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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더로드 Mar 05. 2019

야마가타의 겨울은 길다

눈과 온천, 사케, 장기(将棋)의 고장, 겨울 야마가타를 가다. 

눈이다. 백설이 수북하게 쌓인 대지는 또 한 번의 눈을 받아낸다. 도쿄역을 출발한 신칸센이 도호쿠(東北) 지역으로 진입할 때부터, 창밖 멀리 듬성듬성 눈 덮인 봉우리가 지나가더니, 어느 순간 눈발이 날카로운 사선을 그으며 떨어지고 있다. 그 눈은, 백설은, 기차가 가로지르는 야마가타의 풍경을 막막하게 덮는다.






눈은 쌓이고 강물이 된다


(좌) 다이쇼 시대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발산하고 있는 긴잔 온천. (우) 야마가타의 음식 문화에서 소바와 라멘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 허태우




도호쿠를 종단하는 오우산맥(奧羽山脈)을 넘어가는 야마가타 신칸센은 일본에서 가장 느린 신칸센으로 통한다. 이는 야마가타현의 지리적 특성 때문이다. 산악 지대만 70퍼센트가 넘는 이 현에서는 신칸센도 이리저리 굽은 구식 철로를 달리며 제 속도를 늦춰야 한다. 어디 그뿐이랴. 일본에서 가장 눈이 많이 내리는 지역답게, 그러니까 2018년 2월에 4미터 넘는 적설량을 기록했을 때처럼, 눈은 때로 기차를 연착시키고, 농가의 지붕을 무너뜨리고, 시선을 멀게 한다. 현 내에 변변한 국제공항도 없는 터라 사람들은 철로와 도로에 의존해 이 지역에 들어온다. 느리다. 사람들의 이동도, 지역의 성장도. 모든 것을 자연에 맞추듯 말이다. 거리에서 마주친 이들의 걸음은 느리고 그들이 살아야 할 겨울은 길다. 추운 계절을 경험해야 하는 시간 또한.

긴잔 온천(銀山温泉)의 다키미칸(瀧見館)에서 소바를 먹는다. 창 너머 순백의 풍경 한 귀퉁이에 시로가네 폭포(白銀瀑布)가 물줄기를 흘리고 있다. 이름 그대로 다키(폭포)를 보는 여관이다. 이른 아침부터 식탁에 올라온 메밀 소바는 야마가타의 자랑 중 하나다. 일본인도 야마가타에서는 애써 한 번쯤 소바를 찾아 먹는다. 메밀 함유량이 높은 이곳 소바의 면발은 두툼하고 의외로 차지다. 입안으로 들어갈 때마다 마치 우동을 먹듯 ‘후루룩’ 소리가 절로 난다. 그건 나뭇가지 위 수북하게 쌓인 잔설이 무게를 못 이기고 떨어지는 소리 같기도 하다. 몇 번의 젓가락질로 1그릇을 금세 비우고 면수를 한 모금 마시니, 겨울의 메밀 소바가 별미라는 단순한 결론에 닿는다.







(좌) 모가미강 뱃놀이에서 마주친 붉은 도리이 뒤로 시라이토노다키(白糸の滝) 폭포가 떨어진다. (우) 모가미강 뱃놀이에서 맛보는 은어 소금구이. ⓒ 허태우




눈과 더불어 물은 야마가타현을 상징한다. 일본에서 유일하게 모든 시정에 온천이 솟아나고, 폭포도 가장 많은 지역이다. 500여 년 전, 은을 채굴하다 발견한 긴잔 온천은 다이쇼 시대(1912~1926년)의 낭만을 표출하는 곳이다. 사람 키보다 높게 쌓인 설벽 너머로 보이는 온천 마을은 1세기 전에 촬영한 기록사진에서 바로 튀어나온 듯하다. 목조건물의 검은 골격은 겨울을 맞아 더 도드라져 깊은 인상을 남긴다. 실제로 이곳에서는 급격한 변화를 거부한다. 일부러 조례를 제정해 다이쇼 시대의 모습을 보존하고 있다. 마을 한복판을 흐르는 긴잔가와(銀山川) 양옆에 도열한 목조 료칸, 군데군데 서 있는 가스등, 언제 생겼는지 모르는 우체통과 상점들, 건물 외관을 장식한 일본식 부조 고테에(こて絵, 단청) 등. 첨단은 이곳에서 통용되기 어렵다. 일본 현대 건축의 대가 구마 겐고(隈 研吾)가 설계했다는 료칸도 그저 옛 동네 정경의 일부일 뿐이다. 그러니 이 온천 거리는 현재와 과거의 중간 어디쯤에 서서, 영원히 손님을 맞이해줄지도 모르겠다. 한때 일본 제일이었다는 은광은 문을 닫았지만, 청순한 연인들은 쉴 새 없이 증명사진을 남기는 데 여념이 없으니 말이다.

긴잔의 광산이 폐광될 무렵인 1689년, 하이쿠의 성인이라 불리는 마쓰오 바쇼(松尾芭蕉)는 제자와 함께 도호쿠 기행을 떠난다. 바쇼의 걸음이 닿은 곳 중에서도 유달리 후세에 풍류를 전하는 곳이 있으니, 바로 모가미강(最上川)이다. 그가 남긴 기행문 <오쿠노호소미치(奧の細道)>에서는 모가미강을 이렇게 하이쿠(俳句, 5‧7‧5음절의 3행으로 이루어진 짧은 시)로 묘사한다. ‘사미다레오 아츠메테하야시 모가미가와(五月雨をあつめて早し最上川).’ 풀이하자면, ‘장맛비 거두어 모아 물살 거센 모가미강’. 에도 시대에는 주요 수송로였고, 야마가타의 젖줄이라고 일컫는 강. 협곡 속 울창한 숲 사이로 배를 타고 내려가며 그는 풍경을 읊은 것이다.




마쓰오 바쇼가 감탄한 모가미강을 따라 유유히 흘러가는 보트. ⓒ 허태우





후루쿠치항(古口港) 승선장에서 뱃놀이 보트가 대기하고 있다. ‘바쇼 라인’이라 일컫는 루트를 따라 겨울 뱃놀이에 동승할 참이다. 약 220킬로미터 길이의 모가미강을 타고 12킬로미터쯤 내려가는 뱃놀이다. 기다란 배 안에 놓인 고다쓰 위에는 은어 소금구이와 토란국 등 야마가타 지역 음식을 포함한 식사가 차려져 있다. 풍성하다기보다 소박하나, 뱃놀이의 오모테나시(おもてなし, 환대)를 느끼기에 부족함은 없다. 시동을 걸자, 이윽고 바쇼가 감탄한 그 풍경 속으로 배가 흘러간다. 겨울철 모가미강에는 동해 쪽에서 드센 바람이 불어온다. 강의 양안으로 가파르게 솟아오른 산에는 백지에 흩뿌려진 철가루처럼 소나무와 단풍나무가 짙고 옅은 농담을 만들어놓았다.




글/사진. 허태우

허태우는 <론리플래닛 매거진 코리아>의 편집장이다. 이번 여행에서 도호쿠의 응원구호 ‘얏쇼! 마카쇼!’를 배웠다.





'야마가타의 겨울은 길다'에 이어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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