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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더로드 Nov 19. 2015

경남 창녕에서 마주한 우포늪과 억새의 풍경

Over the Wetland

겨울 철새가 날아드는 우포늪을 지나서 화왕산 억새 평원으로. 색다른 가을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창녕에 가다.

소목나루터 인근, 우포늪 환경감시원 주영학 할아버지가 모는 장대 나룻배가 늪 한가운데로 나아간다. © 신규철

늪지대를 찾아서


‘출사(出寫)’라는 단어를 우리나라처럼 흔하게 사용하는 곳도 드물 것이다. 출사의 사전적 의미를 따지자면 사진 찍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이 출장을 가서 사진을 찍는 일을 뜻하는데, 실제 이 단어를 즐겨 사용하는 이들은 전문 사진가보다 사진 애호가인 경우가 많다. 심지어 최근 몇 년간 사진 좀 찍는다는 이들 사이에선 출사 여행이 일종의 유행처럼 자리 잡았다. 출사지 역시 마찬가지. 근사한 사진을 얻을 수 있는 장소라면 밤낮 가리지 않고 너나 할 것 없이 모여든다. 비슷한 구도의 비슷한 풍경을 찍기 위해 그토록 열정적인 것이 살짝 의아하기도 하지만, 그들이 대한민국 구석구석의 숨은 절경을 널리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창녕 우포늪도 그중 하나다. 물억새와 갈대가 바람에 일렁이고 겨울 철새가 하나둘 찾아들 때, 아침이면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가을의 우포늪은 최고의 출사지로 꼽힌다.


햇살 좋은 10월의 어느 일요일 정오. 우포늪생태관 일대는 떠들썩하다. 주차장은 빈 자리 없이 가득 들어차고, 자전거 대여소도 붐빈다. 여기서 비포장도로를 따라 몇 십 미터 걸어 들어가면 어느샌가 길 왼편으로 시야가 탁 트인다. 나지막한 산자락이 빙 둘러싸며 경계를 이룬, 잔잔하고 너른 평지다. 그 위에 드리운 그림자라곤 길가에 늘어선 이태리포플러가 만든 것이 유일하다. 슬슬 열기를 더해가는 한낮의 햇살 아래 연녹색과 황금빛이 뒤섞인 대지를 바라보며 ‘웬 들판이지’ 하던 찰나, 저 멀리 보일락 말락 드러난 수면이 눈에 들어온다. 그제야 이곳이 흙이 아니라 물 위에 펼쳐진 풀밭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허허벌판의 허수아비처럼 미동도 없이 서 있던 백로 1마리가 나를 놀리듯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오른다.

목포에 있는 왕버들 군락에서는 우포늪의 원시성을 확인할 수 있다. © 신규철

경남 창녕군 3개 면(대합면, 이방면, 유어면)에 걸쳐있는 우포늪은 총 면적 3.4제곱킬로미터, 담수 면적 2.3제곱킬로미터로, 우리나라 최대의 내륙 습지다. 규모보다 더 놀라운 것은 역사다. 이곳에 처음 늪이 형성된 과정은 한반도 생성 시기와 맞물린다. 다시 말해 1억4,000만 년 전 쥐라기 공룡이 뛰놀던 시절이라는 얘기. 오늘날 우포늪은 원시의 자연 습지로 생태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지만, 물도 뭍도 아닌 이 어중간한 지대에 세월이 늘 호의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낙동강의 지류인 토평천 유역에 형성되어 강이 범람할 때면 일대에 홍수를 일으키는 주범으로 여겼고, 일제강점기에는 제방을 쌓아 늪의 일부를 농경지로 만들었다. 1970년대에는 개발을 내세워 매립 공사를 진행하기도 했고, 1990년대엔 쓰레기 매립장이 들어설 뻔했다. 그러다 생태계보존지역으로 지정된 것이 1997년, 국제 습지조약인 람사르 협약에 따라 람사르 습지로 등록된 것이 그 이듬해다. 물론, 지역 주민의 생존권과 환경 단체의 보존 논리 간의 대립은 여전히 넘어야 할 산이긴 하지만.


우포늪은 4개 늪을 총칭하는 이름이다. 가장 면적이 넓은 우포를 중심으로 목포, 사지포, 쪽지벌이 둑이나 자연림을 사이에 두고 있는데, 우포늪 생명길을 따라가면 이 거대한 늪지대를 두루 둘러볼 수 있다. 자전거 코스와 도보 코스로 이뤄진 탐방로 전 구간을 한 바퀴 돌려면 3~4시간은 필요하다. 어차피 완주가 목적인 길은 아니지 않은가? 우포늪의 매력을 제대로 만끽하려면 여유 있을수록 더 좋겠다. 조금 전 지나친 우포늪생태관은 8.4킬로미터에 이르는 생명길의 시작점. 이내 나타난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접어들어 대대제방으로 향한다. 둑 위에 서면 우로는 아직 추수 전인 들녘이, 좌로는 우리말로 ‘소벌’이라 부르는 우포가 펼쳐진다(목포와 사지포는 각각 나무벌과 모래벌로도 불린다).

늪지와 들판 사이에 3.1km 길이로 뻗은 대대제방은 훌륭한 자전거 길이다. © 신규철

1930년대 대대제방을 쌓기 전에는 논이 들어선 곳까지 모두 습지였다. 오늘날 3킬로미터가량 죽 뻗은 제방 위엔 자전거 행렬뿐이다. 하늘 아래 숨을 곳 하나 없이 사방이 노출된 둑은 늪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로 훌륭하지만, 산책길로 최상은 아니다. 입고 있는 검은색 바지가 가을볕에 익어가는 걸 느낄 때 잠시 후회하기도 했다. 자전거를 빌릴 걸. 하지만 순간순간, 걷고 있다는 사실이 만족스럽기도 하다. 이따금 쾌청한 바람이 불어와 등을 훑고 지나갈 때, 잠시 걸음을 멈추고 덜여문 갈대를 어루만질 때, 나뭇가지 위에서 우두커니 보초를 서는 왜가리를 바라볼 때. 우포늪에는 이렇게 무념무상으로 걷고 싶을 때 와야 한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4개 늪 중 가장 규모가 작아 아기자기한 매력이 있는 쪽지벌. © 신규철

우포를 지키는 사람들


“지금 어딩교?”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우렁찬 목소리의 주인공은 소목마을에서 만나기로 한 주영학 할아버지. 그는 우포늪의 살아 있는 마스코트다. 그건 단지 할아버지가 우포늪 일출을 찍은 사진 속에 자주 등장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우포늪이 생태계보존지역으로 지정된 이래 이곳을 떠난 적이 없다. 당시 IMF 외환위기 때문에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온 주영학 할아버지는 18년째 우포늪 환경감시원으로 일하고 있다. 그만큼 이 습지를 속속들이 꿰고 있는 이도 드물 것이다. 길을 잘못 드는 바람에 도착 예정 시간을 넘기자 할아버지는 자신이 데리러 갈 테니 꼼짝하지 말라고 당부한 뒤 전화를 끊는다. 한 쪽은 목포제방, 다른 쪽은 노동마을 방향임을 알리는 이정표가 전부인 갈림길 앞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의심 반 기대 반으로 기다리는 일뿐. 잠시 후 오토바이 1대가 흙먼지를 휘달리며 거침없이 다가온다. 과연 베테랑 우포늪 지킴이다운 등장이다.

모든 것이 멈춘 듯 고요하고 신비로운 우포늪의 새벽 풍경. © 신규철

그를 따라 소목나루터로 간다. 물풀이 무성한 물가에 낡은 나룻배 3척이 아무렇게 놓여 있다. 이곳 마을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직접 만든 배를 타고 늪으로 나가 물고기를 잡았다. 우포늪이 생태계보호지역이 된 이후 허가받은 사람만 어업 활동을 할 수 있게 되면서 현재 9가구만 그 명맥을 잇고 있다. 주영학 할아버지가 장대로 늪 바닥을 밀자 배가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이기 어부들 배는 내가 암만 타도 괘안코, 다른 사람은 안 되고.” 그는 이곳에서 나고 자랐다. 그의 아버지는 인근 수리조합에서 근무했고, 그의 큰아들은 그곳 양수장에서 태어났다. 우포늪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히 아는 것도, 장대 나룻배에서 능숙하게 균형을 잡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살짝 들린 배의 앞부분이 개구리밥으로 뒤덮인 초록빛 수면을 부드럽게 가른다. 물 위에서 바라보는 늪은 땅에서 바라보던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다. 사람이 내는 소리는 희미해지고, 배가 물을 밀어내는 소리와 마구 자란 수초 더미를 통과하는 바람 소리가 또렷하게 들린다. 물속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생각보다 맑다. 오랜 세월 쓸모 없는 땅으로 여긴 이곳에서 1,500여 종의 동식물이 살아간다. 여름이면 왜가리와 중대백로가, 가을이면 고니와 청둥오리가 늪을 찾는다. 멸종 위기 식물인 가시연꽃도 우포의 빼놓을 수 없는 보물이다. ‘차르륵 차르륵’. 가시연꽃을 보여주고 싶다는 할아버지가 자글자글하게 주름 잡힌 거대한 연잎을 헤치며 배를 몬다. 한여름에 보라색 꽃을 피우고 이맘때 지기 시작하는데, 운 좋게도 입을 살짝 벌린 꽃망울 하나를 발견한다. 보랏빛 속살을 확인한 것보다 할아버지의 의기양양한 모습을 바라보는 마음이 훨씬 흐뭇한 것은 왜일까.

지다 만 봉오리 사이로 보랏빛 꽃잎을 드러낸 가시연꽃. © 신규철

그는 사람들이 “하도 쓰레기 버려싸서” 이 일을 하게 됐다. 하루에도 몇 차례씩 우포늪 곳곳을 누비며 쓰레기를 줍고 오가다 만나는 방문객의 질문에 답도 해준다. 일출을 찍으러 오는 이들이 부탁하면 이른 새벽부터 모델 노릇까지 한다. ‘6시 내고향’부터 영국 BBC 방송까지 수많은 매체와 촬영한 탓에 유명세도 치렀지만, 그 모든 것이 좋아서 하는 일이라 재미있단다. 그러는 사이 우포늪은 몰라볼 정도로 깨끗해졌다. “그래도 옛날이 좋았다”고 주영학 할아버지는 말한다. 손때가 덜 묻고 자연스러웠던 늪. 아마 그때는 논우렁도 지금보다 훨씬 많이 잡혔겠지.

주영학 할아버지에겐 우포늪과 관련된 모든 일이 즐거움이다. © 신규철

한때 늪에 서식하는 물고기와 함께 이곳 주민들의 생계 수단이 되어준 논우렁은 최근 개체수가 줄었다. 물옷을 입고 논우렁을 채취하는 아낙네는 보기 힘들어졌지만, 우포늪 입구에 위치한 식당에 가면 논우렁이 들어간 국과 비빔밥, 무침, 전 등을 맛볼 수 있다. 이곳 식으로는 ‘논고동’. 우거지와 된장을 넣고 끓인 논고동국과 쫄깃한 식감을 더한 논고동전은 전혀 자극적이지 않고 심심하니 자연을 그대로 닮은 맛이다. “우포늪에서도 논고동을 채취하지만, 양이 적어서 다른 곳에서 잡은 것도 가져오지요.” 식당에서 우연히 마주친 이인식 선생이 우포 맛집을 잘 찾아왔다며 덧붙인다. 교사 출신인 그는 1991년 낙동강 페놀 오염 사건을 경험하면서 자연 정화 기능을 지닌 늪의 중요성을 깨닫고 습지 보전 운동가의 길을 택했다. 교직 생활을 정리한 뒤 본격적으로 우포늪에 터를 잡은 것이 2010년. 주민이 된 지는 이제 5년이 조금 넘었지만, 이곳에 처음 드나들기 시작한 것은 25년 전부터다. 그리고 그는 최근 우포자연도서관을 개관했다.


유어면 대대리에 위치한 대형 창고 안은 어느 도서관과도 다르다. 600제곱미터 면적의 널찍한 실내 한쪽에 사과 상자 같은 책꽂이를 여럿 쌓아 올리고, 바닥에 나무판을 겹겹이 깔아 책상 겸 의자 역할을 하도록 한 것이 전부. 창고의 층고와 면적을 생각하면 상당히 소박하고 자유로운 형태지만, 이 공간이 이제 시작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고개가 끄덕여질 것이다. 앞으로 건물 한쪽에는 책을 읽다가도 드러누울 수 있는 게스트하우스가 들어설 예정이고, 우포를 찾은 방문객은 물론, 현지인을 위한 다목적회관 겸 마을 학교의 역할도 할 계획이다. 비영리 시민 단체 ‘도서관친구들’과 강예린, 이치훈 등 젊은 건축가를 비롯해 많은 이가 프로젝트에 동참하고 있다. 이인식 선생은 도서관을 혼자 힘으로 뚝딱 짓기보다 여러 사람의 노력이 모여 천천히 완성하기를 바란다.

대대리에 있는 대형 창고를 개조해 문을 연 우포자연도서관에서 만난 우포 지킴이 이인식 선생. © 신규철

“창고 앞 논을 습지로 되돌리는 것이 저의 최종 목표입니다. 그렇게 되면 현재 복원 노력 중인 따오기의 터전을 마련하고 유기농업과 유기 축산을 실현할 수 있어요.” 그가 대대제방으로 생긴 농경지를 바라보며 말한다. ‘관동영농회 농산물 간이집하장’이라는 이름을 단 창고는 위치상 그 중심에 있다. “이 건물은 김영삼 정부가 농업 시장 개방을 추진하면서 농민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각 마을에 지은 대형 창고 중 하나입니다. 실제로는 무용지물이었죠. 그런 공간이 도서관으로 재탄생하는 것은 역사·문화적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도서관은 하나의 디딤돌인 셈이다.


이인식 선생이 습지로 복원하고자 하는 창고 앞 들판은 그가 운영하는 우포자연학교의 중요한 교육 현장이기도 하다. 11월 중순부터는 이곳에서 아이들과 독수리 먹이 주기 체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생태 관광이라고 말한다. 억지로 무엇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마을 고유의 전통과 문화를 공유하는 것.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고 앞으로의 비전을 제시하는 것은 그가 생각하는 자신의 몫이다. “내가 살아 있을 때 하면 제일 좋고, 안 되면 다음 세대에게 맡겨야죠.” 어쩌면 담담한 그 말 한마디에 우포늪의 미래가 달려 있는지도 모르겠다.

한때 분화구가 있던 화왕산 정상에 형성된 너른 분지. 가을이면 18만m2 규모의 억새밭이 이곳을 뒤덮는다. © 신규철


 표영소 ・ 사진 신규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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