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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의 숲, 뜻밖의 길'
일본 기이 반도 여행

by 온더로드


Pilgrimage to the Holy Mountain

치유의 숲, 뜻밖의 길


론리플래닛이 2018년에 방문해야 할 여행지로 선정한 일본 기이 반도에서 순례자의 흔적을 좇는다. 그 첫 번째 날, 신성한 고야산에 들어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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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 1

비밀스러운 산


곤고부지 곤도 뒤편에 자리한 신사의 도리이. 불교와 신토가 결합된 일본 특유의 신불습합 (神仏習合) 신앙의 일환이다. © 임학현

산 위를 떠도는 여름 햇살은 투명하다. 고불고불한 길을 따라 운전대 꺾기를 수십여 번, 아슬아슬한 주행 끝에 고야산(高野山)에 이른다. 4시간을 내리 걸어야 하는 길을 편히 오르는 대가로 멀미를 감내했다. 차에서 내려 산 공기를 들이마시니 정신이 드는 것 같다. 고야산은 와카야마현에 있는 해발고도 1,000미터 언저리의 산악 지대를 일컫는다. 1,200년 전 일본 불교의 주류인 진언종(真言宗)이 시작한 곳이며, 진언밀교의 문을 연 홍법대사 구카이(空海)가 잠들어 있다고 전해지는 산이다. 무척 신성한 곳으로 여겨 여성의 출입을 금하기도 했지만, 고야산의 입구 다이몬(大門)은 오늘날 모든 사람을 향해 활짝 열려 있다.


낡은 식당과 찻집, 최근 생긴 듯한 카페 몇 곳을 지나 구카이가 개창한 사찰 단조가란(壇上伽藍)을 둘러본다. 쭉 뻗은 삼나무가 곳곳에 서 있고, 담벼락엔 진녹색 이끼가 덮여 있다. 서양인 관광객 몇몇이 천년 고찰의 신비로운 자태를 눈으로 더듬는다. 고야산에는 사찰 117개가 자리하며, 단조가란은 고야산 전체의 총본당이다. 구카이의 영묘 오쿠노인(奥の院)과 함께 고야산의 2대 성지에 해당한다. 전국의 3,600여 개 진언종 사찰의 총본산인 곤고부지(金剛峯寺)가 바로 옆에 있지만 모든 행사는 여전히 단조가란의 대강당인 곤도(金堂)에서 열린다.




홋신몬오지에서 구마노혼구타이샤로 향하는 구마노고도 구간의 산길. © 임학현

“이 탑은 진언밀교의 상징과 같습니다.” 고야산에서 수행하는 야스다 구겐(安田 空源) 스님이 우리를 곤폰다이토(根本大塔)로 안내한다. 구카이가 수행 도장으로 건립한 곳이다. 높이 50미터의 주홍빛 탑 안에는 커다란 불상 주변으로 4개의 작은 불상이 놓여 있고, 그 주변에 흩어진 기둥 위로 16점의 불상화가 입체 만다라를 형성하고 있다. “이 만다라는 구전으로만 전해지던 밀교의 가르침을 눈에 보이는 것으로 만든 첫 형상입니다.” 야스다 스님은 불상 주위를 1바퀴 빙 둘러 걷는다. “구카이는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공부뿐 아니라 경험 또한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신자들이 이곳에 들어와 오묘한 분위기를 느끼며 영적 체험을 하기를 바랐죠.”


구카이가 설파한 진언밀교는 비밀스러운 주문법을 통해 부처의 세계에 다다른다고 강조한다. 고야산 전반에 흐르는 신비한 분위기는 종교적 체험의 깊이를 강조하는 밀교의 특징과도 관련이 깊을 것이다. 20세기 초 근대 환상 문학의 선구자로 불리는 이즈미 교카(泉鏡花) 또한 대표작 <고야성>에서 이를 잘 보여준다. 고야산에서 수행한 행각승이 들려주는 기묘한 이야기를 통해서 말이다. 이런 분위기는 지금도 유효하다. 야스다 구겐 스님은 여행자가 고야산의 신성함을 체험할 수 있는 기발한 방법을 생각해냈다. 구카이가 잠들어 있는 오쿠노인을 어둠 속에서 찾아가는 야간 투어를 진행하는 것이다.


에코인에서부터 오쿠노인 나이트 워킹 투어를 이끄는 야스다 구겐 스님. ⓒ 임학현

저녁 7시, 에코인(恵光院)의 마당에는 이미 꽤 많은 사람이 모여 있다. 숙박형 사찰인 이곳은 오쿠노인 나이트 워킹 투어의 출발 장소다. 에코인에 머물지 않아도 투어에 참여할 수 있으며, 영어와 일본어 2개 조를 스님이 직접 이끈다. 우리는 야스다 스님이 이끄는 투어 대열에 참여한다. “이 다리에서 사당까지 2킬로미터를 함께 걸어갔다가 되돌아올 겁니다. 사진은 찍어도 되지만, 플래시는 금합니다. 길이 울퉁불퉁하니 조심하세요.” 오쿠노인 입구에서 합장한 뒤 으슥한 산길로 들어간다. 그새 해가 기운 것인지, 점점 짙어진 숲의 그림자 때문인지 사위는 점점 어두워진다. 양옆에 밝힌 초롱불을 의지해 천년 숲의 신령한 공기를 호흡하며 고요한 숲을 걷는다.


야스다 스님이 길을 멈추고 이야기한다. “일본의 묘비는 일반적으로 사각형이지만, 이곳에선 다섯 가지 모양의 돌을 쌓은 고린토(五輪塔)를 많이 볼 수 있어요. 각각 하늘, 바람, 불, 물, 땅을 상징합니다. 불교에서 우주를 형성한다고 생각하는 다섯 요소지요.” 그의 말처럼 각기 다른 모양의 돌을 차곡차곡 쌓은 비석이 삼나무 숲 가운데 끝없이 펼쳐진다. 1개당 1명 이상의 사람이 묻혀 있다고 하니 오쿠노인은 20만여 명의 공동묘지인 셈이다. 걷다 보면 도요토미 히데요시 같은 권력자부터 파나소닉, 닛산, 샤프 등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일본 기업 창립자의 묘비를 발견할 수 있다.


오쿠노인에는 1,200년 전부터 세우기 시작한 20만 개의 묘비가 있다. ⓒ 임학현

얼굴이 비치지 않으면 3년 안에 죽는다고 전해지는 우물, 넘어지면 3년 안에 죽는다고 하는 계단, 중생의 고통을 대신 겪으며 땀을 흘리는 지장보살 등 으스스한 전설이 얽힌 길을 지나 구카이의 사당 앞에 다다른다. 계곡 건너편, 섬처럼 보이는 고즈넉한 자리에 구카이의 영묘와 365일 등불이 꺼지지 않는 등롱당이 자리한다.


“구카이는 저곳에 잠들어 있습니다. 최근에도 흰옷을 입고 긴 수염을 기른 구카이를 봤다는 목격담이 전해지지요. 구카이는 진정한 가르침은 눈에 보이지 않는 거라고 이야기했어요.” 야스다 스님은 사당이 자리한 불전 뒤쪽 뜰로 우리를 데려가 조용히 속삭인다. “모두 잠시 눈을 감고 손을 모아주세요.” 그러더니 그는 목소리를 높여 염불을 외기 시작한다. 알아들을 순 없지만, 고요한 산 가운데에 공명하는 소리에는 빨려 들어갈 듯한 힘이 있다. 찰나인 듯 아득한 명상의 시간을 지나 신비함에 도취된 상태로 눈을 뜬다. 여기저기서 박수가 터져 나온다. 모두 비슷한 감정을 느낀 모양이다. 왔던 길을 돌아가는 시간. 어두운 숲에서 나타난 반딧불이 1마리가 일행과 동행한다. 작은 별처럼 숲을 비추는 불빛과 함께 신비로운 고야산의 아름다움을 마음에 새긴다.




고야산 오쿠노인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비석. ⓒ 임학현


What’s More

고야산 템플 스테이

고야산에는 52개의 숙박형 사찰 슈쿠보가 자리한다. 각각의 슈쿠보는 사정에 맞게 불경 필사, 명상 등 다양한 체험을 제공하며, 대부분 숙박에 쇼진요리 2끼가 포함돼 있다. 오쿠노인 나이트 워킹 투어는 예약제로 운영하며, 매일 저녁 7시에 에코인에서 출발한다(왕복 1시간 소요, 1인 1,500엔). shukubo.net















김수지는 <론리플래닛 매거진 코리아>의 에디터다. 육식을 선호하는 사진가 임학현과 함께 템플 스테이를 한 덕분에 고야산의 쇼진요리를 2인분으로 즐겼다.





글. 김수지 사진. 임학현





다음 이야기

Day 2 - 신앙이 지킨 건 무엇일까?

Day 3 - 과거를 상징하는 신사

Day 4 - 폭포 앞의 물음

일본 기이반도 여행 노하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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