은 마을 텃밭에 1년간 준비한 펜션을 열었다. 그는 펜션을 열 장소를 두고 제주와 무주 사이를 고민했다고 덧붙인다. 무주를 택한 건 자신이 나고 자란 고향이기도 하고, 이렇다 할 ‘핫플레이스’ 하나 없는 시골 동네에 랜드마크를 하나쯤 만들고 싶다는 거창한 포부도 있었기 때문이라고. “이곳에 온 대부분의 투숙객은 밖에 잘 안 나가요. 하루 종일 정원에서 멍하니 있기도 하죠. 저는 그게 좋아요.” 그는 외지인이 이곳에 머무는 동안 무주의 숨은 매력을 한 꺼풀씩 벗겨내길 바란 듯하다.
서림연가 뒤편으로 흐르는 물은 덕유산 골짜기에서 흘러 내려온 구천동 계곡의 일면이다. 서림연가에서 자동차로 10분 거리, 덕유산국립공원을 깊숙이 걸어 들어가면 37킬로미터의 장대한 계곡 길이 시작된다. 33개의 비경을 품은 구천동 물줄기는 라제통문에서 향적봉까지 기암괴석과 희귀한 동식물이 서식하는 원시림 사이를 구비구비 흘러간다. 국립공원에서 운영하는 야영장에는 여름 내내 색색의 텐트가 진을 친다. 산자락에 몸을 숨기고 가만한 시간을 보내려는 피서객이 끊임없이 들락거린다는 얘기다. 그들은 제 집 앞을 나온 듯 가벼운 옷차림으로 완만한 등산로를 따라 산책을 즐긴다. 넉넉한 산자락에 펼쳐진 장쾌한 능선과 청량한 물줄기를 따라 늘쩡늘쩡 걷다가 안내판이 붙은 계곡이 등장하면 잠시 멈추기를 반복한다. 매표소부터 백련사까지 왕복 12킬로미터 구간에서는 구천동 33경에 이름을 올린 계곡을 곳곳에서 만나게 된다. 선녀와 거북이, 사자, 용, 학, 호랑이 등이 나오는 전설을 곱씹으며 계곡을 따라 걷는 트레킹 코스는 무주의 청정 자연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밖에서 바라본 풍경은 여름산의 일각이라는 것을 따끔하게 일깨워주듯.
무주를 대표하는 세 가지에 하나를 더 붙이자면 밤하늘을 수놓는 빛일 것이다. 청정 환경의 지표라는 반딧불이 서식지는 무주가 내세우는 또 하나의 관광 키워드다. 아쉽게도 이 불빛은 1년에 두 번, 6월과 9월에만 세상에 진귀한 구경거리를 내놓는다. 이때는 탐사대를 꾸려 자연의 신비를 바짝 좇아 볼 수 있다. 반딧불이 대신 무주의 깨끗한 밤하늘을 좀 더 가까이에서 보려면 반디별천문과학관으로 향해보자. “주변이 어두워야만 별이 또렷하게 보입니다. 어둠에 익숙해지면 더 많은 별이 보일 겁니다.” 관측실의 지붕이 서서히 열리고, 천문해설사가 별을 찾기 시작한다. 토성과 목성, 견우별과 직녀별 사이를 스치는 은하수. 동화 같은 밤하늘의 이야기는 무주의 청정 자연을 만끽하는 마지막 코스로 더할 나위 없다. 언제라도 그곳에 있을, 자연의 위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유미정은 <론리플래닛 매거진 코리아>의 에디터다. 사진가 정수임과 무진장 취재에 동행했다. 둘은 촉박한 시간 탓에 미처 다 보지 못한 마이산의 풍경이 끝내 아쉬워 가을 산행을 계획 중이다.
글. 유미정 사진. 정수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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